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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숨쉬는 정읍 칠보 원백암마을


정읍 칠보 원백암청년회, 원백암마을 마을지 발간


기사 작성:  이종근 - 2020년 09월 07일 08시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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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보 원백암 당산제는 지금으로부터 300여년 전부터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키 위해 전해 내려오는 풍속행사로 매년 열리고 있다. 원백암마을에는 조선시대 자선사업가인 모은 박잉걸이 숙종 때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남근석(지방민속자료 제13호)을 비롯 노거수, 암석, 입석 등 24당산이 있었으나 현재는 남근석을 비롯, 여근목 등 12개의 당산만이 남아 있다.

남근석은 자손이 없는 여인이 소복을 입고 촛불을 든 채 남근석을 돌면 아들을 잉태하게 해준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원백암마을 주민들은 매년 정월 초사흘 날 풍년을 기원하고 제액을 위해 당산제를 올리고 있다. 원백암(元白岩)마을은 현재 백암리의 중심마을이며, 마을 이름을 백암이라고 부르게 된 까닭은 마을 뒷산에 흰 바위가 많았기 때문이라 한다.

정읍 칠보 원백암청년회가 살아숨쉬는 원백암마을을 주제로 한 마을지를 펴냈다.

마을 유래를 비롯, 백암재 노인회관, 당산제 방법과 순서, 태자봉과 여근 바위, 지명 해설, 열두당산과 남근석의 내역, 당산제 홀기 축문, 원백암광장 기념비문 등이 소개됐다.

역사 인물 중에 모은(慕隱) 박잉걸 선생을 모르면 안된다. 자선사업가로서 당대는 물론 후대에서도 기리고 있는 박잉은 베풀고 나누는 삶을 넘어 공유의 개념으로 자선을 실천하여 모두가 함께 잘사는 세상을 만들려고 했던 사람이다. 그는 1676년 칠보면 백암리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여웅(汝雄)이다. 북면사무소에서 칠보로 가는 길, 백암초등학교 앞 도로는 '걸치기'로 불린다. '무언가'를 '걸친다'는 말에서 붙은 이름이다. 이곳이 바로 가진 이와 없는 이 모두가 더불어 함께 잘사는 공유의 세상을 이루려던 그의 따뜻한 혼이 지금도 느껴지는 곳이다.

그는 당시 군의 중심지였던 이곳에 막(幕)을 치고 언제나 누구든지 입고 신을 수 있도록 옷과 신발을 걸어 두었다. 그러자 가난한 사람들이 먼 곳에서까지 찾아 와 옷을 갈아 입고 신발을 걸어 두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이곳을 '걸치기'라 불렀다. 지금도 이곳은 '걸치기'로 불리고 있다. 그는 칠보와 산내의 교류를 위해 지금 구절초 축재가 열리는 곳인 구절재에 길을 닦았고 전주감영과 남도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였던 태인의 남천(현재의 태인천)의 다리가 해마다 여름이면 홍수로 떠내려가 지역민들의 불편이 따르자 돌기둥을 바친 대각교를 놓았다고 한다. 지금은 현대식 다리가 놓였지만 이름은 여전히 대각교이다.

〈태인현〉편에 중국의 어느 황태자가 태어난지 반년이 되도록 왼손 손바닥을 펴지 않아 강제로 펴보니 손바닥에 '조선 박잉걸 환생'이라고 쓰여져 있었다고 한다. 죽은 후 이생에서 쌓은 덕으로 중국의 황태자로 환생했다는 이야기이다.

이경우 회장은 “우리 청년들은 몇 년 전부터 어른들의 지도를 받아 가면서 해마다 시행하는 당산제를 모시는데 정성을 다하고 이를 바로잡고자 활동하고 있다”면서 “원백암 마을지(誌)를 수록하는데 서투른 점이 많지만 미비점이 있거든 지도해 주고 양혜해 주기 바란다”고 했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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