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사랑의 향기

김상천 시인 / 기사승인 : 2020-05-07 10: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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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향만리

계절이 바뀔 때 마다 분주하고 요란스런 일상을 뒤로 하고 찾아가는 산골 마을이 있다. 고도 경주를 벗어나 한 시간정도 산길을 따라 가면 ‘산내’라는 동네가 한 폭의 수묵화처럼 눈앞에 펼쳐지는데 내 문학의 지평 속에서만 가끔 그려내는 산골이다. 타국 북방에서 지난 수년간 따뜻한 남쪽 나라가 그리워질 때마다 안개처럼 한자락 마음속에 떠오르는 곳이었다. 지난 날 추억의 사람들을 그리워하며 저무는 봄 바쁜 일정 가운데서도 접어뒀던 하루를 펴내 들고 ‘산내’로 달려갔다. 차창가로 흘러내리는 초록비 속에 지난 가을 홀연히 낙엽처럼 하늘로 떠나가신 목사님의 소탈한 모습이 아련히 떠오른다. ‘산내’마을 기슭에 통나무 집 하나 짓고 남편과 함께 동화처럼 살다 가신 여(女) 목사님이셨다.


십 수 년 전 한국을 떠날 때 곰취나물 장아찌를 들고 와서 안겨주면서 “선생님 고향 생각이 날 때마다 ‘산내’ 취나물 장아찌 드시고 힘내세요”라고 하면서 눈물 글썽이던 산골 마을 선머슴 같은 여성이었는데 그동안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님이 되셨고 지난해 가을 시골 교회 강단에서 설교를 하시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하늘로 돌아가셨다. 그런데 나는 이 봄 초록비를 맞으며 그 분이 정성껏 내어 놓던 차 한 잔이 그리워 달려가는 것이다.


‘산내’를 향해 가는 동안 내내 먼 산등성이로 피어오르는 송화 가루를 감상하다 그만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호수 길을 돌아 재를 넘고 마을을 지나 수도자의 은둔처 같은 산기슭에 들어서면 통나무 집 하나가 외롭게 서 있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사랑합니다. 어서 오세요”라고 인사하며 달려 나온 고인이 된 여 목사님의 남편이 반갑게 손을 잡아끌었다. 비록 큰 소리로 인사를 했지만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남자의 얼굴에는 절제된 슬픔이 외로움과 함께 산 그림자처럼 지나가고 있음을 본다. 나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저 두 손을 꼭 잡았다. 늦게 찾은 미안함과 외롭게 우뚝 서있는 한 사나이 앞에서 할 말을 잊어서다.


방으로 들어가 찻상을 마주 하고 앉았다. 그리고 지난날들을 회고해 보았다. 가끔씩 찾아오면 평소에 차를 좋아 하던 목사님께서는 아끼던 차를 꺼내 정성으로 달이고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앉아 찻잔마다 소박한 꿈들을 가득 담아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자리에는 남편만이 앉아 찻잔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무슨 차를 준비할까요?”라고 묻는다. 나는 지난날 목사님께서 녹차를 좋아하셨고 함께 나누던 녹차를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녹차를 준비하면서 눈시울을 붉히며 지난날을 추억하는 것이었다. “선생님. 사랑하는 아내를 먼저 보내고 홀로 산골에 살면서도 행복한 것은 이 녹차 향 때문입니다”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그는 평소에 아내가 녹차를 따르면서 늘 “이 향기는 깊은 상처 속에서 피어나는 향기입니다”라고 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녹차의 향기는 자신을 깨트리는 아픔 속에서 피어나는 향기다. 녹차는 제다(製茶)과정에서 380도의 고열로 살청(殺靑)하고 여러 번 비비고 누르는 유념(揉捻)을 통해서 잎사귀에 상처를 내고 세포벽을 파괴해야 차 성분이 잘 우러나오고 좋은 향이 베어 나오는 것이다. 고통의 유념을 통해서 비로소 향(香)과 기(氣)와 맛과 색(色)을 온전히 내어 놓는 것이다. 그는 아내가 남긴 그 말을 화두처럼 붙들고 고난의 세월을 맑고 향기롭게 살고 있었다. 나는 차를 담아내던 집주인과 에둘러 찻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호숫가 좋은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대접하겠다는 것이었다. 


목사님의 훈김이 아직도 배어 있는 방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왔다. 잠시 지난날 이들 부부가 함께 가꿔온 뜰을 거닐지만 왠지 떠나간 사람의 빈공간이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함께 차를 타고 가까이에 있는 ‘운문’(雲門) 호숫가로 갔다. ‘운문’호수는 크기도 하지만 주변의 봄 정취는 그 이름이 그러하듯 선경(仙景)을 보는 듯 했다. 아! 구름문을 열고 선경을 보지만 호수에 아른 거리는 목사님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그리움이 더 해 지는데 어쩌나. “얼굴 하나야 / 손바닥 둘로 / 폭 가리지만 / 보고 싶은 마음 / 호수만 하니 / 눈을 감을 수밖에” 시인 정지용의 시 한 수를 고인에게 보낸다. 


김상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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