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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고운의 부귀영화] 분노의 절주

전고운의 부귀영화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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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밤 기로에 선다. 늘 12시가 지나면 서게 되는 그 기로에서 한 시간 째 큰 주전자에 나무와 열매를 넣고 끓이며 또 생각한다. (2020. 04.23)

분노의 절주.jpg

일러스트_ 이홍민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다짐한다. ‘오늘은 술 마시지 말자.’
하지만 밤이 되면 늘 계획은 정정된다. ‘술 마셔야지.’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밤이 되면 내장 기관 중 하나가 사라지는 것 같다. 수많은 장기 중 뭐가 사라지는지는 모르겠지만, 뭐 하나가 사라지지 않고서야 이렇게 허전할 수가 있을까. 분명히 이름도 모르는 어떤 장기가 사라지는 게 확실하고, 그래서 매일 밤 잃어버린 나의 장기를 그리워하며 술을 마시게 되는 것이다. 홀짝홀짝 마시다 보면 그래 뭐 장기 하나쯤은 없어도 살 수 있을 것 같아진다. 그게 무슨 장기였던 간에.

 

나의 술 역사는 짧다. 서른이 되기 전까지는 술을 싫어해서 온갖 술자리에서 술을 안 마시고 사이다와 콜라를 마시던 사람이었다. 술이 들어가야만 속내를 털어놓는 사람들을 보며 속으로는 한심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나약한 인간들, 가짜 삶에 얼마나 찌들었으면 술에 기대야만 진심을 이야기할 수 있지?’

 

당연히 <취중진담> 이라는 노래도 미워했다. 술 마시고 <취중진담>으로 고백하는 것은 최악이었다. 노래방 마이크를 뺏어서 ‘차렷, 열중 쉬어. 맨 정신에 사랑 좀 하자.’고 외치고 싶을 정도였다. 그랬던 내가 이제는 술 없이는 못 살게 되다니. 남을 비난하면 반드시 그 비난은 나에게 돌아온다. 그게 몇 십 년 후라도 반드시 찾아온다. 비난은 부메랑. 비난은 메아리. 작작 좀 비난할 걸.

 

입에도 안 대던 술을 마시게 된 것은 <소공녀>라는 첫 영화를 쓸 때였다. 혼자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차갑고 어두운 글 속에 들어가려니 춥고 무서웠다. 흰 화면은 공포 그 자체였고, 무슨 글자를 채우든 망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생각과 다르게 채워지는 글들에 숨이 막힐 때마다(거의 매일) 남편이나 친한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몇 시간씩 그들에게 지분덕거렸다. 그 짓도 계속하다 보니 그들이 나를 피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들은 또 무슨 죄인가 싶어 그만뒀다. 영화를 쓰고, 준비하고, 찍고, 후반 작업을 하는 긴 과정의 시간 동안 나의 능력 부족이나 인성 문제로 작품을 망쳐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이 만든 긴장감에 좀처럼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자야 했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잠에 드는 유일한 방법을 찾게 됐다. 그것이 바로 혼술이었던 것이다. 소주는 비렸고, 맥주는 배불렀다. 도수 높고 향이 좋은 위스키를 한 모금 삼키면 가슴이 뜨끈해졌다. 그 뜨거움이 시커멓게 타고 있는 내 속을 대변해주는 것 같아 좋았다. 어쩌면 내 장기 중 하나는 이때 사라져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한 작품에 장기 하나. 단편은 작은 장기, 장편은 큰 장기. 술을 마시는 다른 사람들도 결혼, 출산, 이사, 이혼 등 다양한 사연에 장기를 하나씩 잃어버리며 사느라 슬퍼서 술을 푸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나친 사랑은 사람을 망치듯, 지나친 술은 뇌와 체력을 망쳤다.

 

그리하여 2020년에 결심한 것 중 하나가 절주다. 얼마 전 다시 본 영화 <바람난 가족>에서 윤여정 배우의 대사가 가슴 깊이 박혔다. 해외로 떠나기 전 매일 술에 취해 사는 아들(황정민 배우 역)을 안아주며 이런 말을 하셨다.

 

“술 마시지 마. 인생 맨 정신으로 살아야지.”
 
그래. 30년을 너무 맨 정신으로만 사느라 힘들어서 그동안 좀 마셨다고 치고, 다시 맨 정신으로 돌아가자. 절주를 결심하고 다이어리에 술을 마신 날과 마시지 않는 날을 표시하는데, 이게 꽤 도움이 된다. 이 달의 결과는 15일은 마시고, 16일은 마시지 않았다. 선방했다. 절제가 무절제를 이겼다. 절제를 왜 하는지 모르는 나란 인간에게서 1점의 희망을 발견한 아주 유의미한 결과다. 그런데 오늘 경동시장에서 헛개나무 열매와 벌나무를 사왔다. 약방 선생님께서 이게 숙취 해소와 간에 그렇게 좋다고 하는 말에 바로 질렀다. 양손 가득 헛개나무 열매와 벌나무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며 착잡해졌다. 이게 절주를 하겠다는 태도를 가진 인간이 하는 짓인가. 발렌타인 30년산은 비싸고, 맛도 기품이 넘치는데, 36년 산 나는 왜 이렇게 낮과 밤으로 두 동강이 난 사람처럼 오락가락 하며 돈을 이쪽저쪽에서 써대는 것인가. 차라리 멋이라도 나게 옷이나 지를 것이지 약재용 나무와 열매에 돈을 써 재껴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술과 헛개나무 열매 차를 동시에 마시면 간은 또 얼마나 헷갈릴까. 취하라는 건가 말라는 건가.

 

매일 밤 기로에 선다. 늘 12시가 지나면 서게 되는 그 기로에서 한 시간 째 큰 주전자에 나무와 열매를 넣고 끓이며 또 생각한다. 술을 마실 것인가, 약을 먹을 것인가, 아니면 둘 다 참아볼 것인가. 왼쪽으로 갈 것인가, 오른쪽으로 갈 것인가, 안 갈 것인가. 하필 왼쪽 운율에 술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 하필 내가 왼손잡이인 것에 너무 의미를 부여하지는 말자. 지나친 의미 부여는 위험에 빠트리니까. 사실 나는 후천적 양손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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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전고운(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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