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거리 두기와
오늘의 교회

세계보건기구(WHO)가 3월 11일 코로나19 사태와 관련해 팬데믹(pandemic, 전염병 등의 세계적 대유행 상태)을 선언하면서 사실상 전 세계가 감염 비상 체제로 접어들었다. 2009년 신종플루와 다르게 명확한 치료제나 백신이 개발되지 않은 상황에서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휩쓸고 갈 경우, 상흔과 공포는 가히 치명적일 것으로 전망된다. 대한민국은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신천지)이라는 코어 클러스터의 집단감염이 주원인이었지만, 일찌감치 위기 관리 상태를 '심각'으로 격상하고 대응했는데도 3월 12일 현재 확진자 수가 8000명에 육박하는 초유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와 관련해 가장 시급한 사회 덕목으로 떠오른 게 바로 '사회적 거리 두기'(social distancing)다. 사회적 거리 두기란 호흡기 감염 위험이 있을 때 대인 감염을 최소화하기 위해 사회 전체가 자발적으로 접촉을 최소화하는 방법론이다.

뚜렷한 치료제와 백신이 개발되지 않은 호흡기 감염병은 선제적 예방만이 거의 유일한 해결 방법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는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캠페인으로 자리 잡았다. 더욱이 대한민국 같은 민주 사회는, 사회적 거리 두기의 효능 여부가 자발적 캠페인과 능동적 강제력의 조화에 달려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을 '민주적 통제'라고 표현할 수 있다면, 통제를 실현하도록 선도하는 기관은 미디어, 정부, 시민·사회단체 정도로 압축된다. 물론 여기에는 빠진 게 있다. 무엇보다 생명 존중을 기반으로 하는 종교 단체가 이 캠페인의 가장 전위적인 자리에 있어야 할 것이다.

일찍이 한국 개신교회는 근현대사의 길목마다 정치·사회·문화에서 주목할 만한 여론 주도자 임무를 수행해 왔다. 3·1 만세 운동부터 8·15 독립, 6·25 극복, 민주화 정부 수립까지. 개신교회는 가톨릭이나 불교처럼 커다란 컨트롤타워가 따로 없이 여러 교단이 자생해 온 부분을 약점이 아닌 연대의 자율성으로 선용해 사회 각 분야를 선도하는 역할을 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맞이해 개신교회가 보여 준 모습은 선도적 역할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정부와 지자체는 계속해서 교회의 주일예배 모임 자제나 철저한 방역 대책 수립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일부 교회는 주일예배를 강행하고 있으며, 온라인 예배나 기타 방법으로 주일예배를 진행하는 교회도 그런 식의 예배 진행을 임시적이며 불가피한 조처라는 인식을 강화하는 데 몰두하는 모습을 보인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개신교회가 사회적 거리 두기에 미온적 반응을 보였던 데는 예배에 대해 일종의 신념이 자리 잡은 탓으로 보인다. 그 신념의 대표 덕목으로 "모이기를 힘쓰라"(히 10:25)는 구절과 "신령과 진정"(요 4:24)으로 예배해야 한다는 구절을 꼽을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생각할 부분이 있다. 예배 행위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과 교류'라는 신적 기원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사람과 사람의 만남과 교감' 행태를 띄고 있다는 점에서 사회적 기원 또한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게 엄연한 사실이다. 이 두 축, 신적 기원과 사회적 기원 역시 별도의 독립적 영역을 확보했다기보다는 상보적 역할을 주고받으며 오늘날 예배를 지지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작금의 코로나19 사태로 맞이하게 된 개신교회는 예배 형식 변화를 재고해야만 한다.

예배의 사회적 기원

예배의 사회적 기원을 말하기 전에, 신적 기원의 태동이 사회적 기원에 뿌리박고 있다는 순환 원리에 주목해야 한다. 성서적 맥락을 살펴봐도 신의 임재와 인간의 반응에 있어서 신비적 기원의 입증과 교감은 인간과 인간의 사회, 공동체로부터 전개되고 있다. 아울러 예배의 신적 기원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만의 교감에 머무르지 않는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세속 세계라 할 수 있는 사회 전체로 스며들기 마련이다. 특별히 예배를 통해 신의 말씀을 갈구하는 개신교회가 추구하는 신성의 기원은 말씀 선포라는 케리그마를 중심 원천으로 삼고 있다. 그렇기에 이성적 공감과 대사회적 실천 양태가 진보든 보수든 상관없이 막대한 영향력으로 확산되는 것이다.

이렇듯 예배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신적 기원에서 시작하지만 결국 예배자, 예배 공동체가 뿌리박고 서 있는 사회, 공동체와 밀접한 연관 관계를 맺는다. 이 관계성은 현대사회라 해서 예외가 아니다. 때로는 긍정적으로 때로는 적대적으로 예배의 종교 감흥에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사회 속에서의 종교 반응은 선순환의 관계로 발전하거나, 아니면 퇴화해 종교 집단이 스스로 자신의 집단을 게토화하는 양상으로 나타나고는 했다.

최근 문제가 된 신천지의 양태를 한국 사회와의 연관 관계로 살펴보면 어떨까. 당연히 정교분리를 일종의 원리로 삼은 한국 사회에서 신천지가 보여 준 이념·정치·문화·당파를 뛰어넘은 배타적·비협조적 태도는 예배의 게토화라는 극단적 사례를 보여 준 비극으로 평가받기에 충분하다. 신천지의 사이비성은 차치하고서라도, 그들이 교리적으로 사회성을 철저히 배제하고 신적 감흥에만 매달려 온 결과가 가져온 불균형은 명백한 사회문제다. 민주국가의 혜택과 효능에 물들어 있으면서도 애써 사회적 순응은 거부하고 천국 시민, 염세적 구원론으로 대표되는 신비 교류에만 매달려 있는 결과가 반사회적 문제의 극단적 표출로 나타나고 만 것이다. 이는 양태는 다르지만 종교 혹은 교회가 예배 행위에서 사회적 기원에 뿌리내리지 않고 신적 기원에만 연원을 두고 있다는 식의 반쪽 인식을 철저화할 때 나타나는 결과에도 영향을 미치게 될 거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그 반대의 결과를 우리는 어떻게 예측할 수 있을까. 사회적 기원과 신적 기원을 상호 융합적 관계로 이해하는 편에서 본 예배에 대한 예측 말이다.

신적 기원,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예배자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곧 사회다. 동시에 그 사회는 신적 기원을 체험하는 내밀한 임재 현장에도 여일하고 변함없이 영향을 미친다. 굳이 사회적 영성, 개인 영성을 분류하지 않더라도 신적 기원의 스타일이라 할 수 있는 성과 속이 구분되는 지점인 성스러움의 코어에서 발현되는 영적 감흥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이 어울려 살아가는 사회 단위의 기저가 변화하도록 촉진하는 촉매제로 역동하기 마련이다.

여기에 개신교회는 종교개혁 시대부터, 예배 형식의 개혁적 원류로 형식뿐인 예전이 아닌 말씀 선포를 지원하기 위한 예전을 추구해 왔다. 그 예전의 신비를 에워싸는 것은 말씀, 곧 로고스 활동인데, 로고스 활동 역시 앎·발견·체감·공감이라는 사회적 키워드와 분리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성속 이원론이 아닌 속의 바탕에서 성을 발견하는 체현의 영성을 지원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 하나. 예배는 시대 상황과 정신에 따라 놀라울 정도로 변이와 순응 과정을 감당하는 데 탁월한 모습을 보여 왔다. 코로나19 사태로 나타난 사회적 거리 두기 방법론으로 대두된 온라인 예배, 가정 예배 등 각종 비대면 예배는 엄밀히 말해 코로나19 사태가 아니더라도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변화된 플랫폼 사회에서 고려해야 할 필연적 예배 방법론이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OTT(Over The Top)의 범람이 기존 대중매체에까지 영향을 주면서, 매체 소비가 공급자 중심에서 수요자 중심으로 변했다는 사실이 입증됐다. 이런 현상을 종교사회와 무관하다고 보는 건 모순이다.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여러 방법론이 대두되거나 표현되는 양태의 다원성을 적어도 케리그마를 중심으로 삼는 개신교회의 정체성, 혹은 전통을 흔드는 위험성으로 받아들이는 경향 역시 예배의 성스러움을 반쪽만 이해하는 오류로 보기에 충분하다. 개신교회 예배는 사회 흐름과 변화에 따라, 변화의 숨길 곳곳에서 어떻게 해서든 성스러운 원형을 발췌해 내고 본질의 체모를 갖춰 나가는 데 눈을 뜰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코로나19 사태로 예배가 중단되었다고 말하는 어법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예배는 멈춘 게 아니다. 예배가 당면한 사회 위기를 다양하고 적극적으로 위무하는 방법에 손을 내미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오프라인 예배 중단을
우려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대목에서 정말 묻고 싶지 않았던, 하지만 묻지 않을 수 없는 예민한 질문을 꺼내고자 한다. 정말 교회가 오프라인 예배를 중단하고 싶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다.

오늘날 교회가 예배 중단을 비판하는 지점에서 한 가지 의미심장하게 들여다볼 부분이 있다. 신종 바이러스 창궐로 입을 경제적 피해에 대한 우려가 공간으로서의 교회 맥락까지 침투되어 고려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배 자체의 맥락보다는 활동성 위축으로 얻게 될 제도·조직 교회의 역동성 위축이 장기적으로는 교회 유지에 대한 우려로 연결된다는 두려움이 문제의 핵심 아닌가. 그 두려움의 측면에서 부정할 수 없는 심대성을 잠식한 부분은 공간 유지, 운영, 조직 관리의 위축에 대한 경제적 상관관계에 대한 고려다. 분명한 점은 그러한 고려가 직간접적으로 스며든 교회 조직에서 예배의 본령을 가리키는 본질로의 집중과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재난 상황에 대한 고려 사이의 숙의적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지하거나 무관심하다는 사실이다.

교회가 예배 본질과 사회적 거리 두기의 상관관계에 조금이라도 눈을 뜨고 있다면, 가톨릭이나 불교 같은 중앙 집권적 행태로 고착화한 종교 조직의 일사불란함이 아니라, 다양성을 확보하면서도 공통된 사회적 배려로 캠페인 전위에 서서 코로나19 사태의 정서적 불안을 잠재우는 영적·사회적 치유 기관의 역할을 톡톡히 해낼 것이라고 확신해 마지않는다. 지금까지 한국 개신교회가 보여 준 작태는 이 기대와 거리가 멀어 보인다. 사회적 거리 두기의 기본 원칙을 견지하면서, 동시에 마스크 공급, 의료 자원봉사 지원 등 사회적 콘텍스트에서 해낼 수 있는 수많은 정서적·직접적 실천 메시지의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러한 사회적 콘텍스트와 맥이 닿아 있는 활동이 곧 예배라고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예배가 이뤄지는 공감각적 특성을 고려해 볼 때, 오늘날 개신교회를 한국 언론이 우려의 시선으로 보는 이 현실은, 교회가 사회적 콘텍스트의 고려로부터 형편없이 고립·도태 및 소외 집단화되고 있다는 우려를 지울 길이 없게 만든다.

필자는 교회가 조직 결속을 다단계 회사처럼 강조하기 위해, 한 주마다 거둬들이는 한 푼의 헌금이 아쉬워서, 기왕 커다랗게 지어 놓은 빚더미에 앉은 교회를 어떻게든 유지하기 위해 예배를 중단하지 않는다고 손가락질하는 일각의 비판 분위기에 현재까지는 동의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팬데믹이 선포된 세계적 감염 유행의 참담한 현실에서 교회가 한발 앞서는 것은 고사하고, 사회 상식에 반하는 행태의 강행을 계속하면서 세속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믿는 자들만의 신념이라고 주장한다면, 정말이지 마음이 흔들릴 것만 같아 서글프다.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니라고 말해 줄 수 있는 교계의 지성과 양심이 간절해지는 요즘이다.

주원규 / 성공회대학교에서 구약신학(Th.D)을 전공하고, 현재는 동서말씀교회를 섬기고 있다. 소설가·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JTBC·MBN·<연합뉴스> 등 여러 매체 출연해 세상과 기독교인의 합리적 교감을 시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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