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혜의 조명 이야기] 문화비축기지를 미디어비축기지로
[백지혜의 조명 이야기] 문화비축기지를 미디어비축기지로
  • 백지혜 건축조명디자이너/디자인스튜디오라인 대표
  • 승인 2019.06.21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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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지혜 건축조명디자이너/디자인스튜디오라인 대표

요즘 제주도에 가면  ‘빛의 벙커“는 해저 광케이블 관리를 위해 만들어진 국가 시설로 오랜 시간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비밀 벙커를 미디어아트 전시관으로 재탄생시킨 곳으로 수십대의 빔프로젝터가 외부의 빛이 완전 차단된 900평 단층 공간의 실내를 가득 채우고 있다.

'빛의 벙커’는 1990년 프랑스에서 브루노 모니에(Bruno Monnier)가 설립한 컬쳐스페이스(Culturespaces)사가 개발한 아미엑스(Amiex, Art & Music Immersive Experience)가 그 시작이라고 한다. 컬쳐스페이스사는 2012년 프랑스 남부 레보드프로방스 지역에 있는 폐쇄된 채석장에 고갱, 고흐 등의 예술을 아미엑스 기술로 선보인 “빛의 채석장 (Carrieres de Lumieres) " 으로 큰 인기를 끌었고 2018년 4월에는 파리 11구의 오래된 철제 주조공장에 빛의 아틀리에 (Atelier des Lumiere)를 오픈했다. 지금 제주에서 하고 있는 빛의 벙커는 여기에서 선보였던 컨텐츠를 가져온 것이다. 이 전시를 설명할 때 ‘몰입형’이라는 단어가 붙는데실제 그 공간에 들어가 보면 모든 자극이 차단된 공간에서 시각, 청각은 물론 ‘작품을 관람하는 내’가 작품의 일부가 되는 경험을 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강렬하다.

헬싱키의 Silo 468은 버려진 오일저장고를 개조하여 빛의 파빌리온으로 재탄생시키고 내부는 문화공간으로 재생시킨 사례이다.표면에 설치된 2012개의 구멍과 - 헬싱키가 세계 디자인 수도였던 2012년을 기념하는 의미라고 한다 - 1280개의 인공조명이 바람의 속도와 방향, 자연광의 변화를 패턴으로 표현해 내며 북측 구멍에 설치된 거울은 주광을 반사함으로써 수면의 반짝임을 표현해낸다. 2012의 구멍이 주간에 내부로 자연광을 끌어들이기 위한 장치라면 1280개의 조명은 야간 빛의 패턴을 만들어 내는데 자연현상이 그렇듯이 어느 시점에도 반복되는 적이 없다고 한다. 헬싱키 연안의 바다에서 등대의 역할을 하는 Silo는 어둠이 짙어지면서 1시간동안 백색광에서 붉은 색의 조명으로 바뀌어 에너지의 용기였던 본래의 기능을 의미하기도 한다.

2015년 헬싱키에서 열렸던 국제도시조명연맹 회의에 참석했을 때 SILO468에서 공연과 칵테일 파티가 열려 실제로 공간을 경험할 기회가 있었다. 2km정도 헬싱키 본토에서 떨어져 있어 배로 들어가야 했는데 해질 무렵 바다에서 처음 만난 Silo는 흰색 표면이 온통 노을에 물들어 붉게 보였고 금새 해가 지면서 LED 조명이 바람에 맞추어 켜고 꺼지기를 반복하며 부드러운 패턴을 만들고 있었다. 실내에 들어서면서 지는 해의 긴 빛이 구멍을 통해 패턴을 만들고 다시 인공조명으로 채워지고 난 다음 공연이 시작되었다. 

문화비축기지는 석유비축기지가 문화공간으로 재생된 사례이다.
헬싱키의 SILO468이 바다에 둘러쌓여 있다면 서울의 문화비축기지는 산속에 파묻힌 형상이다. 그 규모 또한 비할 바가 못 된다. 그 주변 부지는 축구장 22개 크기이며 높이 15M, 지름 15~38M의 5개 탱크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공연장, 강의실, 홍보관 그리고 식음시설 등을 포함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시용되고 있다고 한다. 2017년 말에 개장하였지만 그 쓰임새가 활발한 것은 아닌듯하다.

지난 4월 문화비축기지 지구협력 네트워크- ‘해외기획자 및 예술가와 함께하는 다양한 실험정신과 도전’ 이라는 주제로 모집공고가 났고 얼마 전에는 문화비축기지의 운영방향과 추구방향을 함께 논의하는 자리를 마련한다는 뉴스를 접했다. 

행사명은 '문화비축기지 X 빅미디움'. 미국 텍사스 오스틴의 비영리단체 빅미디움의 관계자를 초청하여 예술가와 시민이 함께 상생하는 빅미디움의 사례를 국내에 소개한단다. 무슨 이유로 해외기획자를 포함하게 되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빅미디움이 어떤 해법을 제시할지 매우 기대가 되기도 한다.

날로 발전해가는 조명 영상기술과 국내의 수많은 미디어 아티스트들의 컨텐츠를 접하며 야간에만 즐길 수 있는 빛의 예술들을 주간에도 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이것을 위한 공간으로 거듭나는 것은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위의 두 사례를 바탕으로 문화비축기지를 빛비축기지로 브랜딩하여 외부의 빛이나 소리의 조건에 관계없이 주,야간 미디어 아트를 즐길 수 있는 전문적인 전시공간으로 기획해 보는 것은 어떨까.. 주변 공원에 앉아 탱크 겉면에 영화 혹은 쇼, 연주회 영상을 프로젝션하여 감상하도록 하는 것도 특별한 경험이 될 것이다.

해외의 우수 사례 뿐 아니라 가까운 곳의 사례에도 눈을 돌려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