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민애 변호사(법무법인 향법)

“그건 한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라 세상을 죽이는 거야.”

장안의 화제라는 드라마의 주인공 신부가, 끝없는 부정의 앞에 ‘흑화’하면서 읊조린 한마디다. 듣는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스스로 무뎌진 것도 모른 채 지나간 많은 감정이 순식간에 밀려왔다.

어느 두 사람, 혹은 여러 사람이 함께 만든 세계는, 가족·친구·연인이라는 일반적인 단어로는 정의할 수 없는, 그 제각각이 고유의 세계일 테다. 그 누군가를 잃었을 때 얼마나 힘들지 가늠하는 것조차 죄스럽기도 하다.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가 백혈병에 걸려 세상을 떠난 황유미씨의 죽음 앞에 돈으로 무마하려고 했던 삼성의 만행이 분노스러웠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건강하던 젊은 노동자들이, 단지 반도체 공장에서 일했다는 이유로 희귀병에 걸리고, 청춘을 꽃피우지도 못한 채 사랑하는 이들과 이별하게 돼도 10년간 모르쇠로 일관했던 삼성이 미운 이유도 그랬다. 지난해 삼성의 노조 와해 관련 문건이 드러나고, 고용노동부와 경찰이 어떻게 삼성의 살인적인 노조파괴에 동조했는지, 염호석 열사의 죽음을 삼성이 어떻게 이용했는지 조금씩 드러날 때, 머릿속이 하얘질 만큼 분노스러웠던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무엇을 상상해도 그 이상의 잔인함을 확인하게 되면서 어느 순간 분노도, 죄스러움도, 익숙한 감정이 돼 버렸다. 아니, 더 이상 잔인한 진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외면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난 16일 이상훈 삼성전자 이사회 의장 등에 대한 형사재판에서 삼성 미래전략실 인사지원팀이 고 황유미씨의 부친 황상기씨와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활동가들의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관리한 사실이 드러났다. 관리문건이 작성된 2012년 당시 직업병 피해자들이 산업재해로 승인해 달라는 소송 1심에서 승소한 후 삼성이 조정을 제안한 시기였다. 노동자의 죽음에, 그 가족들의 고통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도 있었다면, 합의를 이야기하면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만행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같은 재판에서, 염호석 열사의 사망 당일 박상범 전 삼성전자서비스 대표와 목장균 전 삼성전자 전무가 시신의 이동 경로를 파악하고 유가족을 어떻게 매수할지, 유서를 인멸하고 노조에 대한 거짓 선전을 할 방법에 대해 논의한 문자메시지도 공개됐다. "노조가 승리하는 날 화장해 달라"던 노동자의 절규가 이들에게는 노조파괴의 절호의 기회였을까. 설마 그렇게까지 했을까, 일말의 기대 아닌 기대를 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언론보도로, 재판으로, 끝을 모르는 잔인한 행각을 조금씩 더 알게 되면서도, 그다지 놀라지도 분노를 느끼지도 않은 채 지나간 시간이 문득 무겁게 느껴졌다. 그럼 그렇지, 하며 수많은 이들이 무뎌지는 가운데 삼성은 무노조경영 신화를 만들었고, 엄청난 정보력과 권력과의 유착이 아무런 통제도 받지 않은 채 유지됐던 것은 아닐까.

노조를 와해하기 위해 삼성은 수많은 세계를 파괴했고, 수익 창출이라는 미명 아래 병들고 죽어 가는 노동자들을 외면했다. 그 진실이 완전히 드러나는 데에는 시간이 조금 더 걸릴 수밖에 없고 ‘익숙함’이라는 유혹은 계속되겠지만, 계속 분노하고 싸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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