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더뉴스 박경보 기자ㅣ 8년째 이어온 기아자동차의 통상임금 소송에서 법원이 1심에 이어 2심도 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이에 대해 재계는 “위기를 맞은 자동차산업의 상황을 간과한 채 현실과 동떨어진 형식적 법 해석에만 치중한 결과”라며 즉각 반발했다.
서울고등법원 민사1부(윤승은 부장판사)는 22일 기아차 노조원 가모씨 등 2만7000여명이 회사를 상대로 낸 통상임금 소송 항소심에서 1심과 같은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내렸다. 다만 중식대와 가족수당이 통상임금에서 빠져 1심보다 1억원 줄어든 3125억여원을 지급받는다.
기아차 노동자들은 회사를 상대로 지난 2011년 10월 통상임금 소송을 제기했다. 청구금액은 원금 6588억원, 이자 4338억원을 포함해 1조926억원이다. 2008년 8월부터 2011년 10월까지 지급된 상여금, 일비, 중식대, 가족수당을 통상임금에 포함하고 이를 바탕으로 재산정한 연장·야간·휴일근로수당 및 연차휴가수당 미지급분을 지급해달라는 요구다.
앞서 1심 재판부는 “피고 기아차는 원고 노동자들에게 원금 3126억원과 이자 1097억원 등 4223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1심은 정기성·일률성·고정성이 있는 상여금과 중식대를 통상임금으로 봤지만, 2심은 일률성이 없다는 이유로 중식대와 가족수당을 통상임금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특히 재판부는 2심에서도 이 사건의 핵심 쟁점인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을 인정하지 않았다. 신의칙은 권리 행사와 의무 이행은 신의에 따라 성실히 임해야 한다는 민법의 대원칙이다.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서 제외한 노사 합의를 깨는 것은 ‘신의칙’ 위반이라는 게 기아차의 입장이었다.
기아차는 “노조의 추가 수당 요구가 경영에 어려움을 초래하고 '신의칙'에 위반된다”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이 사건으로 기업의 존립이 위태로워진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기아차의 매출액과 당기순이익 등으로 미뤄 볼 때 지급액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재계는 이 같은 재판부에 판결에 즉각 반발하며 상급법원인 대법원의 합리적인 판단을 촉구했다. 근로자들의 수당을 추가로 올려주면 해당 기업뿐만 아니라 산업과 국가경쟁력 전반에 어려움과 위기를 가중시킨다는 주장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이날 오후 입장문을 내고 “이번 판결은 노사가 1980년대 정부의 통상임금 산정지침을 강제적인 법적 기준으로 인식해 임금협상 했던 것을 고려하지 않은 것”며 “약속을 깨는 한쪽 당사자의 주장만 받아들여 기업에 부담을 지우는 것을 승복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경총은 이어 “R&D 투자, 마케팅, 협력업체와의 상생 등에 활용돼야 하는 영업이익을 임금 추가 지불능력으로 판단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며 “국내 자동차 회사들이 겪는 통상임금 부담으로 인한 어려움과 자동차 산업의 국가적인 위기를 간과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도 “신의칙 위반을 인정하지 않은 이번 판결이 기업경영의 불확실성 증가와 산업 경쟁력 약화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스럽다”며 “향후 재판에서는 임금협상 과정에서 형성된 노사 간 신뢰와 경영상의 어려움을 판단해 주길 바란다”고 요청했다.
한편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전국 100인 이상 사업장 1만여개 가운데 200여곳에 이르는 기업이 통상임금 소송을 진행 중이다. 노동자들의 승리로 끝난 기아차의 통상임금 판결은 자동차업계는 물론 국내 산업계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