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적 문화유산 전통무예 수박의 전승계보 및 주변이야기

[ 이 기사는 잊혀져가는 전통무예 수박에 대한 고찰이다] 글 = 사단법인 대한수박협회 송준호 회장

민간전승(民間傳承)되어 온 기예(技藝)들이 그러하듯 수박과 수박춤의 경우도 계보와 관련한 문헌적인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구한말 이후 실제 행위자로서 그 맥락을 들여다 볼 수는 있다.

수박계승자 고,송창렬옹(1932~2017)


송창열 선생은 청년기에 영화배우가 되고 싶어 했고, 신상옥 감독께서 하시던 ‘신-필림’이란 곳에 잠시 계셨다고 한다. “최불암도 내 후배야!”라고 하시는 등 어찌됐든, 유현목 감독의 ‘순교자’란 영화에 단역목사로 나오는 등 몇 편의 출연작이 있다하시니 전직 영화배우 출신은 맞는 것 같다. 이 분의 외삼촌은 1965년 한반도의 반쪽을 눈물바다로 만든 ‘저 하늘에도 슬픔이’란 영화를 기획했던 최현민 감독이시다.

송창렬 옹은 1932년 2월에 함경남도 북청군 이곡면 초리에서 태어났다. 1938년 일본국 대판(오사까)에서 부친이 ‘오하라 미싱 가이샤’를 경영했다. 1938년에서 40년까지 오사까에서 살았다. 이후 경기도 개성군 오정문에서 부친이 주물공장을 경영하여 일본국에서 조선 개성으로 이사를 했다.


아리랑국제방송 인터뷰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이 공장은 군수품 공장(포탄 껍데기 만드는)으로 징용되었다. 자택은 만월정에서 거주했다. 42년경에는 '가이조 고리쓰 고꾸민 각꼬ㅡ(일본인만 다닐 수 있는 학교였으나 부친이 경제적 능력이 있어 입학이 가능했던 것으로 기억된다)입학했다.  

그때부터 일본 아이들이 ‘조센진’하고 놀리고, 때리면 조퇴를 했다. 울면서 오정문 공장에 가면 아버지께서 “왜 울면서 오느냐?”고 묻기에 “일본인 아이들이 조센진하고 때린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개성 남문통과 만월대(주로 기무라산에서 수련을 하셨다고 했다. 사진 위 남문통, 우측 만월대)


그때 아버지께서는 “그래?”하면서 우리 공장 십장 천일룡이라는 사람에게 “우리 애가 일본 아이들한테 맞으니 운동 좀 가르쳐라!” 하여 수박(수박치기라고도 부름)을 처음 배웠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가라테와 검도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공장 사장실(다다미방 이었다)에 일본도를 걸어 두셨던 것도 기억난다. 나중에 씨름은 조금 해 봤다.

한 6개월 정도 배우니 일본 애들한테 맞지 않을 자신감이 생겼고 이후 일본 학교에서 사고뭉치가 됐다. 학교에서 만월정 집에 오면 일본 애들이 몰려와 다다미방에 '고다쓰'를 뒤엎고 다다미에다 오줌을 싸고 도망가기도 했다. 일본 아이들한테 맞을 때 한 동내 사는 미야꼬라는 여학생이 있었는데 내가 일본 애들한테 맞으면 대신 나서서 말리곤 했다.  


수련모습

중국 국가급문화재로 추진되던 수박을 무용화한 수박춤기능자 초청 학술회(이북오도청 함경도도민회 후원)

천일룡이가 오정문 공장에서 만월정 집에 도착하면, 주로 기무라 약수터 뒤쪽 여우골이라는 장소에서 연습도 하고 배우기도 했다. 그 당시는 대동아전쟁 말기라서 우리 것은 무엇이든 못하게 하던 시대였다. 이후 싸움도 좀 하게 됐고, 자신감도 생겼다.

1944년 일본 학교에서 하도 일본 애들과 싸우니 학교에서 퇴학을 시키려했다. 이때 아버지께서 일본학교 바로 밑에 있는 조선인학교인 만월초등학교로 전학을 시켰다. 3학년 이후로도 꾸준히 천일룡에게 여우골, 기무라 뒷산, 개성 홍삼정 뒤뜰에서 배우고 연습했다. 내가 공부에는 취미가 없고, 잡기에 소질이 있었다고 기억된다. 그 때는 특별히 할 만한 게 없던 시절이기도 했었다.  

 

1919년생으로 개성에서 반공투사 민완식으로부터 사사한 오진환할아버지는 개성철도역 뒤에 위치한 공원에서 수박을 배우셨다고 한다.

서울에 사시던 故 오진환 옹(1919년생)은 2002년 돌아가셨다. 6·25전쟁 이전 개성역에 근무하셨는데, 역사(驛舍) 뒤에 위치한 ‘개성철도공원’이란 곳에서 대한체육회장을 지낸 바 있는 민관식 선생의 형(兄), 중산 민완식 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2002년 12월 8일 서울 금천구에서 열린 제1회 국민생활체육 서울시전통무예대회에서 마지막으로 이런 말씀을 남기셨다. “송창렬씨가 하는것은 예전에 내가 민완식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것과 동일한 것이다.”

전,대한체육회장 민관식총재의 형, 반공투사로 요절을 했다(해방전 일본 강도관 유도 7단의 고단자였으며 전국 씨름대회 출전, 민간체기 수련 등)

1939, 전조선씨름대회 민완식선생

백범 김구선생과 함께한 민완식 선생(사진 왼쪽)


김룡칠 선생(중국연변작가협회, 시인)의 경우 선대(先代)에 함경도에서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이주하셨다. 김만석 선생의 고향도 함경도라고 했으나 정확한 연세를 알지는 못하신다.

평안도(자강도)지역의 수박무(手拍舞), 전남 필봉굿(중요문화재), 경북 빛내농악(도지정문화재) 등, 이 외에 전라도 광주에도 기능자가 생존했다. 대외적으로는 송창렬옹(2007년 문화재청에 수박(무예부문) 지정신청)과 중국 거주 김학현 선생(사단법인 대한수박협회 고문) 두 분이 알려 져 있다.


 
 
 
 
 
 
 


북한의 경우는 수박의 여러 갈래 중 수박춤과 수박놀이만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평안도가 전승지역인 수박춤은 북한의 공훈예술가인 전한률 선생(1931~)께서 발굴하셨다고 한다. 1955~6년 사이에 서북부지방의 민속무용인 손벽춤(수박춤)을 발굴했다.

WIKITREE | 태권도의 뿌리, 전통무예 수박 북한에 남아 있었다!

북한 나진태권도성지 설립, 남종선씨 중국 길림성 룡정 직업대학 총장실에서 북한에서 전래되던 수박을 증언하고 있다

북한의 3대 무용인 수박춤(북한에서는 수박을 무용화한 수박춤과 돈돌랄이, 물동이춤 등이 유명하다)


1956년 8월 전국전문예술단체 축전에서 특등상을 받고 모스크바에서는 제6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서 은메달을 받기도 했다. 조선향토대백과를 살펴보면 “수박춤은 서북부지방 사람들의 락천(낙천)적인 민속전통을 훌륭히 구현하고 작품구성이 원만한 것으로 높이 평가되었다.

특히, 절주 있게 치는 손벽 소리는 흥을 더욱 돋우어 준다”고 적혀있다. 수박과 유사했던 체술인 평안도의 날파람은 맥이 끊긴 듯 보이나 1960년대 초 개성에서 계정희라는 민속학자가 찾아 낸 ‘택견’이라는 것이 혹, 그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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