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삶… 마리오네티스트, 김종구

김수정 기자 / 기사승인 : 2018-09-18 12:5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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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머리 위에 어떤 게 있어서 나를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게 사람들이 말하는 신인지 운명인지 잘 모른다. 줄을 따라 춤을 추는 마리오네트처럼, 반짝이는 어떤 줄을 따라 도착한 곳은 작은 무대였다.

 

소극장 무대 위에서 나무로 만든 발레리나가 춤을 춘다. 순백의 튀튀를 입고 흐르는 음악을 따라 가는 다리를 한껏 들어올린다. 큰 눈이 살포시 감았다 떠진다. 뒤이어 나온 변검술사는 영화 <패왕별희>의 변검술사들처럼 순식간에 얼굴색을 바꾼다. 객석에서 환호성이 터진다. 

 

인형을 조종하는 사람은 마리오네티스트 김종구(57) 씨다. 그는 줄인형 마리오네트를 만들고 연기하는 몇 안 되는 마리오네티스트다. 지난 날을 돌이켜 보면 신기하기만 하다. 30여 년 전만 해도 이렇게 살고 있을 줄은 정말 알지 못했다. 

‘신’이라는 줄 하나


그는 남포동에 잘나가는 인테리어 디자이너였다. 주고객은 룸살롱과 노래방 점주들이었다. 실력보다 접대가 중요한 게 그 바닥의 생리였다. 매일 걸진 술판에 여자들을 불러 마시고 즐겼다. 그는 그런 생활이 싫지 않았다. 살다 보면 언젠가 마당 딸린 넓은 집에 지프차도 굴려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호시절은 오래 가지 않았다. 거짓말처럼 일거리가 줄어가다 마침내 쌀이 떨어질 정도로 사업이 기울었다.

“제가 힘들어하는 게 안타까워 보였나 봐요. 대학 동창 소개로 교회를 가게 됐는데, 거기서 모든 게 달라졌어요. 어느 날은 룸살롱에 앉아 있는데 역겨워서 참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날 술자리를 빠져나와서 신 앞에 약속했어요. 모든 걸 정리하겠다고. 정직하게 땀 흘리는 일을 하겠다고.”

 

 

정말로 그는 깨끗하게 사업을 정리했다. 이후의 삶은 신산하기만 했다. 대학교 앞에서 호떡 장사도 하고 택시 운전도 하고 막일도 했다. 어느 겨울에는 군고구마 장사를 하다 얼굴과 각막에 크게 화상을 입기도 했다. 인형극을 만난 건 그 즈음의 일이었다. 교회 여름 성경학교에서 본 인형극이 그의 마음에 들어온 것이다. 직접 인형을 만들고 연출을 해보니 이 일이다 싶었다. 곧장 극단 ‘보리떡과물고기’를 만들어 인형극판에 뛰어들었다. 그때만 해도 마리오네트는 이름도 알지 못했다. 그가 마리오네트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 건 그로부터 3년 후인 1997년 일본 이다국제인형극제에서였다. 부드럽고 유연한 동작, 풍부한 표정, 관객과의 깊은 교감까지 마리오네트에는 그가 그간 목말라했던 모든 게 담겨 있었다. 

 

그러나 국내에는 배울 곳이 마땅치 않았다. 몇 년 연구하며 비슷하게 만들 수는 있었지만 제대로 된 마리오네트는 아니었다. 제대로 배우려면 외국에 가야했다. 책임져야 할 가족과 극단, 부족한 유학 자금 때문에 갈등하던 김종구 씨에게 고등학생 아들이 막노동을 해서 번 돈 백만 원을 내밀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아내도 그의 결정을 지지해줬다. 그렇게 그는 마흔 여섯에 러시아로 떠났다. 


마흔여섯 유학생활

2002년 김종구 씨가 도착한 곳은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연극대학이었다. 제작학과에서 청강생으로 마리오네트 공부를 시작했다. 노교수는 러시아어라곤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는 동양인 청강생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배움이 급할 뿐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체력이 떨어질까 매일 새벽 일어나 운동을 하고 대강 싼 도시락 두 개를 들고 학교에 갔다. 

 

늦은 밤까지 작업실에 남아서 나무를 깎았다. 종구 씨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교수도 곧 그의 진심을 읽고 개인 지도까지 해주며 가르침을 줬다. 그렇게 더 열심히 살 수 없을 정도로 일 년 반을 보냈다. 돈이 다 떨어져 더 이상 유학 생활을 지속할 수 없었다.

 

 


“더 있고 싶어도 있을 수가 없었어요. 종강도 하기 전에 교수님께 돌아가겠다고 말씀 드리고 인사를 드렸죠. 그때 교수님이 ”당신이 내 최고의 제자였다“면서 안아주시는데 아직도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렇게 한국에 돌아온 김종구 씨는 충주 작업실에서 나무만 깎았다. 그 시절은 지금 생각해도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그렇게 깎은 인형들로 <목각인형 콘서트>라는 인형극을 만들었다. 별다른 줄거리 없이 오로지 마리오네트가 하는 연기로 구성된 인형극은 정통 인형극의 ‘클래식’이 되어 십년 째 공연 중이다. 수년 전 백만 원을 쥐어주었던 기특한 아들 김해일 씨는 그를 이어 마리오네트를 배운다. 손재주가 좋은 아내 송옥연 씨는 마리오네트 의상을 만들고, 국문학을 전공한 며느리 이슬기 씨는 극작을 돕는다. 어쩌다 보니 가족 극단이 됐다.

“월간 에세이에 기고를 하면서 가장 마지막에 쓴 문장이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였어요. 더 이상 행복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하고 행복할 겁니다. 앞으로도 무대 위에 설 수 있다면요.”


닳아버린 엄지, 쌓여가는 행복 

마리오네트는 그 단순하지 않은 생김새만큼이나 만드는 과정 또한 복잡하고 까다롭다. 인형을 구상하면 스케치를 하고, 정밀하게 사이즈를 계산해 도면을 그린다. 실수를 줄이기 위해 점토로 미리 모형을 만들어보기도 한다. 그렇게 밑작업이 준비되면 본격적으로 나무를 깎는다. 러시아에서는 자작나무를 썼지만 한국에서는 은행나무를 쓴다. 은행나무는 성질이 질겨서 잘 부러지지 않는다. 그렇게 깎은 인형은 연기를 하며 거듭 수정한다. 길게는 반년이 걸리는 긴 과정이다. 

 

 


나무를 깎다가 왼쪽 엄지손가락이 절단되는 사고를 겪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괜찮다. 바라는 게 하나 있다면 공연을 할 수 있는 소극장을 하나만 갖는 것이다. 초청공연을 다닐 때마다 극장이 너무 커서 아쉽다. 언제고 작은 극장에서 관객과 가까이 마주 앉아 즐겁게 호흡하는 게 꿈이다. 


그의 관절 마디마디에 반짝이는 실을 엮고 이곳으로 이끈 건 신이었을까 아니면 운명이었을까. 마침내 도착한 무대 위에서 오늘도 그는 행복한 춤을 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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