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부산일보 해양문학상] 우수상-김정명<나의 대항해 그리고 기항지에서 생긴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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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대항해 그리고 기항지에서 생긴 이야기들>


서문

제목에서 대항해라고 쓴 것은 그간 가까운 항해로서 일본, 필립핀, 인도네시아 그리고 좀 더 멀리는 타이, 말레이시아, 인도 동해안과 호주의 항구들 정도까지였는데, 이런 항로에 비하여, '나의 대항해'는 훨씬 더 긴긴 항해였다. 그리고 기항지들의 이야기도 주로 대서양, 발틱해 그리고 지중해와 흑해 연안의 해항들이다.

참고로 지리상의 대발견시대의 일환인 대항해시대는, 콜럼버스(1451~1506)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시작한 15세기 후반으로부터 캡틴 쿡(1728~1779)이 태평양 일대를 탐사하고 호주와 뉴질란드 등 남태평양 여러 섬나라들을 영국 영토로 선언한 18세기 중반까지의 약 280년 가까운 역사상 중요한 시대를 말한다. 참고로, 이는 조선 왕조 계보에서 보면 연산군으로부터 영조까지의 열두 임금 재위기간 280년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역사상 이 시기는 요즈음의 몇 차례 산업혁명에 우선하는 인간 의식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켰었다. 예를 들면, 마젤란(葡1480~1521)의 세계일주가 지구는 둥글다를 증명한 것을 비롯하여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라틴아메리카 식민화를 위한 해상 활동, 네덜란드와 영국의 해양 패권 경쟁 등이 그런 것들인 데, 이 시대에는 대범선무역(大帆船貿易)에 의해 동서 간에 도자기와 향료, 농산물과 광물 등 문물교류가 대량으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 시기에 이미 세계 현대 문명도의 밑그림은 대략 그려지고 있었다.

이런 대항해시대의 와중에서 조선 제주도 연안에서는 두 건의 해난 사고가 있었다. 하나는 일본으로 가던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 소속 선박 우베르커르크 호가 태풍을 만나서 표류하다 제주도 연안에 표박(漂泊)하던 중에 선원 셋이 몰래 상륙하여 물과 나무를 구하려다가 관헌에게 체포되어 조정으로 압송되었다. 이후 그들은 조선에 귀화하여 훈련도감에 소속되었고 병자호란에 참전했다가 둘은 전사하고 하나가 살아서 남았는데 그가 조선 최초의 서양 귀화인 박연(朴燕 혹은 朴延)이었다.

또 하나의 사고는 대만에서 일본 나가사끼로 향하던 역시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 소속선 스패르웨르(De Sperwer) 호의 경우인데 제주도 근해에서 태풍으로 배가 좌초하고 난파되어 28명의 선원이 익사했고 36명이 살아남아 모슬포 해안에 간신히 상륙했다. 박연이 상륙한 후 26년만의 일이었다. 그 배의 서기 하멜(1630~1692)과 그의 일행은 제주도에 머물며 일본으로 돌아가기를 학수고대하고 기다리길 9개월이 된 어느 날 조정에서 내려 보낸 동포 박연을 만난다. 그때 그들의 감회가 어떠했을가를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너무 많이 울어 눈물로 옷이 다 젖었다고 기록이 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운명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조선 조정의 무능과 무지로 13년 넘게 이리 저리 압송되며 군역, 감금, 태형, 유형, 잡역, 구걸, 분산 배치 등의 말 못할 과정을 겪으며 36명 중 20명은 죽었고 남은 16명 중 여수 근방에 배치되었던 하멜 일행 8명은 현종 7년(1666년)에 드디어 일본으로 도망쳐 살아서 귀국했었고 2년후에 나머지는 본국으로 송환 조치되었다. 이해 1668년에 출간된 <하멜표류기>는 하멜이 본사에 제출한 보고서 형식으로서라고도 불린다.

발간 즉시 영국,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 번역되고 출간되어 그들의 호기심을 충분히 끌었다고 볼 수 있다. 필자는 자주 암스테르담에 기항하여 머문적이 있다. 그때 들은 얘기다. 대항해시대 당시 네덜란드 백성의 3분의 1 정도가 해외로 진출하였고 그중 3분의 1 정도가 귀국하지 못 했다고 했다. 암스테르담에 가면 항구 입구에 <눈물의 탑>이 서 있다. 저간의 사정을 눌변으로 말해주고 있는 듯했다. <하멜표류기>에서 스패르웨르호(號) 선원명부를 보면 12세 선원도 보이는데 직책은 급사이다. 그들이 잘 사는 이유가 나변에 있질 않다. 바다가 하나도 없는 스위스 청년들도 그 당시 유럽 여러나라 선박의 선원으로 그리고 군대의 용병으로도 나가서 외화를 벌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스위스 중부에 위치한 아름다운 루체른호(湖)의 호반 도시 루체른에 가면<빈사(瀕死)의 사자상>이 있는데 스위스 선조들의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척박하고 가난했던 스위스는 인력들을 해외에 대거 내보내 일자리와 함께 경제를 유지했다. 1792년 프랑스 대혁명 당시 루이16세의 왕궁을 지키던 786명의 스위스 용병들은 끝까지 혁명군에 대항해 싸우다가 모조리 전사당했다. 그들이 죽어간 이유는 단 하나였다. 후세들에게까지 용병자리를 물려주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희생사였다.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사자상'은 그런 사연을 품고 있다.

77년 xx월 xx일

'나의 대항해시대'의 시작은 미국 뉴욕 5번가 소재 M社 소속의 유라누스호(號)를 승선한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이 배는 일본 오사카항에서 호주 서해안까지 철광석을 운반하는 항로에 투입되었었는데, 노르웨이 베르겐 조선소에서 건조된 배로서 선장실이 마치 호텔 라운지처럼 잘 꾸며져 있었고 전망이 탁 트이어 참 좋았다. 공상이지만 바이킹의 Long Ship을 연상시키며 그래서 그들이 이렇게 배를 잘 만드는구나는 생각도 들었었다. 적재항 포트해들란드는 남위 20도 정도에 위치하는데 인근이 Great Sandy Desert(대모 래사막)이다. 여름철 기온은 45도 이상 올라갔다. 부두 부근에는 몇몇 작업 인부들 빼고는 일반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하루는 선원 한 명이 애로 사항이 있다고 선장실로 찾아왔다."무슨 일인고?"

선원은 주머니에서 꾸겨진 메모지를 꺼집어내 보이며 말했다. "이것이 여기 한국인 친구의 주소인데 그의 집을 좀 찾아주세요."

"찾기 어려울걸..."

"돈을 빌려줬는데 꼭 찾아야 합니다."

어떤 친구이냐고 물었더니 지난 항차 때 본선에 놀러와 알게 되었는데 그때 돈을 빌려줬다는 것이었다. 풍파에서 번 돈을 부두에서 그렇게 쉽게 빌려주는가고 속으로 여기면서 작업 인부실에 찾아 들어갔다. 주소를 본 작업 반장은 건너편 낮은 산 언덕배기에 집이 몇 채가 보였는데 그 쪽으로 가야한다는 것이었다. 바깥은 역시 숨통 막히는 무더위인데다가 붉은 광석 가루가 온 천지를 뒤덮어서 길을 걷는 것이 마치 서부 영화에서나 본 장면 같았다. 실제로는 미국 서부는 신사 땅이다.

호주에는 더 이상 들어가면 살아 나오기 어렵다는 표시로 해골 그림을 간판으로 세워둔 곳이 많기 때문이다. 광석가루를 뒤집어 쓴 작은 집들은 주소도 물론 전부 광석가루로 가려졌는데 하나하나 더듬고 닦으며 겨우 찾아냈지만 노크를 해도 전혀 인기척이 나지 않아서 철수했다. 빌려준 선원도 선원이지만 그로부터 돈을 빌려간 문제의 호주 동포의 어려움을 나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적당한 기술이나 돈이 없으면 이런 곳에서 일하는 것이 당시 해외 동포 청년들의 공통된 모습이었다.

이전에 필자는 시드니항 혹은 멜버런항 쪽에도 자주 기항했었는데 그곳 동포 청년들은 오팔(Opal) 광산에 깊히 들어간다 했다. 재수 좋게 좀 큰 원석을 채굴하면 정식을 먹고 그렇지 못하면 라면을 먹는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교포 아줌마들이 장사하는 라면집이 허름한 지하층에 많이 모여 있었다. 교포 청년들이어, 파이팅! 발아래가 지옥인 해상 용병들도 있지 않소.

포트해들란드에서의 유일한 낙이라면 선석 대기중 낚시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선원들은 낚시중에 깜짝 놀라기도 하는데 월척이 올라와서가 아니고 뱀이 올라오기 때문이다. 북호주 일대의 바닷뱀은 독이 많기로 유명하다. 가까운 인도네시아 동해와 티모르 섬의 바닷뱀 맹독은 널리 알려져 있다.

선원들이 전하는 낚시터에서의 이야기 하나를 차제에 발설해 본다. 필자의 전임 선장은 낚시를 좋아하셨는데, 낚시터인 후갑판에 내려가서 낚시 도중에 무슨 사연으로 선원들과 언성을 높혔다고 한다. 혹간 이보다 더한 일도 있는 법인데 문제는 이때 언쟁을 말리려 나타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선장의 부인이셨다. 당시 운항중인 배에 가족이 함께 승선할 수 있었던 경우는 국적선에서는 불가능했지만 뉴욕 선사는 허용하고 있었다.

문제는 선장 부인이 일본 여인이었는데 사무라이 옷차림에다가 일본단도(日本短刀)를 휘드루며 언쟁판에 뛰어들었다는 것. 낚싯꾼들은 기겁을 해서 모두 도망친 것은 물론인데 칼도 칼이려니와 부인의 한쪽 어깨가 확 노출된 사무라이 차림인데다가 노출부분이 전부 문신으로 새겨져 있었다는 점이었다. 영화나 만화에서는 더러 봤지만 실제로는 처음이라 후닥닥 놀랐었다는 후문이다. 서양 배에는 선장실에 총이 주로 있는데 어떻게 그런 일본도가 생겼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아마도 부인이 승선할 때 지참한 것으로 보였다. 일본 부인의 남편 보호 본능에 거져 놀랄 뿐이었다.

78년 xx월 xx일

나는 유라누스호에서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휴가를 보내고 있었는데 회사에서 지시가 왔었다. 파나마로 가서 역시 M사 소속선 캐롤라이나호가 운하에 도착하면 그 배에 승선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항공편으로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파나마는 대륙으로는 남미와 북미를 연결짓고 바다로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이어 주는 그런 지리적 특징을 가진 재미난 나라였다. 그래서 그런지 밤이면 밤마다 호텔 시설들은 초국제 호텔다웁게 이색적으로 장식되고 음악도 요란스러웠다.

그러나 섭섭하게도 필자는 식사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해 보질 못했다. 승선 생활에 필요한 기본 도구나 일용품도 구입하지 못했다. 주머니에 달러가 한 푼도 없기 때문이었다. 부자 나라의 부자 회사 외항선 선장이 몸에 달러가 한닢도 없었던 이유는 김포 공항을 빠져나올 때 달러화를 지니지 못 하도록 하는 출국 심사관리들의 제지 때문이었다. 달러를 벌러 외국에 나가는데 출국 때 기본 달러를 한 푼도 몸에 못 지니게 하는 아이러니를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오?

이런 비슷한 일은 출국 때만이 있은 일이 아니었다. 국적선 승선시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부산에 내려가서 출항해야 했는데 이때 처와 갖난쟁이 애기도 함께 있었다. 소지품 검사 중 심사관은 내 지갑속을 샅샅이 살펴보더니 20달러 짜리를 한 장을 발견하고서 하는 말이 '윗층에 은행이 있는데 가서 환전하고 오시라'는 것이었다. 맨 끝에 줄을 섰기 때문에 환전하고 오면 비행기가 우리 가족을 기다리고 있을 리가 만무한 걸 뻔히 알면서도 그런 무리한 요구를 했다.

선원수첩을 보여주며 출항하러 가는데 이정도 돈은 최저로 필요한 돈이라 해도 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자기에게 주고 가라는 소리로 들리었다. 당시 시세로 환화 약 6천원 정도였다. 이때 마침 우리들 뒤에 선 신사 한 분께서 아주 낮은 톤으로 '그 돈 돌려줘!'라는 소리를 불쾌하다는 투로 내뱉는 걸 들었다. 문제의 공무원은 아무 소리 없이 그 돈을 건네주었다. 아내는 그 신사분께 감사합니다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렸고 나는 속으로 '오늘 재수 좋네'라고 여기며 흥분을 가라앉혔던 경험이 있다. 기분같아서는 그 돈을 북북 찢어서 휴지통에 던져넣고서 '이제 되었냐'고 묻고 싶었었다.

78년 xx월 xx일

내가 승선한 캐롤라이나호에는 대선배 선장님이 계셨었고 나는 스패어 선장 혹은 견습선장 격이었는데 일단 선객처럼 마음이 편했다. 전에 유라누스호에서는 이런 선객 선장들을 여러분 모시고 다녔었는데 이번엔 내가 그런 입장이 되었다. 큰 회사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M사(社)는 해운 시황을 예측해 한국 선장들을 확보하고 있었던 셈이었다. 배에는 일본에서 실은 잡화들이 만선이었는고 미국 동해안 항구들에 차례로 기항해서 짐을 내려주고 있었다. 볼티모어항에서 화물 일부를 내리고 다음 항인 필라델피아항으로 이동하는데 빙빙 둘러서 외해를 나가지 않고 지름길인 수로(Chesapeak & Delaware Canal)를 한밤중에 미국인 수로안내인의 지휘하에 고요히 건너가고 있었다. 항로가 2일 이상 절약되는 등 유리한 점 때문이었다.

나는 잠자리에 들려다가 어수선한 감이 들어서 일어나 브릿지(Bridge: 선박운전실)에 살며시 올라가 보았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았다.

나는 노 선장님께 가서 조용히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노 선장님은 외치시는 것이었다. "이 사람아, 큰 일 났네!"

사연은 이랬다. 수로(약 470 Km)를 반쯤 통과하면 중간에 기찻길 교량(Summit Bridge)이 수로를 가로 지르고 있는데 적당히 접근하면 도선사가 교량 통제원에게 무선전화로 연락을 해서 Lift Bridge(수로폭 만큼 기찻길이 수평으로 통째 들어 올려지는 방식의 다리)가 충분히 올라가고 그 아래로 배가 지나가게 되어 있었다. 도선사 얘기로는 충분히 접근해도 왠 일인지 철교가 안 올라가서 할 수 없이 엔진을 전속 후진하고 급히 닻도 투하했다는 것. 자동차처럼 배가 그렇게 쉽게 바로 정지하지 않는 법이다. 그런 와중에 배는 수로에서 180도 돌며 앞뒤 부분이 제방에 충돌하고 배는 진행 반대 방향으로 놓여졌고 철교 아래에 위치해 있었다. 만약 우리 배가 짐을 많이 싣고 있어서 좀 많이 가라앉아 있었더라면 수로에서 180도 회전하지 못하고 90도만 회전하여 수로 양안에 선수 선미가 철교처럼 걸쳐져 있을 수 도 생겼을 것이었다.

나는 노 선장님께 물었다. "확실히 철교가 올라가지 안 했습니까요?"

선장님은 계속 당황하고 있었다. "철교고 무엇이고 왼 천지가 불빛이라서 처음 길인 사람에겐 아무 것도 분간되지 안 됐다네."

나는 다시 도선사에게도 물었다. "철교가 이렇게 잘 올라가 있지 않습니까?"

도선사는 가슴을 쓸어내리 듯이 하며 설명했다. "철교가 늦게 올라가서 급히 조치를 안 취했더라면 큰 일 날 뻔했소. 얼마 전에 올라가지 않은 상태로 배가 그냥 지나가다 철교에 부딪혀 선실 윗부분이 철교와 충돌하고 망가져 선원들이 십여 명 죽었었다오."

나는 속으로 여겼다. 그런 사고 때문에 도선사가 혹시 너무 과민 반응을 일으켜서 이런 일이 생기지 안 했을가고. 이 사고로 선수에서는 닻과 닻줄을 잃었고 선미에서는 수면하에 있는 키(舵)가 수로 벽에 부딪혀 키(舵)의 지지축(rudder post)이 15도 가량 비틀어졌음을 발견했는데 이런 상황으로는 수로 통항을 다시 시도 할 수가 없어서 체사픽 만을 빠져나가 외해를 돌아서 다시 델라웨어 만으로 진입해 필라델피아 항에 들어가게 되었다. 물론 대형 예인선이 에스코트 했었고 외항 도선사가 만약을 위해 브릿지에 대기했었다.

필라델피아에서 하역을 하니 타축이 좀 더 드러나 보였는데 겉으로 보기에 아무 이상을 발견할 수 없었다. 한 아름 가까운 강철 기둥인데 15도 가량 비틀어졌는데도 겉으로 보기엔 아무 흔적이 없었다. 역시 강철은 강철이었다. 항해는 다시 시작되었다. 차항은 콘넷티컷주의 브릿지 포트였는데 배가 그 상태인데도 뉴욕 맨핫턴의 이스트 강을 통과했었다. 이스트 강에서 보는 UN 건물은 또 다른 경관을 자랑하고 있었다. 브릿지 포트에서 마지막 짐을 내려놓고 배는 뉴어크(Newark) 수리조선소에 들어갔다.

맨핫턴 5번가에 있는 본사와 가까워 본사 직원들이 하루에 한 팀씩 견학하러 왔었는데 나더러 좋은 경험한다하며 격려해 주었다. 그곳에서 한 달 가량 머물러야 한다는 스케줄이 나왔었다. 잃어버린 닻과 닻줄을 도로 찾아 검사하고 재설치해야 했고 조타축을 뽑아내고 다시 만든 축으로 교체해야 한다는 검사 결론이 났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사고에 대한 약간의 조언만 하면 거의 하는 일이 없어서 뉴욕 관광은 북쪽의 컬럼비아 대학으로부터 남으로는 자유의 여신상까지 많이 한 셈이었다. 링컨 센터에서는 종일 오패라를 관람하고 뉴욕 필에서 관현악을 시청하기도 했었다.

밤이면 한국 가수들이 노래하는 한국 식당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일과가 되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본사의 부사장께서 뵙자는 전갈이 와서 들렸더니 벨기에의 브륏셀 항에 머물고 있는 컨티넨탈S호를 승선해 발틱해의 레닌그라드항에 좀 갈 수가 없겠느냐는 제의의 말씀을 하셨다. 곡물을 만선한 배인데 한국 선장을 비롯하여 한국 선원들이 쏘련에 입국하지 않겠다는 바, 그 이유는 귀국하면 불이익을 크게 받는 다는 것이었다. 나는 즉시 말씀의 사연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고 쾌히 가겠다고 답했다.

부사장님은 안도의 쉼을 내쉬셨다. 보충 선원들은 한국에서 출발했으니 내일이라도 곧 귀임해 달라고 당부하셨다. 뉴욕은 앞으로 계속 올 기회가 있을테니 또 보도록 하고 잘 다녀오라고 격려해 주셨다. 나로서는 심심한 판에 잘된 일이었다. 그는 나를 5층 VIP식당으로 안내해 식사를 함께하자고 했고 메뉴도 직접 자기가 송아지고기로 추천해주셨다. 식사후에는 연만한 호스테스가 아바나 시가 케이스를 가져와 열어 보이셨는데 부사장께서는 하나 집어며 '손자에게 갖다 줘야지'라고 했는데 호스테스는 '할아버지께 주실 거지요?'라고 조크를 했다. 나보고도 기념으로 하나 가져라고 하시기에 하나 집어 윗주머니에 넣었다.

78년 xx월 xx

현지에 귀임하여 하선하시는 선장의 조언대로 한국 영사관에 가서 일종의 '사실 신고서'를 작성해 날인 서명을 받았다. 영사가 하는 말이 '중요한 장면들을 사진을 찍고 레포트를 작성해 보내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알겠습니다'고 답하고 나왔으나, '내가 무슨 간첩교육이라도 받은 줄 아시네. 사고 나면 자기가 책임이라도 진단 말인가'고 못 마땅해 했었다. 컨티넨탈S호는 드디어 새 크루 멤버들로 교채되어 쏘련이라는 적지(?)로 향해 출항하였다. 초행이라 프랑스 셸부르항에서 영국인 도선사를 태웠다. 도버해협을 통과하고 북해(North Sea)를 항행할 때 나이 지긋하신 도선사는 자기 이야기를 꽤 많이 하셨다.

셸부르항에서는 주로 프랑스 도선사를 고용하는데 애써 영국 도선사를 불러줘서 고맙다는 얘기를 비롯하여 스코틀란드에서 튼튼하지만 오래된 집에서 연세가 많은 누나를 모시고 사는 윌리암스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북해'를 자기 마당처럼 돌아다녔다고도 했다. 자녀 얘기를 물으니 아들 하나가 있는데 공부를 안 해서 별로 종사하는 영구 직장이 없다고 섭섭한 어투로 답했다. 나는 속으로 괜한 질문을 했구나 싶었다.

배가 덴마크 북단에 이르러니 유라누스호의 탄생지 노르웨이의 베르겐 조선소가 가까워서 롱 쉽의 바이킹들이 생각나 물었더니 그들의 약탈에 윌리암스 씨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리 나라로 치면 왜구의 노략질처럼 그랬던가 보았다. 스코틀랜드는 일찍이 남으로 잉글랜드와 북으로는 바이킹들과의 전쟁에서 살아남으려고 고난을 많이 겪었다고 말했다. 바이킹들이 가장 활동을 많이 한 시기는 우리나라로 치면 려시대(10~14세기)쯤으로 보인다. 일명 노르만족인 그들은 동토의 북쪽보다 주로 남쪽을 경영하며 활동 영역으로 잡았었던가 보다. 프랑스의 서안 노르망디 지역은 그들이 침략해 살았던 땅이라서 붙은 이름이라고 했다.

영화 <The Long Ships, 1963)이 문득 기억났다. 리처드 위드마크와 시드니 포이티에 등이 출연한 블록 버스터 영화였는데 그들의 수호신이 Odin이라는 것과 북아프리카 무어인들과의 싸움 장면만이 기억에 남는다. 노르웨이 해양 탐구가 토르 헤이에달(Thor Heyerdahl 1914~2002)은 Kon-Tiki라는 파피루스로 엮은 배로 남태평양을 항해한 사람으로도 유명한데 그가 쓴 책으로 <The Sea>라는 저서가 있다.

그기에는 노르웨이 바이킹들이 남쪽으로만 내려간 것이 아니고 북으로 북극항해를 시도한 기록들이 나오는데 배가 얼어붙은 바다에서 오도가도 못하다가 결국은 두텁게 언 얼음의 압력으로 목선이 쪼그러들고 드디어 부서져 육지로 피신하고 부서진 배를 땔감으로 뜯어와서 불을 지피며 버티다 죽는 장면들이 나온다. 이런 비극을 면하려고 어떤 배는 선원들이 우현에서 좌현으로 다시 좌현에서 우현으로 때를 지어 함께 뛰면서 배를 좌우로 롤링을 시켜 배가 얼음에 갇히는 것을 피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기우리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그들의 후예들은 지금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국민들 중 하나로 영광을 누리고 있다. 우리도 장보고(신라 후기 9세기) 같은 걸출한 해양인을 자랑하는 후예이지만 결국은 쇄국정책으로 우물안 개구리 신세가 되어 외세에 희생되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78년 xx월 xx일

콘티넨탈S호는 그들의 핵심 수역을 통과하고 있었다. 영국의 북해(North Sea)를 건너고 덴마크 북단을 돌아 스웨덴과 덴마크 사이 협수로에 당도했는데 너무 좁아서 다시 그곳 수로 도선사를 태웠다. 덴마크 도선사는 초행길이냐고 묻고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겨울에 일대 바다가 얼어붙을 때는 자전거를 타고 배에 온다고도 말했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코펜하겐항 앞을 통과할 때는 '인어공주 상' 쪽을 가리키며 쌍안경으로 한번 보라기도 했다. 덴마크는 바이킹으로, 또 낙농국가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어려운 양자역학의 풀이에 일가견을 피력한 이른바 '코펜하겐 해석'을 주도한 노벨상 수상 물리학자 닐스 보어(1885~1962)의 나라이기도 하다.

보어는 아인슈타인과의 논쟁으로도 유명하다. 컨티넨탈S호는 본격적으로 발틱해에 진입하고 있었다. 발틱해는 넓고 깊은 계곡들로부터의 얼음 녹은 물로 인해 염도가 많이 낮아 배가 좀 더 가라앉는 관계로 속력이 조금 떨어졌었다. 발틱해는 반쯤은 호수고 반쯤은 바다다. 배가 발틱해에 들어서자마자 필자는 러일 전쟁(1904~1905) 때 일본 원정을 명령받은 제정 러시아 '발틱 함대'를 떠올렸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해군 중장 로제스트벤스키 사령관이 지휘하는 가운데 1904년 10월 15일 리예파야(라트비아 서해안의 군항)를 출발, 희망봉을 돌아서 블라디보스톡까지의 사상 최장의 원정길에 올랐던 선단으로 기함 스와로프호를 비롯해 전함 8척, 장갑 순양함 3척, 순양함 6척과 구축함 9척을 포함한 8척의 경호함에 공작선·병원선·수송선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출항 7개월이 넘어 1905년 5월에 우리나라 동해에 도착했는 데, 여기서 벌어진 해전에서 도고(東鄕) 사령관이 지휘하는 일본 연합함대에 의해 거의 섬멸당하고 말았다.

이 사건은 니콜라이 2세의 제정 러시아 폐망과 소련 공상당 출현에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었다. 220일간의 '세상이 시작된 이래 어떤 군함도 시도한 적이 없는 항해로 지구 둘레의 4분의 3에 가까운 약 3만㎞를 항행해온 수 병들은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문제의 그날 낮에 양군이 격렬히 맞붙어 싸우기 시작했다. 전투는 꼬박 이틀 동안 계속되었고 발트함대의 완패였다. 불과 이틀 만에 전 함대가 무너져 해상에서 사라졌다. 러시아측 자료는, 49척에 달했던 대함대에서 블라디보스토크에 도달한 군함은 겨우 3척이며 전사자가 5,045명이었다.

우리 배는 독일과 폴란드 북해를 항해하고 있다. 이 해역은 세계해난사에서 가장 비참한 사고가 난 곳으로도 유명하다. 1945년 독일의 여객선 빌헤름 구스틀로프호 폭침 사건으로 타이타닉호의 희생자 6배가 넘는 9천 여백 명이 무참하게 수장되었었다. 사건의 내역서를 좀 살펴보면, 1945년 1월 30일에 그다니아(현재는 폴란드 영토지만 당시에는 독일령)에서 후송되던 독일인 일만 오백 여명(승조원 포함)을 태우고 키일항으로 향하던 빌헬름 구스틀로프(Wilhelm Gustloff)호가 소련 잠수함의 어뢰 3발을 맞고 침몰하였다. 패전이 가까워지자 점령지에서 자국민들을 후퇴 시키는데 동원된 긴급 여객선이었다.

결국 이 사고로 9,343명이 사망한 역대 최악의 해난사고로 기록되었다. 구스틀로프호 침몰 뒤에도 유사 사고가 일어났다. 직후인 1945년 2월 10일에는 여객선 슈트이벤호가, 1945년 4월 16일에는 여객선 고야호가 각각 소련 잠수함의 공격을 받아서 침몰했는데 슈트이벤호에서는 약 4,500명 고야 호에서는 약 6천명이 희생되었다. 독일은 1945년 4월 30일에 히틀러가 자살했고 5월 8일 패전을 선언했다.

참고지만, 아래는 구스틀로프 호의 침몰장면이다.

우리는 이 사진에서 몇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가 있다. 자세히 보면 겨울 밤 10시 경이면 캄캄해서 촬영이 안 되는데 수평선도 보이고 선체 부분과 사람들도 보이는 이유는 고위도 지방에서의 겨울에는 소위 흑야 현상으로 태양이 북위 약 66.5도(북회귀선) 이상에서는 해가 아예 수평선 위로 오르지 않고, 이하로만 맴도는데 지금 사진에서는 고위도지만 북위 66.5도 이하 지방이라서 해가 대낮에 조금 떴다가 지금은 수평선하 부근에 머물고 있기에 그렇게 컴컴하지가 않다. 자세히 또 보노라면 사람들이 갑판 곳곳에서 줄이나 줄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는 모습이 보이는 데, 왜 우리의 세월호는 한 사람도 이런 준비된 줄이나 줄사다리를 타고 내려온 사람이 없었는지 의아하기 짝이 없다.

78년 xx월 xx일

컨티넨탈S호가 핀란드의 헬싱키항 건너편 쏘연방국 리투니아의 탈린항을 접근해서 항해하고 있었는데 항내에 잠수함들이 빼곡하게 정박하고 있었다. 무섭다 못해 소름끼치기까지 했다. 배는 드디어 레닌그라드 외항에 닻을 내렸다. VHF 라디오 전화로 레닌그라드 Inflot(국영선박대리점)에 착선을 통보했다. 적막의 먼 저편으로부터 침침한 공간을 타고 들려오는 쏘련 여직원의 목소리는 투박스럽기는 해도 수상한 적막감을 해소시켜줘서 일단 안심했다. 며칠 기다리라는 것이었지만 하루에 한 번씩 통화한다니 사람이 사는 곳이 맞구나는 생각도 들었다.

뿌옇게 안개비가 내리는 날씨여서 종일 침침하고 마치 인적이 끊긴 산속처럼 괴괴하기도 했지만 부근에 띄엄띄엄 닻을 내리고 대기중인 배들이 뱃불을 환히 밝히고 있어서 친근감이 들어 안도에 도움이 되었다. 낚시라도 좀 되었으면 좋을 텐데 물고기가 전혀 올라오지 안했다. 다 잡아 먹어서 씨가 말랐는가고 했더니 도선사 윌리엄스 씨는 틀림없이 그럴 것 같다고 말했다. 쏘련은 흉년이 들어서 그런지 서방 세계로부터 곡물을 상당량 수입하고 있었다. 대기선들이 대부분 곡물선들이었다.

뉴욕 본사의 부사장도 언질을 주셨었다. "지금 쏘련은 스위스 금시장에 금을 많이 내다 팔고 있소. 곡물을 많이 수입하려 하고 있지오. 우리는 그 쪽으로 선복량을 늘리고 있지오. 미국 인공위성이 쏘련의 곡물 생산지대를 촬영하여 생산량을 분석해서 통보해 주고 있다오. 그들은 우리 위성 데이터를 하느님처럼 믿습니다."

인공위성이라 하면 쏘련인데 막상 쏘련 인공위성은 자기 마당의 먹고 사는 곡물 재배 상황은 미국의 위성에 의존해야 한다니 참으로 아니러니였다.

78년 xx월 xx일

드디어 배가 항내로 입항하게 되었고 곡물 전용 하역부두에 닿았다. 많은 출입국 관리들과 대리점 직원이 승선했었고 입항 수속이 진행되었다. 사무장은 입항 경험이 있어 수속을 차질없이 잘 진행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사온 선물들을 적절히 찔러 넣어주는 것으로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마감되었다. 젊은 여성 관리 한 명은 대단한 뚱보였는데 은밀하게 접근해 와서 향수를 요구했으나, 대신에 스타킹을 구해서 주었더니 재빨리 뱃속에 감아 넣고서는 패션모델처럼 한 바퀴 빙돌며 괜찮냐고 물었다. 뷰티풀이라고 했드니 그녀는 윙크로 감사의 표시를 남기고 하선해 갔다.

이곳 레닌그라드항에서는 세관수속은 간편하고 대신에 군인들이 출입국 감시업무에 충실하는 것 같았다. 본선 트랩 아래에 군인이 당직을 섰는데 작업인부들의 출입증도 일일히 검사하고 있었다. 대리점 직원에게 곡물 검사원들이 상당히 검사를 철저히 한다고 말하자, '이 곡물은 기차타고 아주 먼 내륙으로 이송되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대서양을 건너서 다시 이 넓은 쏘련 천지 어디까지 실려가는걸까' 하고 궁금해하고 있었다.

도선사 윌리엄스 선장을 귀국시키기 위해 함께 상륙하였다. 혁명기념일(11월7일)이 닥아오고 있어서 그런지 네브스키 대거리에는 붉은 깃발이 물결치고 높은 건물 벽면에는 근엄한 모습의 레닌 초상화가 가는 곳마다 시야를 막으며 노려보고 있는 듯하였다. 우선 은행에 가서 환전을 해서 손에 루불화를 좀 쥐니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났다. 자본주의 마인드라서 그럴가. 윌리엄스 도선사가 출국 수속용 사진을 즉석사진기에서 찍고 있는 동안에 나는 부근의 구두수선소를 열심히 구경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헤진 구두를 창구에서 접수시키면 담당직원이 내용을 살피고 메모를 붙여 안으로 갖다 놓는다. 땅이 진눈개비로 질척거려서 주로 가죽 장화를 많이 신고 또 수선도 하는 듯이 보였다.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묵호항 상황이 얼른 연상되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구두수선소 점포는 우리나라 은행같은 요지에 있었고 이곳 은행은 우리나라 구두점포보다 훨씬 못한 구석자리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들에겐 돈보다 신발이 더 생활 필수품이기 때문일가.

우리는 식사시간이 되어서 어느 레스토랑에 줄을 서고 순번을 기다렸는데 두툼한 군복차림의 문지기가 유리 도어를 빗장으로 걸어 잠그고 열어줄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으니 줄이 줄어들 리가 만무했다. 마침 부근에 공중전화가 있어서 대리점에 사정을 얘기했더니 패스포드를 보여줘보라고 해서 그렇게 했으나 역시 그들은 막무가내였는데, 마침 같이 줄을 선 아가씨들이 들어가는 요령을 가르쳐 줄테니 자기들을 일행처럼 함께 들어가게 해달라는 조건을 걸었다. 영어를 참 잘 했다.

우리는 그렇게 하자고 동의했는데 방법은 간단했다. 말보로 답배 두 갑을 문지기에게 보여주었더니 깜쪽같이 빗장을 풀고 유리문을 열어 우리 넷을 낚아채듯 입장시켰다. 그리고 다시 빗장을 걸었고 담배를 빠르게 챙겼다. 그녀들은 우리를 2층으로 안내했고 우리는 그녀들이 고마워 밥값도 치러주었다. 막간을 이용하여 잠깐 나는 옆쪽 바 안을 기웃거려 보았는데, '앗뿔사' 간이 철렁하는 장면. 우리 배 일등항해사가 술에 만취하여 테이블을 휘젓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역 담당 항해사가 언제 이렇게 상륙하여 내밀한 바 안에까지 찾아들어와 벌써 만취해서 주사(酒邪)의 절정에 도달해 있다니 정말 두 눈을 의심할 지경이었다.

할 수 없이 윌리엄스 도선사를 불러서 일항사의 양 팔을 잡았고 지배인 쪽으로 미안하다는 인사를 보냈으나 벌써 그는 경찰에 신고했었고 드디어 경찰과 함께 나타난 체포조는 초헤비급 몸집의 인간 골리앗으로 추운 날씨인데 T셔츠 한 장을 입고 있었다. 영화에서나 본 인간을 가까이서 본 것은 생전 처음이었다. 성큼성큼 이쪽으로 닥아와서 일항사의 목덜미를 꽉 잡았는데 아마 그냥 놔뒀더라면 목이 졸려 죽었을지 모를 그럴 상황이었다.

나는 지배인에게 가서 선원의 소속선 선장이니 대리점 (Inflot)에 연락해서 배에 도로 태워다 달라고 하며 10루불을 찔러주니 일단 체포조를 돌려 보냈고 좀 있으니 대리점이 와서 대려갔었다. 도선사 윌리엄스 씨에게 부끄러워 죽을 지경이었으나 그도 선원 출신이니 이해할 것으로 믿고 대신에 카스피 해산(産) 캐비어 요리와 고급 보드카 베이스 칵테일을 대접해서 체면을 살렸다. 캐비어 먹는 방법을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동행(?) 아가씨들이 친절히 가르쳐주었다.

45도가 넘는다는 보드카를 아가씨들은 한 모금 넘기고 순간 오랜지 주스로 입속을 행구고 있었다. 그런 독한 술을 일항사는 그냥 마셨고 이성을 잃었던가 보다. 무대에서는 무희들이 러시아 춤을 추고 있다. 아가씨들은 우리보고 청바지를 사겠다고 했고 달러를 팔라고도 했었다. 100달러에 몇 루불을 주는가고 슬쩍 물었더니 400루불이 암시세라고 귀속말을 했다. 방금 우리는 은행에서 60루불을 받았으니 그 차이가 얼만가. 선원들 귀선시간이 자정까지이니 우리는 11시에 자리를 떴었다.

그의 출국이 며칠이나 걸려서 몹씨 미안했었다. 그대신 아가씨들과 암거래한 루불화로 매일 그 레스토랑에서 파티를 가졌었다. 며칠 후 드디어 레닌그라드 공항에서 도선사 윌리엄스 씨를 빠리행 비행기편으로 돌려보내며 배웅했었다. 돌아오는 길에 선원들과 함께 레닌그라드의 여기저기를 관광했는데 관광버스 비용을 루불화로 지불하니 우리나라 돈으로 약 2만원 안팎이었다. 선원들은 무엇을 팔았는지 루불화를 많이 소지하고 있었다.

수로지에 의하면, 레닌그라드는 네바 강 하구에 있으며, 그 델타지대의 자연섬과 운하로 인해 생긴 수많은 섬 위에 세워진 도시다. 이런 점에서 발트해의 베니스라 불리울 정도로 아드리아해의 베니스와 닮은 점이 많다. 베니스도 400여개의 섬위에 세워진 도시이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괴물 황제 표트르 대제(피터 대제: Peter I The Great 1672~1725)는 바이킹과의 전쟁, 스웨덴과의 '북방전쟁'도 승리로 이끌었고 앞에 언급한 발틱함대도 창설했었다. 이 도시를 서양식으로 건설하여 1914년 패트로그라드 불렀는데 공산혁명 후 1924년 초 레닌이 죽자 그를 기념하여 레닌그라드로 불리게 되었다고 했다. 로마에 가면 이런 말이 있다. "로마는 하루에는 다 볼 수 있어도 한 달 간에는 다 볼 수가 없다."

레닌그라드도 그런 도시였다. 어떤 경로로 그리고 어떤 사연으로 이곳까지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삼국사기의 진귀본도 이곳 어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했다. 이곳에는 우스벤스키라는 묘지가 있는데 그들은 세계 최대 공동묘지라 했다. 고요한 숲속에 환상곡이 맑고 고요하게 흐르는데 '모국(Mother Land)'이라는 비석위에 칼을 높이 든 여인상이 서 있었고 모든 죽은 자들은 30~40센티의 높이, 사방 10M 넓이 정도의 땅속에 합장되어 있는 모양이었는데 묘석에는 1841~1942이라는 연수만 새겨져 있었다. 이 기간은 독일군의 레닌그라드 '900일간의 포위 전투'가 있은 해이다.

아사자 40만을 포함해 80만이 당시에 죽었다고 했다. 이색적인 것은 신혼부부들이 웨딩드레스 차림으로 결혼 기념 사진들을 찍고 있는 장면이었다.

우리는 세계3대박물관의 하나라는 <에르미타시 미술관과 겨울궁전>을 비롯하여 푸른 네프강, 그 연안의 네프스키 대로를 따라 18, 19세기 바로크 양식의 무겁고 아름다운 건축물, 그리고 '지젤' 공연으로 유명한 <키로프 극장> 등을 우선 눈요기를 했고 차차로 정밀하게 구경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선원들은 나와 동행하기를 꺼린다. 그들은 마음이 항상 술집에 가 있기 때문이다.

78년 xx월 xx일

통상적으로 인프롯 대리점 직원들은 정치나 경제에 대한 얘기들은 거의 꺼내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 방선한 나이 지긋한 직원은 차 한잔을 나누는 자리에서 이것 저것 경제에 관한 얘기를 꺼집어 냈다. 드디어 그는 물었다.

"선원들은 급료를 얼마나 받습니까?"

서구항에서는 이런 질문을 해오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른 답을 주면 큰 사건이 발생하는 수가 있으나 이곳에서는 그럴 염려가 전혀 없어서 급료명세서를 보이며 설명해 주었다. 1978년도 보통선원 급료는 500에서 1,000달러, 사관들이 1,500달러 선장 기관장은 3,000달러 정도였다.

그는 고개를 반대켠으로 돌리면서 세라뷔(C'est la vie)라고 푸념했었지만 나는 못 들은 척 했었다. "인생은 그런 것이로구나(That is Life)!"를 프랑스어로 표현한 것. 필자가 알기로는 그가 받는 급료는 월 200~300루불이니까 실제는 값 싼 청바지 두 벌 정도의 구매 가치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그는 또 어떤 음식을 먹느냐고 묻기도 했는데, 나는 '우리 함께 저녁 식 사라도 함께 합시다. 위스키도 한 잔 하면서...'라고 제의했었는데 끝내 또 다시 방문하지는 않았다.

1978년 xx월 xx

나이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예쁜 아가씨 검사관이 한 사람 승선하여 위생 관계의 서류를 훑어보다가 얘기 방향을 한국 여인네 쪽으로 돌렸다. '어떻게 생겼느냐?' '어떤 옷을 입느냐?' 등 묻기에 지니고 있었던 가족 사진들을 보여줬더니 유심히 살펴보다가 엉뚱하게도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닌가. "조그마한 나라 사람들이 왜 그렇게 전쟁을 좋아하시나요?"

나는 생전 처음 듣는 질문이라서 말문이 막혀 그저 고개만 약간 저어며 '뭐라 얘길해야 하나?'고 머뭇거린 순간이었는데, 그녀는 다시 이렇게 말하며 나의 심기를 들었다 놨다하는 것이 아닌가. "선장님, 제가 잘못 알고 있나요?"

나는 또 말문이 막혔지만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고 이런 생각이 들고 있었다. "평소의 고정관념을 어떤 계기로 순간 바꿀 수 있는 재치는 훌륭한 인격이다."

나는 그녀에게 선물을 좀 하겠다고 했더니 규정상 받으면 큰 일 난다고 거절했는데 우리 가족이 쏘련 친구에게 주는 것이니 받으라고 말하며 달러 몇 장을 봉투에 넣어 '가족과 식사라도 하시오'라고 말하며 간신히 건넸다. 감사를 연발했지만 소련인이라고 해서 모두 '크렘린'이 아닌 것을 알게해 준 그녀에게 나도 감사했다.

78년 xx월 xx일

항무국 직원 드미트리는 유태인이라고 자기를 소개하면서 진귀한 물건이 있으니 사라고 은근히 졸랐다.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먼저 내 사무실 문을 잠그고 오더니 침실에 좀 들어가자고 해서 침실에 들어가니 침실 문고리를 잠그고는 다시 화장실 안에 들어가자고 하더니 들어가서 화장실 문을 찰칵 잠갔다. 그리고 나서 열쇠로 가방을 열더니 책 크기만한 나무 판자를 내 앞에 내밀었는데 그기에는 예수와 마리아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러시아 정교 의식으로 예배를 볼 때 사용하는 소위 아이콘이라는 성상(聖 像) 그림이었다. '나는 예수교인도 아니고 이걸 사서 어딤에 쓰겠냐'고 물었더니 뉴욕에 가서 팔면 골동품으로 비싸게 팔린다고 하며 런던의 어느 골동품 회사가 발행한 책자까지 내보이며 이래도 못 믿겠느냐고 다그쳤다. 그러나 예수 성화를 밀무역해서 돈 벌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다만 대문호 막심 고리키(1868~1936)의 파란만장한 자전 소설 <어린 시절, 도제 시절>이라는 책에서 본 성상(聖像) 화가 보조로서의 재미난 장면이 떠올라서 기념으로 한 점 사기로 했다.

그런데 그는 좀 더 팔려고 자기 아파트에 나를 데리고 갔다. 너무 추운 곳이라 그런지 다른 건물들처럼 아파트 벽도 대단히 두꺼웠고 통로에는 스팀히타가 보였으며 현관 도어에는 덧문이 붙어 있었는데 너무 두툼해서 마치 침대 메트리스를 달아놓은 것처럼 보였다. 도둑이 많아서 그런지 비밀이 많아서 그런지 주렁주렁 달린 열쇠 꾸러미를 한참이나 철거덕거리며 방문을 따고는 또 다시 열쇠를 채우곤 했다. 방안에 일제 전축이 보여서 어디서 구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돈만 있으면 없는 게 없지오. 여자 친구도 여럿 있어요'라고 우쭐대는 것이었다.

그의 테이블 위에 아이콘들이 여러 종류가 있었는데 성모가 애기 예수를 안고 있는 것을 하나 더 샀다. 이태리의 성당에 가면 볼 수 있는 벽화들이 깨알처럼 목판에 그려진 것도 있었다. 쏘련에서 이런 것들을 살 줄 꿈에도 몰랐었기에 밤 늦게 배달해준 물건들을 머릿맡에 두고 감상하고 있노라니 그에게서 들은 말이 생각났다. "쏘련만큼 돈 벌기 좋고 쏘련만큼 돈 쓰기 좋은 나라도 없을 겁니다요."

유태인이라서 그런가. 우리 회사도 유태인 회사인데 그렇게 교활하지 않던데. <지붕위의 바이올린>이란 영화도 주인공이 쏘련 유태인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던데. 나는 이런 생각으로 졸음에 빠져 들고 있었다.

78년 xx월 xx일

선원들로부터 청바지를 산 인부들이 세관에 잡혀 밀무역이 들통나 세관원들이 조사차 승선하였다. 바지 하나에 100루불씩 합계 1,000루불이라는 벌금이 매겨져 공식 환율로 약 1,700달러가 되었다. 선원들의 손실이 너무 커서 걱정이 되어 그들에게 정중하게 사과하고 선처를 요망한다고 했더니 의외로 부드러워지더니만 사무장과 함께 밖에 잠간 나갔다가 돌아와서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번 사건은 없었던 걸로 칩시다."

그러면서 애써 작성한 일건의 서류를 휴지처럼 찢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모두들 되돌아갔다. 사무장에게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은즉, 청바지 두 장으로 해결 봤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청바지 한 장의 시중가격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으니 150루불 정도 호가한다는 것. 그들의 한 달 급료에 가깝다니 놀랍기만 했다. 원가는 얼마나 하느냐고 물으니, 한국에서 작업복하려고 사온 것들이라고 말했다. 모를 일이었다. "한국 작업복이 여기서 그렇게 호가하나?" 필립핀 선원들이 쏘련항을 '선원들의 낙원'이라 말한다고 했다. 그 뜻을 좀 알만해졌다.

78년 xx월 xx일

선원들과 함께 병원에 갔다. 나는 진짜 환자였으나 대부분 선원들은 알고보니 '나이롱' 환자였다. 그들 말대로 '지구 끝까지 쫓겨온 바다 생활'에서 얻은 것은 스트레스라는 적폐뿐인데 열악한 병원 대기실에서 그냥 앉아있질 못하고 흙냄세 맡으로 모두 도망친 것은 어찌 할 수 없는 현상이라고 나는 여기고 있었다. 쏘련은 인구당 의사 숫자가 가장 많은 나라로 선전되고 있으나 의료시설이나 약품사정은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나는 통풍을 앓고 있었기에 혈액 검사가 기본이었는데도 생략하고 파라핀 찜질요법만 해주었다.

크다란 얼음덩이같은 파라핀을 녹여서 꺼즈를 집어넣었다가 곧 꺼집어내어 동통부위에 덮어주는 것이 전부였다. 환자가 얼마나 뜨거워하는지는 막무가내였다. 당시 브레즈네프 서기장도 이 병을 앓고 있었던 걸로 알려지고 있었는데 그가 당 서기장에 오른 후(1970년도 경)부터 아프칸 침공과 경제 침체로부터 오는 스트레스로 아마도 통풍은 더해가고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되었다. 나는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라고 믿는 편에 속하기 때문이다.

78년 xx월 xx일

반공을 국시로 삼는 정부의 공산국가 기항중 선원들의 상륙금지라는 당연한 요구와 지시, 한편으로 먼 항해 끝에 선원들에게 땅 냄세 좀 맡게해 주려는 선장의 배려심은, 원칙과 실무면에서 당연히 대립하게 된다. 그러나 초록은 동색이라고 나도 선장 이전에 선원이기에 선원들의 상륙금지를 적절히 풀어주는 방법을 강구하는 편이다. 나머지는 사무장과 선원들이 알아서 해결해 주기를 바라면서... 물론 다르게 생각하는 선장들도 많다. 오늘도 그렇게 해서 상륙한 한 무리의 선원들이 앞에 얘기한 문제의 레스토랑 바에 모여 파티를 열고 있었다.

드문드문 아가씨들을 사이에 앉혀서 축배를 들고 있었다. 물론 아가씨들은 바의 종업원들이 아니고 파트너를 구하기 위해(?) 출장한 아마추어들이었다. 공산국가에는 '프로 아가씨'가 있을 수가 없다. 우리 일행은 기관장의 생일을 축하하려고 레스토랑을 미리 예약해 놓았었기에 무난히 좋은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때 기관사 한 사람이 예쁜 아가씨를 기관장과 나 사이에 앉히고 갔다. 긴 은발 머리를 날리면서 칵테일을 한잔 손에 들고 있었고 자기를 루바라고 소개까지 하는 것이었다.

루바와 일행은 기관장에게 'Happy Birthday To You∼'로 축배를 들며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선원들은 계약기간을 마치고 귀가하는 날이 생일이라고 여기지만 레닌그라드에서는 예외였다. 
나는 루바에게 살며시 물었다. "한국인들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루바는 유쾌히 답했다. "참 좋아요." 
나는 다시 물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드나요?" 
루바는 거리낌 없이 답했다. "근면하게 보여서 참 좋아 보여요." 
나는 계속 물었다. "러시아 청년들도 근면하지 않나요?"

루바는 부정적으로 답했다, "매일 술 마시고 게으름 피우고 때리고…"

그러면서 작은 소리로 저쪽 카운터에 앉은 안경 쓴 멋쟁이 아가씨가 친구인데 함께 빠져나가자고 제의했다. 나는 미안하지만 오늘은 일행을 돌보아야하니까 다음 날 만나자고 말하며 그 흔한(?) 루불화를 좀 쥐어주며 어머니께 과자 사다드려라고 했더니 감사표시로 내 손안에 깊은 키스 자욱을 남기고 친구쪽으로 건너갔다.

그녀는 계속 우리들 쪽으로 보고 있는 듯했었다. 나는 기관장에게 자리를 뜨자고 옆구리를 찔렀고 그도 얼른 일어났었다. 기관장은 택시 안에서 말했다. "우리 때문에 선원들이 맘껏 놀지 못한 것 같습니다."

나는 그 말에 동조하며 답했다. "지금부터 그들은 잘 놀겁니다요."

78년 xx월 xx일

약 14일간의 하역작업을 마무리 짓고 출항하다. 관리들은 출국수속을 잘해 주어서 떠나가는 마음을 가벼히 해주었다. 대리점 직원은 LP 음반을 선물로 주기도 했는데 차이코프스키, 라흐마니노프 등 유명한 쏘련 음악가들의 작품이 주로 실려있었다. 내수용이라서 품질이 별로 안 좋아도 기념으로 가지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들이 제일 좋아하는 말보로 담배로써 답례를 했다. 그리고 사무장은 쓰다 남은 루불화를 선원들로부터 거두어서 대리점 직원에게 주고 있었다. 본선은 대략 보름 동안 이곳에 머물고 있었는데 나는 쏘련어로 '고맙다' 혹은 '반갑다' 또 혹은 '좋아한다'라는 기본적인 말도 배우지 못했다. 그들이 영어나 불어 등을 너무 잘 했기 때문이었다.

출항하자마자 사무장은 선원수첩에서 입출항 사증이 찍힌 페이지를 뜯어내리는 일이다. 일부러 뜯어내려고 그들에게 '여기 이 페이지에 스탬프를 찍어 주시오'라고 미리 부탁을 했었다. 물론 입국 수속중 우연히 우리 관리들에게 적성국가에 입항했었다는 사실이 발각되는 날에는 아주 낭패를 보기 때문이었다. 공항에서 곧바로 부근 경찰서로 압송되고 모든 소지품들은 경찰서 바닥에 깔려지고 더욱 화가 치미는 것은 마중나온 가족들이 그 과정에서 경찰서 바깥에서 지쳐서 주저앉는 일까지 발생하는 것이었다고 했다. 기념품을 보고 이것은 뭐냐고 물어오면 '그냥 하나 가지시지요'라고 비굴하게 바치는 일도 다반사였다고 선원들은 말했다.

필자는 이런 경험이 있었다. 서울에서 열차편으로 부산역에 도착하여 출구를 나가기 몇 발자국 전에 '경찰입니다'고 하면서 나를 부근 사무실로 좀 가자는 것이었다. 멋 모르고 따라 들어갔더니, '선원이시죠, 일본 갔다 오셨지오'라고 하면서 신분증을 좀 보자고 하더니만 지갑에서 온갖 것들을 들추어내고서는 주소록 메모까지 보다가 일본 친구 주소와 전화번호를 찾아내더니 묻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누구냐'는 것이었다.

시달리다 못해 할 수가 없어서 가진 돈을 좀 줬더니 물론 간단히 풀어주었다. 하도 황당하길래 내가 일본 갔다온 것을 그 많은 승객들 중에서 어떻게 알아냈냐고 물었더니 일본제 옷으로 알아낸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공짜라해도 일본제는 아무것도 걸치지도 지니지도 안 했다. 경찰은 양민을 '빨갱이'로 둔갑시키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나름대로 착취했고... 그런 모욕을 당하고 '빨갱이'가 안 되는 놈은 바보 아니면 성인군자밖에 없을 것 같았다.

78년 xx월 xx일

발틱해를 빠져나오는 곡물선들 중에서 본선 컨티넨탈S호가 제일 후미 그룹에 속할 것 같다. 한 겨울에는 발틱해도 얼고 주 적재항인 북미 오대호도 얼어붙으니 주로 남미에서 흑해의 쏘련항으로 가는 수가 많다. 11월 발틱해는 흑야 현상으로 어둑 침침했는데 드디어 독일의 킬(Kiel) 항에 닿았다. 여기서 함부르크항의 입구 브룬스뷜텔항까지 약 100Km를 운하로 통과하면 바로 북해가 나오니 덴마아크 북단을 우회하는 것보다 약 500Km를 절약할 수 있고 북해의 바람과 파도도 덜 맞으니까 경제적이다. 운하의 수심 관계로 만선 시에는 이 운하를 통과하지 못하나 배의 깊이(Draft)가 낮을 때는 이 운하를 이용한다. 외항선에서 볼 수 있는 내륙 풍경 중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운하 주변의 목가적인 경치에 배도 선원들도 잠시 낙원의 정취에 젖는다. 마이스터의 나라답게 도선은 물론이고 조타까지 그들이 맡아하니 우리 브릿지 요원들은 '편히 쉬어!'였다.

78년 xx월 xx일

도버 해협을 빠져나오다가 본사로부터 전보를 한통 받았는데 영국 남해안의 브릭스햄(Brixham)에서 하선하여 아르헨티나로 가서 대기하라는 내용이었다. 브릭스햄은 이웃 마을 패인톤, 토퀴 등과 더불어 멋진 해안선을 자랑하고 있었고 호텔들도 해변에 즐비했다. 새벽에 어시장에 나가보니 파시(波市)답게 사람들도 생선들도 싱싱하고 펄펄 살아있었다. 아침 햇살이 반짝이는 부둣가에는 애숭이 세일러가 모자를 비스듬히 쓰고 잭크 나이프도 허리에 차고서는 관광객들의 시선을 끌며 멋부리며 걷고 있다. 부근에는 해적왕 드레이크의 기념 모형선이 계류되어 있었다. 물론 관광객들이 북적였고...

오후에 이웃항 다트머스에서 출입국 관리 한명이 호텔로 찾아와서 입국검사와 세관 검사를 함께 해주며, '최소한 열흘 정도는 관광하고 떠나시오'라고 여유있는 체류기간을 주고 돌아갔다. 저녁 때는 심심해서 그랜드 볼룸에 나가서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춤을 추며 놀고 있는 모습을 멀리 스탠드에 앉아 구경하고 있었는데 그중 일행인 한 중년 신사가 슬거머니 곁에까지 오더니만 자기 처제가 짝이 없으니 파트너가 되어 달라고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나는 서양춤을 출 줄 모른다고 사양했으나 쉬운 포크 댄스라며 자꾸 졸랐었는데 그걸 끝내 사양하고 말았다. 상선의 전통에 선장은 세가지를 잘해야 한다. 하나는 영어, 둘째는 타입라이터, 셋째는 사교춤이었다. 그런데 나는 셋째가 빵점이었다. 다음 날 아침에 커피숍에서 그녀를 만났었다. 다음에는 포크댄스를 조금만 배워오라고 했다. 그리고 그들은 떠났는데 리버풀에서 온 관광버스에 올랐다. 나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며 주었다. 그녀는 푸른 안경을 벗고서 흔들고 있었다. 내일은 부근 페인톤 역에서 런던으로 갈 참이다. 4시간 걸린다고 했다. 런던에서는 얼마나 머물지는 몰라도 자주 온 터이라 빨리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떠나고 싶었다.

78년 xx월 xx일

본사 소속 케롤라인 호를 승선하기 위해 부에노스 아이레스 항구 앞을 흐르는 프라타 강 상류에 위치한 하항 로사리오에서 약 열흘간 대기하고 있는 중이다. 내가 승선할 케롤라인호는 외항에서 선석을 대기하고 있었는데 쏘련에 가는 곡물선들이 남미로 몰려들고 있다고 대리점 직원들은 즐거운 비명이다. 북미는 겨울철이라 오대호 수로는 벌써 닫혀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나서 이과수 폭포를 관광하니 이런 소회가 들었다. '물은 강도 되고 폭포도 되고, 호수도 되고 안개도 되고, 구름도 되고 비도 되고'하니 변화 그 자체라서 고요한 산속과는 퍽이나 대조적이다. 그래서 지자요수(知者樂水)요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는 의미있는 말이 자고로 인구에 회자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양국이 농경국보다 산업발달에 앞섰다는 함의를 지니기도 한다.

어느 교포집에 초대되었는데, 이곳 교포들이 대부분 그렇듯 편물(編物) 제품 사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백발이 성성하신 김 씨 모친은 과년한 딸들의 결혼 문제로 여간 걱정이 아니었다. 딸들이 미국에 가야 남편감을 구할 수 있다고 푸념하시며 배에 좀 실어 데려다 줄 수 없느냐고 하소연 하셨다. 오늘도 내일도 남미의 문양처럼 단조로운 세월을 편물기에 짜넣고 있는 교포들에게 무슨 변화가 하루 속히 찾아와 주길 기원해 보건만 조화의 신은 귀를 귀우릴련가.

역시 편물을 하는 천 씨는 60년대 초 한반도 격변기에 남미 이민선을 타고 이곳에 왔다고 한다. 당시 나는 학생의 신분으로 부산항 중앙부두에서 그들의 환송식에 참석한 기억이 나서 퍽 묘한 인연이라고 여기며 이민에 얽힌 사연 여러 가지를 물어 보았다.

"당시에 이처럼 먼 이민길을 어떻게 떠날 결심을 하셨던지오?"

"뭐, 38 따라지라 별 볼 일 없어 떴디오."

그의 북향 사투리가 아니었더라면 하도 오랜만에 듣는 말이라서 '38따라지'가 무슨 소린지 모를 뻔했다.

"당시에 출항하실 때 '괴상한 쇼'를 하신 것 기억이 나시나요?"

"무슨 '쇼' 말입네까?"

"환송 인파 쪽으로 '엿 먹이는 흉내'랑 '잘 먹고 잘 살아' 등의 욕설(?)같은 것을 퍼붓고 떠났잖습니까?"

천 씨는 머뭇머뭇거리다가 우회적으로 답하며 불만을 퍼트리는 것이었다.

"이곳에 도착해서는 조국의 이민 정책에 유감이 극에 달했었디오. 원주민들은 트랙타나 비행기로 농사를 디었소. 우리는 호미나 괭이, 낫 등으로 농업이민을 왔더랬디오.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오. 간나 새끼들..."

"요사이 생활은 좀 어떻습니까?"

"3~4년 전에 부모님을 모셔왔는디 여태껏 봇짐을 안 풀고 그대로 싸두고 계시디오."

서울 미아리에서 복덕방을 하셨다는 어르신은 이웃과 말 한마디 못 나누며 살아야 하는 아르헨티나 이민생활이 창살 없는 감옥처럼 고통스러웠는지 몸 무게가 20Kg나 줄었다며 한숨 지어셨다. 가지고 갔던 귀한(?) 소주와 거북선 담배의 진한 향내가 좁은 방안에 자욱해지는 가운데 천 씨의 이민 생활에 찌던 말 못할 사연은 실타래처럼 풀려가고 있었다. 프라타 강물만이 알아나 줄까 밤하늘에는 별들마져 낯설다.

"인생이 편물이라면 풀어서 다시라도 짜련만..." 하던 천 씨 아내의 푸념이 나의 귀로부터 가슴까지의 두어 뼘 남짓한 감성회로가 현악기의 줄처럼 피잉 피잉 울리고 있다. 나라 이름 '아르헨티나'라는 말이나 강 이름 '프라타' 라는 말도 은(銀)이라는 뜻을 지닌다. 금광을 캐러 서부개척에 나선 미국사람들은 당연지사라 치고, 은이라도 캐러 지구 반대편에까지 온 한국 이민자들에게 모진 운명같은 편물 인생살이가 무엇인가. 부디 잘 엮어나가지길 천지신명께 기원해 보았다.

78년 xx월 xx일

카롤라인호는 컨티넨탈S호처럼 곡물을 약 3만여 톤 적재하고서 로사리오를 떠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항 앞에서 프라타 강 도선사를 하선시키고 약 보름을 항해한 후 급유항 라스팔마스에 기착했다. 대략 1,500톤의 급유와 또 대략 60일 분의 식료품을 보급 받는다. 이곳은 한국어선 대서양 전진 기지라서 한국 어선원들과 주재원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신선도가 높은 한국 식품과 생선을 구입하기에 안성마춤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선원들은 '쏘련 무역품'들을 구입해야 하기에 좁은 부둣가는 때 아닌 쏘련 특수 바람이 불어 성시를 이루었다. 다른 배들도 마찬가지로 이곳에서 급유하러 입항하고 역시 노점상들로 성시를 이룰 것이다. 우리 선원들은 이런 파시(波市)를 '갈메기 시장'이라고 부른다. 갈메기들은 배가 출항해서 항구가 보이지 않는데도 한참이나 따라온다. 밤이 깊어오고 파도가 높아져오면 울면서(?) 항구로 되돌아간다.

79년 xx월 xx일

배가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고 지중해를 지나고 에게해를 들어서면 곧 터키 해협에 이르런다. 터키해협은 모두 남북으로 약 300Km 정도가 되는데 이 해협은 에게해와 흑해를 남북으로 이어주는 수로일 뿐만 아니라 동서로는 아시아와 유럽이 만나는 교량역을 하는 곳이라 예부터 신화와 전설, 종교와 전쟁의 역사 무대로 유명하기로 유례가 드문 곳이다. 특이한 지세와 물길로 파란만장한 문화가 명멸했던 해협에는 이제 성벽과 기념탑과 그리고 사원들과 관광지들이 당시의 영고성쇄를 말해 줄뿐 물결은 여전히 하염없이 굽이 치고만 있다.

수로 도선사 중에는 우리 선원들이 한국인줄을 알고서 나에게 '자기 아버지가 한국전에 참전했었다'는 것은 보통이고 '참전중 전사하셨다'고 지갑에서 사진을 꺼내 보이는 수도 있다. 실제로 어느 전선에서 터키군이 많이 전사했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통상 나는 아버지 영전에 바치라고 위스키 한 병에 담배 한 카툰씩 드린다. 본선은 잠간 이스탄불 항에 닻을 내리고 대리점이 전해주는 각종 서류와 선원들의 편지를 수령했다.

에게해 바닷물이 한 번 흑해로 흘러들면 되돌아 나오는데 약 5,000년 걸린다고 수로지에 기록되어 있다. 참으로 긴 회유의 바다, 흑해! 안개가 칠흑같다고 그렇게 불리는 미지의 바다 품안으로 서늘한 수온을 온몸으로 느끼며 우리 배는 온몸으로 헤엄치고 있다. 곧 물안개가 몰려들었다. 배는 구름위를 항행하는 느낌이다. 드디어 소식 한마디 없던 모스크바에서 전문이 한 장 날아든다. 내용은 이랬다. "귀선 북위 46도 23분 동경 30도 48분에 위치한 일리체우스크 외항에 닻을 내리고 대기바람."

이 내용을 우리는 즉각 본사에 타전했다. 그리고 우리 배는 드디어 목적지 일리체우스크 외항에 닻을 내렸다. 아르헨티나를 떠나 장장 7,500 해리의 바다를 헤쳐온지 만 24일 8시간만에 종착지에 닿은 것이다. 오데사 항의 신항쯤으로 여겨지지만 곡물선들만 수십척 레이더 망에 나타났고 항구는 전혀 보일 기미조차도 없다. 물론 오데사 항에도 비슷한 척수의 배들이 레이다 화면에 포도송이처럼 나타난다. 이곳 사정에 밝은 그리스 선장들의 무선 통화 내용을 엿들어 보니 한 달 정도는 대기하는가 보았다.

최근 필자가 읽은 외지에 의하면 오뎃사의 신항 일리체우스크는 불가리아 등 발칸반도 나라에 분쟁이 일어나면 탱크 등 기갑장비를 발진시키는 특수선 기지라고 했었다. 한 번씩 오는 큰 바람은 여기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바닷물은 들끓고 뿌우연 김이 무럭무럭 피어나니 그 속에 떠있는 배는 대소를 가리지 않고 마치 연옥의 시련 속으로 빠져 든 모습이다.

그 와중에 보이는 것은 안개와 뱃불뿐이고 들리는 것은 VHF 라디오 통화 소리만 왕왕거리는데 모두들 식수가 바닥났다고 야단법석이지만 쏘련인들은 막무가내다. 본선도 재고량이 바닥나기 시작했는데 급수선은 가뭄에 콩나듯 한 번씩 멀리 비치다가는 곧 사라져 버렸다. 이 때는 비상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대리점에 다음과 같은 전문을 뉴욕에 텔렉스로 좀 넣어라고 전보를 쳤다. "본선 급명간 식수 고갈됨. 일리체우스크항 급수 거의 불가능함. 이스탄불에 회항해 약 200톤 급수 가능 여부 긴급 회답망."

물론 쏘련 대리점은 초안대로 뉴욕에 텔랙스를 중계할 리 만무하다. 심야에 급수선이 난데없이 도착하여 150톤을 급수하였다. 급수선 선원들에게 담배와 콜라 등을 내려 줬더니 굳은 표정들이 풀리고 입이 함지박만 해진다. 귀한 물이라서 얼른 한 컵을 마셔보니 약 냄세가 물씬 풍겼다. 눈치챈 이웃 배들로부터 급수비결에 대해 문의가 쇄도하나 이실직고할 수는 없는 일! 그러나 욧점은 간단하다. '쏘련인들은 뉴욕에 약하다는 사실 하나뿐.'

79년 xx월 xx일

드디어 일리체우스크 곡물부두에 접안했다. 대리점 직원 유리는 영어는 물론 일본어도 잘했다. 나흐도카에 오래 근무했기 때문에 그곳 일대의 한국인 얘기도 더러 했고 김치도 잘 먹어서 초면에 친근감을 느끼게 했다. 우리는 일과를 마치고 상륙했다. 눈이 내려서 제법 하얗게 거리를 덮었는데 한낮이라서 그런지 북위 46도의 겨울치고는 봄날처럼 포근하기까지 했다. 간격이 잘 정돈된 나무들로 울창한 숲속에는 붉은 벽돌로 지은 건물들이 여러 동 옹기종기 모여 항구의 중심지구를 이루고 있다. 우리는 택시를 타고 이웃마을 오데사로 갔었는데 항구가 눈아래 내려다 보이는 오데사 관광호텔 앞에서 차를 내리고 식사부터 하기로 했다.

나는 오데사에 오니 두 편의 영화가 얼른 떠올랐다. 하나는 <오데사 파일,>이라는 존 보이트 주연의 미국 첩보 영화였고 또 하나는 세계 100대 영화에 든다는 명화 <전함 포템킨>이다. 전자는 픽션이지만 후자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쏘련 영화다. 오데사항에 정박중인 전함 <포탬킨 호>에서 일으킨 수병들의 반란과 이에 동조한 오데사 시민들을 학살하는 장면을 주제로 다룬 실화 영화다. 제정 러시아의 몰락에 큰 타격을 입힌 사건을 담은 영화로서 가장 인상깊은 장면 중 하나가 오데사 계단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 장면인데 그 계단이 지금 우리 일행이 식사하는 관광호텔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

식사후 우리는 항구가 눈아래 펼쳐져 보이는 언덕위에서 바다와 항구와 문제의 높고 넓은 108(?)계단 주변을 둘러 보았고 이제는 현대와 되어 에스컬레이터 시설도 갖추어진 계단을 시승도 해보았다. 많은 남녀노소들이 백설에 반사되는 하오의 포근한 햇살을 쬐며 망중한을 보내고 있었다. 젖먹이 손자를 썰매에 태워 끌고 왔다갔다 하시는 할머니, 큰 카셋트를 자랑하듯 들고 다니는 청년, 유명한 사냥개 '보르조이'와 함께 여유롭게 걷는 멋쟁이 부부, 그리고 붉은 완장을 찬 장년들의 모습도 보인다.

나는 유리가 권해서 어떤 소녀와 함께 눈썰매를 타고 언덕을 미끄러져 내렸는데 썰매가 뒤집히는 해프닝으로 함께 눈밭에 뒤굴렀다. 한국 소녀같았으면 깔깔대며 무엇이라 지껄었을 터인데, 유난히 그 어린 소녀는 홍당무가 되어 장갑 낀 두 손으로 낯을 가리고 있었다. '참 순진무구하구나'고 나는 여기고 있었으며 유리는 소녀에게 가서 배에서 가져온 초콜렛으로 무안감(?)을 풀어주고 있었다.

배로 돌아올 때는 택시 대신에 일부러 버스를 타고 오기로 하고 유리와 헤어졌다. 의외로 일리체우스크로 가는 손님들이 많았고 막상 버스에 오르고 보니 앉을 자리가 없었다. 대선배 기관장님과 나는 간신히 몸을 가누며 시골 버스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오는 형편인데 뒤로 돌아보니 기관장 사모님께서는 특별석에 버젓이 자리를 잡고 득의만만한 미소를 짓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 별로 재빠른 분이 못 되시는 분이 어떻게 현지인들을 재끼고 로얄석을 차지하셨는지 궁금하기도 했는데 나종에 알고 보니 그 자리는 차장석이고 차장이 요금을 징수하러 비집고 다니는 동안 아무도 앉지를 못 해서 비워진 그 자리에 모르고 착석하신 것이다.

몸집도 큰 차장은 내 자리니 비워 달라고 말하지 않고 내내 옆에 다소곳이 붙어 서서 부두까지 온 것이니 역시 백성들이 순진한 탓이었을가. 종점에서 본선까지는 탈 것이 없어서 밤이 깊고 어둡고 눈발이 뿌렸지만 그냥 걸을 수 밖에 없었다. 외항에서 대기중 단식을 좀 하느라 보름간이나 뱃속을 비운 뒤라 기력이 소진되었고 영하 10도의 우쿠라이나 벌판을 2Km나 걸으니 젖먹은 힘을 다해 걸었으나 목덜미에서 찬 바람이 술술 불어 나오는 듯해서 고슴도치처럼 털옷에 움츠려 들어서 걷느라 고생께나 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굶었고 갈 곳이 없어서 마냥 걸었더라면 아마도 벌써 쓰러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땅에서 그렇게 쓰러져 갔을 수많은 원혼에게 새삼스레 삼가 조의를 표하는 마음으로 잡념을 거두며 계속 걸어서 드디어 배로 돌아왔다.

79년 xx월 xx일

선원들은 '무역'을 해서 좀 번 돈으로 디스코 바 <아메리카>같은 곳에 가서 술도 사 마시고, 아가씨들에게 술도 사주고 또 눈이 맞으면 어디론가 따라가기도 한다. 여관이 없기 때문에 어디까지라도 방을 구해 따라 간다. 마치 폴란드 작가 마렉 플라스코의 <제8요일> 장면처럼 사방이 막힌 방을 구하기 위해 헤매인다. 공산주의라서 병원, 극장, 레스토랑 등 공공시설은 아주 싸지만 청바지 같은 '개인 기호품'이나 아가씨 같은 '개인 시설'은 20달러 정도를 호가하니 이를 루불로 환전하면 100루불 이상도 되는 금액으로 의사 한달 급료의 절반 정도에 버금하고 빵을 산다면 몇 가마니가 된다고 했다. 뉴욕, 암스테르담, 함부르그, 시드니 등 자유국가에서는 '개인시설'이 웬만한 레스토랑 한 끼 식사비에도 못 미치는 시세로 길거리 쇼윈도우에 전시되거나 호객 거리에 출품되어 박리다매 되고 있다. 인격과 인권 그리고 개인주의와 사회주의와의 함수 관계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인간본성에서 해결되야 할 문제일 것만 같다.

79년 xx월 xx일

부두 정문에 근무하는 세관원이 여성인 경우에는 좀 별도지만 민완 남성 세관원일 때는 간혹 선원들의 위법이 적발되는 경우, 선장실로 연행되어 온다. 오늘은 쏘련 돈 120루불을 몸에 지니고 나가다가 적발된 선원 한 명이 연행되어 왔다. 그러나 나는 그 돈의 출처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대리점으로부터 가불된 돈을 선원들에게 상륙비로 지급합니다." 그런데 세관원은 이렇게 반박하는 것이다. "캡틴, 대리점이 귀선에 전달한 돈은 모두 5루불 짜리뿐입니다. 그런데 이 선원은 10루불 짜리 혹은 20루불 짜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나는 내심으로 깜짝 놀라고 있었는데 그런 암수를 쓰서 블랙 머니를 단속하고 있는 줄을 미쳐 몰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태연히 응수해야 한다. "대리점으로부터 받은 3천루불(5천달러에 해당)은 5루불짜리 화폐로는 부피가 너무 크고, 매수가 너무 많아서 고액권 루불로 바꿨지오."

"캡틴, 어디서 누구와 교환했습니까?"

"알렉산더호 선원들과 교환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음부터는 좀 고액권으로 주십시오."

물론, 알렉산더호는 어저께 밤에 출항하고 없다. 세관원은 닭 쫏던 개처럼 물러갔다. 대리점으로부터 받은 3천루불은 이런 비상사태시 공식적으로 대항하기 위해 보관했다가 출항할 때 도로 반환해버린다. 여기 대리점은 유리가 전담했었고 유리는 우리 편이었다. 어느 날 유리는 나에게 다이아몬드 반지를 갖고 와서 러시아 황실에서 나온 골동품이라며 돋보기로 한 번 자세히 보라고 했다. 나는 해도실에 비치된 돋보기로 반지를 자세히 보니 제작자의 이름도 음각되어 있고 데자인도 전혀 자본주의 시장 상품같아 보이지 않아서 사기로 했었다.

레닌그라드의 유태인에게서 산 예수와 마리아 아이콘을 당시 영국에 도착했을 때 전문가에게 보였더니 진짜가 맞고 이런 것을 일반 관광객들이 쏘련 암시장에서 사서 자동차에 싣고 국경을 넘으면 숨겨놓은 곳까지 미리 알고서 바로 세관이 압수해 가는데 이는 팔아서 숨겨준 자가 바로 세관에 신고했기 때문이지만 배에 실어서 오면 그렇게 하기 어려워 무난히 가저나올 수 있다고도 말했다. 유태인 드미트리가 핸 말이 다시 생각났다. "켑틴, 쏘련만큼 돈 벌기 좋은 나라도 드물거고, 아마도 쏘련 만큼 돈발이 먹히는 나라도 없을 겁니다."

80년 xx월 xx일

출항하기 전날 밤 부둣가 '선원 클럽'에 나가서 이른바 '출항 신고'를 했다. 무희 소냐는 음악과 조명에 맞춰서 춤을 췄는데 구색도 다양하고 이색적이고 과연 이국적이었다. 특히 그녀의 우크라이나 민속 춤사위는 선원들 눈길을 독차지했다. 유리는 내게 말했다. "캡틴, 언젠가 시절이 좋아지면 볼가강 뱃길 여행이라도 한 번 오십시오." 나는 관심을 표했다. "볼가강 가항거리는 총 얼마나 됩니까요?"

유리는 대답을 척척 했다. "본류는 3,700Km,입니다만, 모스크바-볼가강 운하, 볼가강-돈강 운하, 볼가강-발트해 운하 등이 건설되어, 볼가강은 카스피해 ·흑해 ·발트해 등을 잇는 내륙수로로서 볼가강 본·지류를 합치면 1만 7000km의 가항수로로서 세계 최장입니다."

나는 속으로 헤아려보았다. 세계 최장의 하나인 '강의 아버지' 미시시피강이 최대 7천Km라고 해도 만Km가 남아 도는구나. 진짜 세월이 좋아져서 직접 여행하며 '볼가강의 뱃노래'를 그들과 함께 합창해 봤으면 하는 희망사항이 심중에 뭉클 했다. 유리는 나에게 소련 색갈로 무늬가 그려진 숟가락 하나를 선물로 주었다. 나는 속으로 여겼다. 어디 가서도 밥먹고 사는데 신경쓰지 않기를 바란다는 의미일거라고. 우리는 마지막으로 서로 'Good Luck!' 'God Speed!' 라며 술잔을 부딪히며 건배를 들었다. 그리고 헤어졌다.

80년 xx월 xx일

간혹 선원들은 선내에서 생긴 일을 관계기관에 투서할 때가 있다. 뉴욕 본사에서 부쳐온 투서의 내용은 이랬다. "일등항해사의 처가 소련의 미장원에서 머리를 파마했고 선장의 허가없이 시내를 돌아 다녔는데 무슨 짓을 했는지 의문스럽다."

다분히 개인적인 감정이 아니면 비뚤어진 반공사상 때문일 것 같았다. 하기야 배가 홍콩에 입항하여 급수를 했어도 수원지가 중공쪽에 있다는 구실로 선장이 고발 당하는 사건도 있었다. 북풍이 불어 올 적에는 남한에서는 호흡도 정지해야 한단 말인가. 이 모든 병폐는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우리들 세포 속에 자리잡은 DNA 때문일가. 세계에 우리 같은 분단국가는 유일(?)하다지만 우리 남쪽은 이제 민란이나 사화(士禍)같은 것이 없어졌기에 다행이라 여긴다.

80년 xx월 xx일

휴스턴 항에서 만선하여 출항한 이후 끝없이 이어지는 많은 바다들을 건넜다. 허리케인의 바다 걸프 만을 건너고 헤밍웨이로 유명한 미국의 최남단 키 웨스트 섬을 돌아서 걸프 해류를 타고 그리고 버뮤다 삼각지에 이르러서 본격적으로 대서양 횡단에 들어갔었다. 이즈음 기관장 부인께서 선장실로 전화를 걸어 오셨다. "김 선장, 여기가 버뮤다 삼각지라면서요. 괜찮겠습니까?" 나는 이렇게 되물었었다. "버뮤다 섬은 멀리 보이는데 버뮤다 삼각지는 뭡니까?"

그분은 무슨 말인지를 아시고 전화를 끊어셨다. 배는 수영 선수로 치면 배영만은 제외하고서 온갖 영법을 구사하며 필사의 헤엄질로 북대서양의 황파를 헤쳐나갔다. 높은 파도와 함께 혼신으로 바다의 품속에 쓰러졌다가 또 파도처럼 바다속에서 기어나오기를 기승전결도 없이 계속 반복했었다. 폭풍이 지쳐 바다속으로 가라앉을 때까지 우리 배는 그런 항해를 무심한 세월과 함께 지속 하였다. 뒤돌아 보면 포말로써 얽히고 ?朝? 항적(航跡)에는 세월의 뒷모습이 썰물처럼 밀려가고 있다.

배가 항해를 해서 대서양을 건넜었는지 세월이 가서 배가 대서양을 건넜었는 지가 헷갈리는 경우를 항해자들은 깊히 경험하지만 자고나면 아무런 회상도 없는 것이 우리네 선원들의 마음속 풍속도로 자리 잡았다. 캐롤라인호 브릿지(항해실) 높이에서 보이는 수평선까지의 평균 거리는 약 10해리(18.52Km)가 된다. 총 항정이 7,000해리라 한다면 700번의 수평선을 넘어야 목적항에 닿는 다는 계산이 된다. 어릴 적 바닷가에서 수평선 너머를 무던히 동경도 했었다. 이제 항해자가 되어 그 수평선을 헤일 수 없이 많이 넘었는 데도 또 넘어야 할 수평선이 수없이 내 앞에 놓여 있다.

수평선에서 뜨고 다시 수평선으로 지는 것이 항해자의 삶이다. 알고 보면 도시인들도 모두 마찬가지가 아닐가. 해가 지평선에서 뜨고 다시 지평선으로 지는 것처럼 인생도 그런 반복이지 아닐가 한다. 그런 속에서 삶의 연륜이 쌓여 간다고 여겨진다. 배는 어느듯 지중해 입구에 접근하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로마 신화에서 헤라클레스가 여신 헤라의 미움을 사고 큰 모험을 떠났다. 그런데 지중해를 빠져나가는 길목이 거대한 바위들로 막혀 있었다. 그러자 헤라클레스는 맨손으로 그 바위들을 다 찢어 버리고 길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바위들을 양쪽으로 내던져 지중해를 지키게 했다. 그리스인들은 헤라클레스의 이름을 따서 그 바위들을 헤라클레스의 기둥이라고 했는데, 이 헤라클레스의 기둥이 현재의 지브롤터 항구 입구의 헤라클레스 산인데 한 면은 깍아지런 돌벽이다. 해협 오른쪽에도 이름 모를 검은 북아프리카의 산맥들이 높이 솟아 보이는데 나무 한포기 보이지 않는 돌산 연봉이라 으스스하다. 수로지에 의하면 본래 해협은 붙어 있었고 지중해는 사막 혹은 계곡이었는데 몇 백만년 전에 이 해협이 지각운동으로 열리면서 대서양 물이 폭포처럼 몇 백년을 흘러들어서 지금의 지중해가 되었다고 한다. 하기야 알프스도 원래는 바다속이었다니 세상에 정해진 것은 없다. 있다면 인간이 만든 규정과 명칭 그리고 고정관념이 있을 뿐이지 않을가.

저 멀리 탄지에르 항의 하이얀 집(Casa Blanca)들이 정겹게 시야에 들어오는데 무어(Moor)인들이 지나가는 배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을 성 싶어진다. 선원들은 될 수 있는데로 대서양 소금끼는 대서양에서 털어버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비눗물 작업에 바쁘다. 우리 배는 다시 에게해와 터키해협을 지난다. 역사의 굴곡만큼이나 물굽이도 복잡다난한 바다. 알고 보면 세상에 어디 안 그런 곳이 있겠으랴만….

80년 xx월 xx일

23일 간의 항해와 7일 간의 외항 대기를 마치고 흑해의 중앙 북부에 위치한 노보로씨이스크 항 곡물부두에 닿았다. 이곳은 5대 쏘련 영웅도시 중 하나라 한다. 항구 입구의 큰 석회석 산이 통째로 깍여서 부근의 시멘트 공장으로 옮겨지는 것으로 봐서 '새 러시아'라는 항구 이름이 격에 어울리는 듯했다. 이곳도 쏘련 어느 항과 마찬가지로 작업 우선 순위 제1호는 역시 양곡 하륙 작업이다. 곡물 작업 인부들은 정월 초하루도 없고, 밤낮도 없고, 그리고 혁명기념 일도 없었다. 그만큼 그들의 곡식 사정이 안 좋은가 보았다. 어릴 적 교과서에서 우크라이나 평야는 곡물이 많이 산출되어 주 수출품이라고 배웠는데 지금은 달라도 너무 달라진 풍경이다. 오후에 작업인부 한 사람이 화물열차에서 일하다가 곡물 속에 파묻혀 죽었는데 그들은 간단한 현장 검증을 마치고 싣고 가 버렸다.

"유가족은 몇이나 됩니까?"

"보상 문제는 어떻게 됩니까?"

그러나 어느 한 명도 입을 떼지 않았다. 부두 앞 광장에는 모범 노동자들의 대형 사진들이 수없이 정렬되어 있었다. 오늘 죽은 노동자도 거기에 포함되는 걸가. 붉은 깃발더미의 물결속에서 한 장의 사진이 되어 유명(幽明)을 달리하고 있을까. 선원들은 인부들이나 장삿꾼들에게 온갖 것들을 판다. 문제의 청바지를 비롯하여 양담배, 시계, 계산기, 달러화 등, 심지어 허리 띠까지 빼서 판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 선원들에게 별로 팔 것이 없다.

흑해에서도 어찌된 셈인지 발트해처럼 물고기 한마리도 잡히지 않는 모양이었다. 생선이 없는 바다는 사해이지 않는가. 때때로 곡물 검사차 승선하는 여인들이 통조림과 보드카를 몸속 깊숙이 숨겨 들어와 선원들과 은밀히 거래하는 수가 있는가 보다. 그런 술과 안주를 밤 늦은 시간에 좀 맛보라고 갖다 준다. "캡틴, 식기 전에 별미로 좀 들어 보시지요."

나그네가 객지에 닿으면 그 땅 주모가 권하는 술부터 우선 맛을 봐야 그곳 인심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이건 스타일이 좀 다르다. 그러나 별미라니까 술 한 모금에 안주 한 점을 목안으로 넘기며 항구의 풍물을 상상해 본다.

80년 xx월 xx일

아침부터 쏘련군 4명과 대리점 직원 1명이 승선하였다. 그들은 착석하자 곧 장교 한명이 '경고문'을 낭독하고 대리점 직원이 이를 통역했다. 내용은 이러했다. "간밤 자정에서 새벽 1시 사이에 본선의 승하선 현문(舷門)을 지키고 섰는 당직 군인에게 선원들이 빈 맥주 깡통을 수차례에 걸쳐 창문을 통해 던졌다. 이는 붉은 군대에 대한 모독 행위로서 엄중히 문책한다."

그리고 문제의 경고문을 내 책상위에 올려놓는다. 참 놀라운 일이다. 증거물로 깡통 3개를 제시하고 어느 창에서 투척됐는지를 설명하며 잡아내서 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선원들이 상륙금지라는 한국정부측 지시를 위반한 사실도 뉴욕에 통지한다고 했다. 선원들은 세계 각지로 돌아다니며 별의 별 사고를 연출하지만 정작 이런 일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가 난감해진다. 술김에 반공사상이 충동질해서 적군(赤軍)에게 빈 깡통이라도 던지는 의거를 결행했단 말인가. 단순한 주사(酒邪)인가.

수없이 많은 서부극을 보았어도 뒤에 숨어서 남에게 총질이나 '돌팔매 짓'을 본 기억이 없다. 나는 그들에게 선원의 행실을 거듭 사죄하고 곧 '공식사과문' 을 제출하겠다고 약속하며 간신히 돌려 보내는데 성공했다. 대리점 직원 이반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상의했더니만 역시 '선물'을 좀 납품하는 선에서 마무리 지어야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가능하겠느냐고 걱정했더니 자기와 사무장에게 맡기라고 했다. 사무장이 이반과 함께 감시병 초소로 가서 '선물'과 '사과문'을 바치도록 하였다. 노익장 기관장님께 사건 내용을 말씀드렸더니 평하시는 말. "만약 미국에서 경찰에게 그랬더라면 경고문이나 전달하고 갔겠소? 창문이 당장 박살났거나 선원도 안 다쳤다는 보장이 어디 있겠소?"

옳으신 말씀. 그들은 대통령으로부터 거지에게까지 걸핏하면 총기를 난사해대는 습성을 가졌기에 하는 말이다.

80년 xx월 xx일

오늘은 레스토랑에서 쏘련인들과 약간의 시비곡절이 있었다. 쏘련에서는 암달러 상과 환전할 때 야바위에 특별한 주의를 요한다. 예를 들면 레스토랑에서 환전을 할 때 그들은 일단 화장실로 가자고 하는데 따라가는 것까지는 좋은데 100달러를 건네주고 400루불을 받을 때 갖은 잔 재주를 부려가면서 루불화 수량을 속인다. 쏘련 지폐는 우리나라 복권 크기만 하고 반면에 그들의 손 크기는 우리들 손 두 배 가까이 크니까 쏘련 야바위꾼 손에 든 루불화는 마치 우리나라 노름꾼 손 안에서 노는 화투장 신세처럼 된다.

예를 들면 이렇다. 100달러를 보여 주고 400루불을 받는다 치자. 헤아려 보면 350루불이 된다. 그는 이상하다고 하면서 자기가 헤아려 확인해도 350루불이다. 그는 그 돈을 우리에게 주고서 포켓에서 50루불을 꺼내서 400루불을 채웠다고 하지만 실은 역시 350루불이다. 왜 그럴까. 350루불을 확인하고 더 가지러 간 손은 이미 350루불에서 50루불을 때어내서 포켓속으로 들어갔지 빈손으로 돌아가 자기 돈 50루불을 새로이 가지고 나온 것은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속임수가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는 것이 선원들의 공통된 경험이었다. 그는 야바위꾼이 아니고 프로 마술사로서 무대를 레스토랑 화장실에 차린격이 된다.

그러나 이건 약과인 사건이 있다. 우리 선원 한 사람이 테이블 위에 카메라를 얹어놓고 있었는데 어떤 녀석이 지나가다 그 카메라를 덥석 집었다. 순간 우리 선원이 놈의 카메라 잡은 손 위를 덮쳤다. 이러할 땐 놈의 손은 카메라를 놓는 법인데 계속 놓질 않았다. 곁에 여인들이 놓으라는 소릴쳐도 결코 놓질 안 했는데 건너편에 가족들과 식사하던 신사 한 분이 건너오셔서 맥주병으로 놈의 머리를 퉁하고 치니 비로소 손을 놓았다.

여기 맥주병은 우리 나라 맥주 병 보다 훨씬 크다. 이와 비슷한 '덮치기'는 다른 나라에 가도 더러 있다. 그러나 여긴 명색이 휘황찬란한 샹드리에가 비치는 레스토랑이 아닌가. 한 때 우리나라에 '다와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알고 보니 이 말은 쏘련 말이고 그 전형을 우리는 '카메라 덮치기'에서 본 것이다. 레스토랑에 들어 올 때 손님들은 외투나 모자 같은 것들을 입구 보관소 직원에게 맡기고 표를 받는다. 나는 외투와 모자를 맡겼는데 직원은 외투에 걸고리가 없다는 트집을 잡았다. 5루불을 줬었다. 나갈 때 표를 건네고 외투와 모자를 받아보니 이번엔 모자에서 알프스 등반 기념메달이 사라졌다. '다와이' 당한 것이다. 돈을 주면서 되돌려 달라고 하려다 손님들이 많아서 그냥 나왔다.

80년 xx월 xx일

좀 나와 달라는 연락을 받고 대리점(Inflot) 사무실에 들렸다. 인플롯 선박부 사무실은 대낮인데도 어둑어둑했다. 벽은 두껍고 창문은 작고 조명시설은 열악하고 사용하는 용지들은 마분지(馬糞紙) 색깔이어서 흡사 '막심 고리키(처참함의 뜻)'의 옛서재에 들어 선 것 같았다. 그런데 한쪽 구석에 우리 배 선원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저 친구가 여길 왠 일일까?'하고 있었는데 직원 이반이 어디서 서류 한 장을 들고 와서 보여주면서 말했다. "캡틴, 다름이 아니오라 저 선원이 쏘련 여성과 함께 있다가 '매춘 방지 특별법'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물론 외국선원이라 별일이 없지오. 여기에 서명해주시고 신변을 인수해 가시면 됩니다."

나는 형무소에서 출감자라도 맞이해 나오듯, 그를 데리고 '고리키의 서재'를 나왔다. '공산주의 순결'로부터 추방되는 '자본주의 탕아'를 인수해 나오는 마음은 착잡하기만 했다.

"어떤 여자였는가?" 나는 물어 보았다.

"레스토랑 Black Sea(흑해)에서 만났는데요… " 그는 계속 머리를 긁적거렸다.

"어디서 잡혔지?"

"여자 아파트에서 붙잡혔습니다."

"누구에게 잡혔나?" 궁금해 계속 물었다.

"붉은 완장을 두른 청년들 5~6명이 현관 문을 두들기며 들이닥쳤습니다."

"아가씨는 어떻게 하던가?" 제일 궁금한 점이다.

"꽝꽝거리는 소리가 나자마자 '나한테 돈 줬다는 소릴 하지말아 달라'는 다급한 시늉을 짓고는 문을 따 주었고 계속 울면서 일용품을 챙겼고 그리고 어디로 따라 갔습니다."

아가씨는 어디로 끌려갔는지 궁금했다. '차마 시베리아로 유배 당하지는 안 했겠지'하고 그녀의 불운을 마음속으로 위로해 주며 배로 돌아 왔었다.

81년 xx월 xx일

노보로씨이스크 항을 떠나온 이래 다시 곡물을 실으려 미시시피 강의 하항 뉴올리온즈로 왔다. 미시시피강은 올 때마다 마크 트웨인(1835~1910)을 떠올린다. 그의 작품 '톰 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 등은 그 배경이 항상 이 강가였다. 그는 젊은 시절에 이 강의 수부였다가 27~8세 때 강의 도선사가 되었는데 본명 사무엘 랭혼 클레만스 대신에 '마크 트웨인(Mark Twain)'으로 개명을 했다. 선원으로서 이 필명의 사연이 재밌다. 당시는 강이 완전히 준설되지 않고 수심측정기도 없어 수심을 수작업으로 측정해가면서 다녔는데 수부가 선수에서 무거운 추가 달린 잣줄을 강물속으로 던져서 수심을 재고 브릿지에 큰 소리로 알렸다. 'Mark 10(수심 10자요)!' 혹은 'Mark 20(수심 20자요)!'

이것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마크 트웨인'을 필명으로 해서 많은 글들을 썼다. 추사(秋史), 석정(石井), 만송(晩松)이란 작호 문화와는 많이 다르다. 헤밍웨이 나 윌리엄 포크너도 미국 문학의 아버지라고 칭송했던 인물이며 <인간이란 무엇인가> 등의 후속작품들을 계속 발표했었고 여성인권운동과 노동운동, 노예제도 철폐 운동에도 참여한 선각자였다. 차제에 그가 남긴 멋진 글을 몇 줄 소개 해 본다.

"장의사마저도 죽음을 슬퍼해줄 만큼 훌륭한 삶을 살아라."

"인간은 달과 같아서 누구나 어느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면이 있다."

"잊지 못하는 것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침대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장소다. 80% 이상의 사람들이 거기에서 사망한다."

"교육은 알지 못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지 않을 때 행동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필자는 마지막 줄이 마음에 든다. '마크∼ 20' 이후 미시시피의 하상은 계속 준설되어 이제는 '마크∼ 40', '마크∼50' 하는 시대가 되었고 몇 만톤 급 선박들이 몇 천Km를 소강하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수심 대신에 수십 피트 높이를 자랑하는 '뉴올리온즈 대교들'이 대형선의 마스트에 걸리는 일이 발생하여 공심(空深)을 신경써야 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수로 상황도 변했지만 민심 또한 많이 변한 듯하다. '톰 소여'나 '허클레이핀'이 뛰놀았었던 강둑에서, 한국 선원들이 산책나왔다가 이웃마을 흑인애들의 총격을 받아 피살당하기도 했다고 이곳 한국 선식품업자가 말한다. 권총 강도가 출몰하여 이웃배에 침입하여 선장실 금고를 털어가기도 했다고... 밤이면 으시시한 기분이 감도는 미시시피강에 한국인 보부상 부부가 배에 올라와 비타민이나 화장품 등을 파는 선물가게를 열었다가 몇 점을 팔면 또 다른 '이웃 장터'를 찾아서 둘러매고 가는 용감하달가 애잔하달가한 풍경도 벌어진다.

우리 일행은 재즈의 본고장 버본 스트릿에 바람 쐬러 나갔다. 복잡 다난한 역사의 흔적은 지금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거리에서도 프랑스를 느낄 수 있는 프렌치 쿼터(French Quater)가 있다. 2백여 년전 귀부인들이 흰 장갑 낀 손으로 창을 밀어 올릴 것 같은 발코니가 있는 건물들. 그 발코니에서 흑인 음악가들이 재즈를 연주하고 있다. 흰 양복에 구리빛으로 번쩍이는 악기들 그리고 땀들이 송송 맺힌 흑인 악사들의 하이얀 잇빨들이 재즈를 물고 늘어진다.

루이 암스트롱(1901~1971)을 연상케하는 트럼펫 연주자의 모습이 퍽 인상적이다. 거리는 그의 대표곡 '놀라운 이 세상(What A Wonderful World)' 그대로였다. 재즈클럽에 들려서 한 잔의 위스키로 여독을 풀며 호화찬란한 눈요기로 환상속으로 빠져들었다. 귀에 익었으면서도 마음이 과히 들뜨지 않게, 그러나 몸은 리듬을 타게 만드는 재즈곡이 이어졌다. 그날의 분위기에 따라, 연주자에 따라, 관객에 따라 색이 미묘히 달라지는 재즈의 매력에 심취하였다.

미국에서 밤문화가 가장 찬란한 도시가 버본 스트릿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자유분방 그 자체였다. 뉴욕의 타임 스퀘어는 밤거리가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강가로 나가 레스토랑에서 이곳 명물 생굴 회를 먹었다. 미국은 한국에서 굴을 수입한다고 했는데 혹시 우리가 먹고 있는 굴이 한국의 청정 해역에서 생산된 수입굴이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먹었다.

81년 xx월 xx일

미시시피강을 타고 내려온지 26일만에 흑해 연안의 그루지야 쏘연방의 바투미 외항에 도착하여 닻을 내렸다. 코카사스 산맥의 연봉들이 멀리 북동쪽으로 위용을 떨치며 뻗어있고 남쪽으로는 터어키 영토가 보인다. 터어키 영토는 지중해 동부로부터 터키 해협을 건너서 다시 흑해 동부에 이르기까지 면적이 상당히 넓다. 우리 남한의 8배고 일본의 두배가 된다. 또 멀리 내륙 깊숙하게는 노아의 방주로 유명한 아라랏 산(해발 5,167m)의 장엄한 영봉이 아르메니아인들의 한 많은 사연마냥 구름에 가려져있다. AD 300년경에 아르메니아는 기독교를 세계 최초로 받아드린 나라이고, 우리가 닿은 그루지야는 세계 두 번째로 받아들인 나라다.

대리점이 일주일 가량 외항 대기라는 연락을 해서 우리는 '열중 쉬어'에서 '편히 쉬어' 자세에 들어갔다. 이 일대는 종교뿐만이 아니라 신화로도 유명한 곳이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프로메테우스 신은 신들의 왕 제우스 몰래 불을 훔쳐 인간에게 내어준 죄로 코카사스 산의 바위에 쇠고랑 줄로 매여서 매일 독수리들에게 간을 쪼여 먹히는 무시무시한 형벌을 받는다. 그 반면에 인간들은 문명을 밝히게 되었다고...

또 고대 그리스 전설에 의하면, 영웅 이아손과 함께 '황금양털'을 구하기 위해 '콜키스'로 떠난 50명의 영웅들을 태운 배를 '아르고' 호라고 하고 '아르고 배의 선원들'이란 뜻으로 아르고나우타이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콜키스는 그루지야 왕국을 말하고, 황금양털은 콜키스 왕국의 보물 키소말로스라는 날개 달린 황금빛 양 털가죽으로서,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이 지방의 시냇물에는 사금이 많아 물에 양털을 씻으면 사금이 붙어 황금색으로 변한 것이 유래일 것이란 설이 있다. 실제로 이 지역 양 방목은 자고로 유명하다. 그리고 아르고나 이타이를 영어로 Argonaut이라 표기하는데 우주선 Astronaut에서 Astro는 우주의 뜻이고 naut은 항해의 뜻이니 Astronaut은 우주비행사라는 뜻이 되는 데 그 유래가 '아르고 배의 선원들(Argonaut)'에 있을 것이다.

또 그루지아 전설은 우리나라 금강산에 얽힌 전설과 비슷한 점도 있기도 한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신이 세상을 만들 때 가장 멋진 산천계곡과 아름다운 초원을 한 아름 품에 안고 이곳을 지나치다 코카사스 산자락에 발이 걸려 앗차 했는데 이때 조금 떨어트린 땅이 이곳 그루지야란 것이다. 이곳은 흑해와 카스피해 중간에 위치한 관계로 코카사스 3국, 즉 그루지야와 아르메니아 그리고 아제르바이잔은 지리학적으로 요충지라서 그만큼 주변의 강국들로부터 시련을 많이 받은 다양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심지어 몽골이 13세기경 이곳을 침략해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이웃 터키의 쿠르드족은 인구가 코카사스 3국을 다 합친 것 보다도 많지만 나라가 없는 설음에 북받혀 있다. 나는 뉴올레안즈에서 이라는 영화를 보았었다. 터키 군사 정권에 의해 탄압 받는 쿠르드족 영화 감독 일마즈 귀니(Yilmaz Guney)는 정치범으로 수감된 감방에서 제자 세리프 고렌(Serif Goren)에게 지시하면서 5명의 죄수들의 사연을 통해 자국의 혹독한 정치, 사회상을 고발한 문제의 <욜 Yol>을 완성했으니 이 방면에서 세계 최초의 일일것 같다.

이 영화는 칸 영화제에 출품돼 황금종려상, 심사위원특별언급상 등 3개 부분을 석권해 세계적인 화제작으로 등극했다. 화면 전체에서 느껴지는 쿠르드족에 대한 정치적 문명적 박해와 억울한 모순, 문화적 이질성에 대한 충격과 연민으로 눈시울이 뜨겁게 적셔졌었다.

쏘련항에서는 거의 처음 보는 크루즈선들이 들락거리는 것으로 보아 관광지로 보이는 바투미항, 밤에는 해안 초소에서 발사되는 강력한 서치라이트의 조명으로 부근 해안 일대는 나무 한포기 돌멩이 하나까지도 다 드러나는 모양새인데 이는 터키와의 국경선이 바로 인접거리에 있어서 밀항기도를 봉쇄하려는데 목적이 있는가 보인다. 밤안개 속에서 물새때들의 울음소리와 함께 어선의 뱃불이 캔버스에 물감처럼 번져오더니 곧 그 속에서 시커먼 소련배가 흑백 TV속의 실루엣처럼 나타난다. 멸치잡이 배로 보인다. 순식간에 생선 비린내와 물새들 울음소리 그리고 휘황한 뱃불이 뒤엉켜 아수라장을 이루더니 팽팽히 시위먹은 그물이 멸치때를 터질 듯이 껴안고 갑판위로 쓰러진다.

갑판은 온통 반짝거리는 은색으로 넘쳐흐른다. 무표정한 쏘련 어부들은 엉겨드는 물새들에 고개를 이리저리 내저어도 그 와중에 우리들에겐 곁눈질 한 번 안 준다. 흑해에도 멸치는 사는구나고 신기해 하는 순간 멸칫떼는 벌써 재빨리 옮겨갔었고 어선과 물새들은 휘감기는 안개속으로 다시 사라져 버렸다. 흑해에서 본 유일한 어선이고 어로 작업이었는데 안개 땜에 올바로 못 본 셈이다. 다시 무료함이 한배 가득히 실려온다. 물에 갇히고, 안개에 묻히고, 쏘련에 닫히고…

쏘련 정부는 많은 반체재 인사들을 소위 '정신병원'에 입원시켜 감금했다. 영미인들은 이러한 정신병원을 'Sailor's Silent Hospital'이라 표현했다. 이 말이 대단히 쉽게 가슴에 와닿는 상황에 처해 있어서 나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안개가 걷히고 하늘에 별이 하나 둘 뜨는 바투미항의 초저녁, 해안 초소의 서치라이트들이 다시 장대처럼 일어나 나타난 적기라도 떨어트릴 기세를 부리다가 잔잔한 해면과 이웃 해안과 우리 선체까지도 훑어댄다. 대단히 반갑잖은 불빛 세례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모처럼 영화를 한편 보고 있는데 당직사관이 전화가 왔다. "선장님, 경비정이 와서 고함소리를 내지르고 있습니다."

나는 아주 궁금해 하며 갑판위에 나와 본적 고함소리와 함께 경비정 병정들이 금새라도 우리 배위로 뛰어 오를 태세이다. 무슨 일일까? 오염물질이라도 유출시켰는가, 그것도 아니다. 밀항자 혹은 탈출자가 우리 배에 침입이라도 했단 말인가. 그런 것도 물론 아니다. 나는 선원들에게 탑승 트랩을 내려 그들을 배에 오르게 했다. 한 무리의 병정들을 이끌고 붉은 군대 장교 한 명이 드디어 나에게 닥아와 빨리 나더러 뱃머리 쪽으로 함께 가보자고 재촉하는 몸짓이었다. '그래 가보자'하고 따라가 본적, 서치라이트가 초점을 맞춘 선체 외판 일정 부분에 이상하게도 물자욱이 수면에서 갑판까지 얼룩져 있었다.

누군가가 이리로 헤엄쳐 와서 갑판위로 기어올라 왔다는 것이 틀림없다는 주장이며 우리 선원이 협조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나는 배가 입항했을 때의 훗일을 감안해서, 그에게 의심나는 곳을 열어 보이겠으니 맘껏 찾아보라고 허락했다. 그들은 쏘련 말로 '어서 나오라'는 회유와 협박과 공갈들을 한참이나 쏟아내며 선내 온갖 곳을 들쑤시고 다니더니 결국 작전상(?) 철수했다.

나중에 일등항해사가 사건의 진상을 내게 보고하였다. "선원 한 명이 바닷물 몇 바켓을 퍼올려서 외판측에 뿌렸다고 합니다. 물론 장난 삼아서 했는데 이렇게 큰 소란이 될 줄 몰랐다고 사죄합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장난 아이디어치고는 꽤 재밌군."

영화 (의사 마드의 시련)이란 실화 영화를 얼마 전에 본선 영사실에서 본 적이 있다. 의사 마드는 어느 날 밤 다리를 뿌러트린 급한 환자가 찾아들어서 치료를 해줬는데 이 환자가 바로 링컨 살해범 존 윌 키스 부스였다. 이 사실로 끝내 미국판 '악마의 섬' 포트 제퍼슨 형무소에 갇히게 된다. 플로리다 열도의 끝 섬이 헤밍웨이가 살았던 '케이 웨스트'이고 더 이상은 사람이 사는 섬이 없는 줄만 알았는데 걸프만 쪽으로 외로운 섬 Dry Tortugus에 '살아서 못 나오는 형무소'가 하나 있었다. 이 일대를 많이 통항 했었는데 영화를 보고 처음 알았다. 의사는 아내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탈출에 성공, 부근 부두에 정박한 배의 어수룩한 덤불에 몸을 숨겼지만 추적자의 대검에 찔려서 흘러나온 유혈로 발각되고 재수감된다. 오늘 이런 애틋한 사연의 탈주자가 배에 숨어든 것이 아니고, 사실은 '늑대와 소년' 비슷한 장난이었단다. 탐조등은 밤새도록 우리 배에 고정되어 있을 모양이다. "오늘밤엔 왜 안개들 마져 안 모여들지?" 나는 푸념하고 있었다.

81년 xx월 xx일

드디어 바투미 곡물부두에 접안했다. 선원들은 바쁘서 적재항에서는 거의 상륙을 못 했으니 정식으로 땅을 밟아보기는 두 달만이다. Seamen's Club(선원 클럽) 버스를 대리점이 수배해 주어서 그 편으로 근교의 식물원에 가서 숲이 내뿜는 산정기를 한껏 심호흡하고, 맑은 계곡물에 내려가서는 '간까지 빼내서 씻는 기분'으로 손과 얼굴을 씻었고 마음속에 절은 소금끼도 충분히 빼냈다. 그루지아는 해발 5,600m가 넘는 코카사스 산맥과 해발 5,000m가 넘는 아라랏 산의 중간 지대지만 지표면이 상당히 낮은 지형 지세라서 강과 특히 계곡이 많은 나라라 했다.

안내원 올가 양은 설명했다. "이곳 광천수는 외국에 수출되고 있습니다."

선원들은 물었다. "광천수 이외에 또 무엇이 유명합니까?"

그녀는 포도주라고 말했다. 물론 선원들은 '얼씨구, 좋아라' 하는 눈치였다.

선원들은 신이 나서 계속 물었다. "또 유명한 것은 무엇이 있습니까?"

그녀는 한참 있더니 답했다. "우리에게 도움이 전혀 안된 사람 스탈린이 저 산 넘어 '고리' 출신이랍니다."

우리는 한동안 어안이 벙벙하였다. 그녀는 잘못 대답했구나하는 눈치를 보였다. 그리고 화제를 바꿨다. "이 곳에는 백세 이상 노인들로 구성된 합창단도 유명하지오."

우리는 정말? 정말? 하면서 숲속을 따라다녔었고, 올가 양은 하이얀 초롱꽃 이 핀 야생란을 흙채로 파서 풀줄기로 감싸서 주며 배에서 키워 보라고 했다. 그리고 식물원 입구에서는 직원들 눈에 띄지 않도록 잘 감춰라고 일러주었다. 숲속엔 동백나무에 차나무도 보여서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올가 양은 '차'라고 말했다. 중국에서 온 야생 차나무라고 물으니 그렇다고 답했다. 여기 말로도 '차'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답했다. 아마도 실크 로드를 따라 들어 왔으리 라고 여겨졌다. 저녁 무렵에 올가 양은 우리를 바투미 관광호텔 앞에 내려다 주고 돌아갔다.

일행은 호텔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식당 규모나 종업원 수에 비해 메뉴가 별로인 것은 바투미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선상에서 매일 먹는 냉동 식품보다 싱싱한 샐러드에 구미가 당겨서 많이 먹었다. 양념은 우리처럼 마늘도 있고 파도 있고 맵사그레한 새싹들과 고추도 있어 입안을 개운케 했고 특미 케비아와 훈제 생선들은 쏘련항 어디에서도 나오지만 여기는 부근의 카스 피해에서 철갑상어가 많이 잡혀서 그런지 더 많이 주는 듯하였다. 세계 3대 진미에 속한다는 귀한 케비어가 마치 명란젓처럼 나온다.

영어로 'Caviar to the general'이란 말이 있다. 우리 말로 직역하면, '일반인에게 철갑상어의 알젓'이란 뜻이겠지만 의역하면 '일반은 알지 못하는 진미' 정도가 된다. 비하어로서는 '개발에 다갈(주석 편자)'도 된다. 지난번에 레닌그라드 <달러 상점>에서 20달러 짜리 케비어 캔을 샀었는데 용량이 오늘 우리가 먹고 있는 량의 두 배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니 지금 식탁에 오른 케비어 값만도 10달러가 되는 셈이다.

20달러면 아가씨와 데이트도 할 수 있는데 말이다. 잘못하면 봉변을 당할 수도 있지만… 포도주 생산량이 많아서 그런지 인심이 좋아서 그런지, 옆 좌석의 그루지아인들이 몇 주전자째 포도주를 보내주었다. 답례로 건넨 말보로 담배에 남녀 모두가 어찌 그렇게 좋아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얼얼하게 취해서 멋있게 꾸민 '관광 마차'를 타고 배로 돌아오니 제정 러시아 때의 귀족이라도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81년 xx월 xx일

시장에 가는 길에 우리 일행은 상점가에서 모자 집을 한 군데 발견하고서 들어갔다. 레닌을 연상시키는 모자들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모두 비싸게 보이는 양가죽 모자였다. 전설의 '황금양털'로 보아 양들이 많은 고장이구나고 여겨졌다. 늙수룩한 점원에게 값이 얼마냐고 물었더니 'Cavier to the general'(개발에 다갈)이란 듯이 그냥 나가라는 제스쳐였다. 이런 무례에 대해 화가난 사무장이 100달러 짜리를 여러 장 그의 코밑에 내밀었더니 안쪽 작업실로 도망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역시 순진한 사람들이었다. 아무도 나와 보지도 안 했다. 벽에 걸린 액자속 스탈린이 우리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일행은 부근의 시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는데 특이한 점은 시장에 생선이라고는 구경할 수 없었고 대신에 기화요초들로 진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와∼ 멋지네!' '하~ 향기로워!'가 연발이었는데 나는 그 와중에서 너무 잘 익은 대봉감 홍시(紅.)를 발견하고 한 소쿠리를 샀다.

언젠가 방글라데시의 강변 시골길을 걷고 있었을 때 어떤 할아버지가 향기나는 '자연산 두리앙' 두 개를 나무 그늘 아래서 팔고 있었는데 그때 느꼈던 발견의 경이감 같은 것을 비슷하게 느꼈다. 일행은 일단 길가 벤치에 자리 잡아서 대봉감 홍시를 먹었다. 고향의 가을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듯한 느낌에 젖어서 그 많던 홍시를 다 먹었다. 점심 때인데도 진미 케비어도 더 이상 먹기 싫었다. 일행은 택시를 타고 시내를 일주하며 돌아다녀 보았다. 여기는 바닷가에 모랫사장은 보이지 않고 자갈 해변만 보였다. 역시 지형이 특이한 나라다. 물론 그런 지세에 사는 사람들 팔자는 특이하다 못해 기구하기까지 했었다는 것이 동서고금의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일찍이 교회가 발달하였고 그 유적들이 상당히 남아있다. 이미 유적이 된 교회들! 쏘련 어딤에 가도 다 그렇다. 유물 변증법의 공산주의자들은 정신적인 신앙인들을 다 잡아 가둔다. '뒤주에서 인심 난다'를 지상의 가치로 여긴다. 그런데 막상 뒤주가 비었다.

저녁식사 시간이 되어 어느 레스토랑에 들렸다. 사무장이 식사도 하기 전에 종업원에게 선불 팁을 좀 주었더니 고마워서 그런지 수다떤다고 그런지는 몰라도 아줌마 조리장까지 나와서 법석을 부렸는데 우선 가슴에 달고 있었던 메달까지 떼어서 우리 가슴에 붙여주기도 하고 주방 안으로 불러들여 음식 조리 구경까지 시킨다. 내가 수여받은(?) 메달은 명함 반 만큼의 크기였는데 예쁜 돛단배 그림과 레스토랑 이름이 잘 그려졌었다. 우리는 각자 한 두 개의 메달을 가슴에 달고 이름 모를 요리와 예의 케비아를 먹고 포도주도 물론 마셨다. 다른 나라 포도주에 비해 덜 쓰고 덜 시고 또 덜 텁텁해서 마시기가 편했다.

나는 통풍 때문에 거의 술을 끊다시피 하고 지내지만 그루지아 포도주는 예외였다. 각별한 작별인사를 나누고 드디어 배의 트랩을 오르려는데 사무장이 '선장님도 그 메달도 이리 주시지오'하면서 떼어갔고 모두 바닷물 속에 던지고 승선했다. 나는 속으로 '이 무슨 넌센스야'하고 아쉬워하고 있었다.

밤사이 화물 작업이 끝나면 정든 바투미를 출항해야 하는 출항전야의 날이왔다. 저녁 식사후 사무장에게 출항수속 준비를 지시했고 이에 따라 급사 정군이 바쁘게 돌아다니는 소리가 들리었다. 선원수첩을 모두 거두고 각자 맡은 부서에 가서 항해 준비를 해야 했다. 그때 당직사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선장님, 정 군이 방금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는데 의식이 없습니다."

급히 내려가 보니, 항해사가 인공호흡을 실시하고 있었는데 한편으로 귀안으로부터 많은 출혈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부두 정문 옆에 있는 간호사 실에 급히 가서 간호사를 모셔왔는데 70세가 훨씬 넘어 보이는 할머니라서 불안스러웠다. 그동안 인공호흡이 성공하여 정 군은 깊은 호흡을 내쉬고 있었지만 의식은 없었다. 간호사는 여유있게(?) 행동하고 있었다. 피를 딱고 간단한 주사를 놓기도 했다.

트랩(현관 사다리)을 지키던 군인이 앰브란스부터 불러주어서 환자를 급히 병원으로 옮기도록 했다. 의외로 엠브란스가 빨리 왔었고 대리점 직원도 그기에 타고 왔다. 그를 싣고 우리는 어느 응급병원에 도착했다. 병원은 많이 낡아 보였고 설비다운 설비도 보이지 않았으며 간호사들도 역시 70세가 넘어보이는 분들이어서 움직임도 더디었다. 당직의사는 환자를 이리저리 진찰하기 시작했다. 어서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아침 일찍이 출항해야 함으로 나는 곁에서 초조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갑작스레 의사가 나의 바지 가랑이를 자꾸 당기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지?

의사는 '비즈니스…' '비즈니스…'를 속삭였다. 나는 청바지 같은 것이나 '다와이'를 좀 해야 잘 봐 주겠다는 뜻인 줄을 드디어 알아챘다. 나는 대기실에 있는 대리점 직원에게 가서 말했다. "아무래도 환자를 이스탄불까지 데려가서 그기서 입원치료를 시켜야겠습니다."

대리점 직원은 펄쩍 뛴다. "켑틴, 환자는 이스탄불 반까지도 못가서 죽습니다. 2차 대전중 이곳으로 후송되어온 수천명의 중환자들을 우리 의료진들이 모두 살려냈습니다. 안심하십시오. 아침에 수술이 시작되도록 수배를 내려 놓았습니다. 이 할머니들이 이래 뵈어도 그때 실력을 발휘한 '역전의 나이팅게일'들입니다."

나는 속으로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 병원에서 죽어 나가기도 했다는 말이지'라고 착잡한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 정 군의 잠던 상태를 지켜보다가 병원을 나왔다. 곧 작업이 완료되면 외항으로 배를 옮겨놓고 봐야했다. 밤이 깊은 바투미 시가는 개짖는 소리조차 없이 고요했다. 부두 정문에서 차를 내려 침침한 부두안으로 걸어들어 오는데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있어 뒤돌아보니 경비병 장교였다. 그는 환자 때문에 걱정이 많은 나를 이해한다는 듯이 조용히 말했다. 우선 그는 선원 명부를 펴놓더니 선원 한 명을 손으로 찍었고 '이 선원이 저 바깥에서 안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정말?'하면서 그를 쳐다봤더니 그는 고개를 끄떡이는 것이었다. 배에 들어가 찾아보니 그는 역시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다시 정문으로 나가 그 장교를 보고 물었다. "어느 쪽에 있지오?" "여자하고 함께 있나요?"

손으로 가르키는 쪽을 가보니 정문 건너 아파트 촌인데 모두 소등을 해서 도무지 컴컴하여 아무 것도 보이질 않았다. 쓰레기 더미같은 쪽에서 '사람인가 고양이인가'가 움직이는 듯해서 그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대답이 없다. 배에 돌아가 선원들을 데리고 나와서 찾아보려고 했으나 그의 나이와 처지를 생각해서 나 혼자서 조용히 불러 들이기로 했다. '박 씨∼', '박 씨∼' 처절히 부르고 있자니 그 장교가 언제 옆에 왔는지 조용히 와서 의심가는 방향과 장소로 향해 순간 후렛쉬 라이트를 비추었다.

그랬더니 드디어 박 씨와 아가씨 한 명이 담벼락에 붙어 서서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장교가 쏘련어로 무어라고 외치니 아가씨가 박 씨를 데리고 천천히 이 쪽으로 건너오기 시작했다. 가까이 와서 그녀가 장교보고 무어라고 손짓하며 말하는 사연을 추정하건데 '이 사람이 술이 취해 배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해서 데리고 여기까지나마 왔다'는 내용으로 보였다. 나는 박 씨에게 타일렀다. "급사 정 군이 다쳐서 병원에 실려 갔는데 박 씨까지 이러시면 어찌되오? 빨리 배로 돌아갑시다."

그는 '죄송합니다'를 반복하며 배로 돌아갔고 나는 아가씨에게 택시비하라고 몇 푼 건네주었다. 장교한테는 양손으로 그의 손을 굳게 잡고 고마움을 표했었고 곧 배로 돌아와서 사무장을 통해 담배 한 보루를 전했다. 남자 대 남자의 국경과 이념을 넘은 인간미같은 것을 느꼈다.

81년 xx월 xx일

새벽에 하역작업이 끝나자 도선사가 와서 배를 부두에서 가까운 외항에 옮겨 닻을 내려주고 돌아갔다. 이제는 대리점과 정 군을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아침 10시가 좀 넘어서 대리점 직원 혼자만이 통선편으로 배에 왔다. 출항서류와 함께 의사의 진단서를 전해주었다. '환자는 뒷머리 부분의 뼈가 부셔져 수술과 약 한 달 동안의 입원치료를 요함'이라고 적혀 있다. 출항 수속을 마치고 난 뒤에 대리점 직원은 한 장의 메모를 환자가 주더라며 나에게 건네주었다.

삐뚤삐뚤하게 쓰여진 내용은 이랬다. "선장님, 저는 이제 괜찮아요. 제발 이제 배에 도로 데려다 주세요."

나는 순간 대리점에게 소리질렀다. "Not Too Bad(많이 안 나쁘지 않나)!"

예고로프 씨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잠깐 동안의 약발 때문입니다. 지금쯤 수술대에 올랐을 겁니다. 믿어주세요."

나는 정 군에게 충분한 달러와 의사를 비롯한 간호사 그리고 주위의 사람들에게 선심쓰라고 담배, 껌, 과자, 청바지 등 쏘련 사람들이 좋아하는 물품들을 그의 가방에 가득 넣어서 직원 예고로프 씨 편으로 부쳤다. 그리고 쏘련에 체류하는 동안의 주의사항과 예상 귀국 경로까지 적어넣었다. 무엇보다 서울에 귀국할 때의 지킬 사항을 세심히 적어 넣었다. 흑해까지 나가 두개골을 다쳐 코카사스의 저승 문턱에까지 갔다 되돌아온 환자가 경찰이나 대공분실이 '좀 잠깐 가시지오'같은 비극을 피하도록 온 신경을 다 썼다.

무엇보다 대리점 직원 예고로프 씨에게는 '특별 부탁의 말씀과 선물'을 잊지 않았다. 드디어 '올 스텐 바이!' 벨을 울렸다. 떠남이라고 항상 홀가분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정 군이 무사히 귀국하련가하는 걱정이 흑해의 짙은 안개와 함께 자꾸 눈앞을 가렸다. 외항에 나오자 마자 뉴욕 본사에 전보를 넣어 사연을 알렸다. 지구 반대편에서 곧 답전이 왔다. "환자의 신변을 일체 보장받았음으로 안심 바람. 선원들 노고에 감사함. 안전항해를 기원함."

82년 xx월 xx일

아르헨티나의 바이아 블랑카 항을 떠나서 발틱해로 항해중 급유차 스페인령 카나리아 제도의 중앙에 위치한 라스 팔마스 항에 또 들렸다. 이곳을 우리 선원들은 '유럽의 제주도'라 부르기도 한다. 그만큼 날씨가 온화한 관광지이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부쳐온 서류 봉투속에서 선원가족들의 편지도 함께 쏟아져 나온다. 그 속에 서울에서 부친 정 군의 편지가 나를 가장 반갑게 했다. 물론 그의 안부를 뉴욕으로부터 자주 듣고 있었으나 막상 그의 친필을 접하니 무슨 연인에게서 부쳐온 편지처럼 가슴이 설레기도 했다.

내용의 요지는 이랬다. "약 30일 동안의 바투미 병원생활을 마치고 모스크바, 빠리, 동경을 경유해서 무사히 서울에 입성하였으며 여관에 들자마자 펜을 들었습니다. 그루지아의 바투미항에서 보낸 40여일을 관계기관에 역시 신고하지 안 했다는 것도 말씀드립니다. 몸은 건강하고요 자세한 내용은 부산에서 만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사히 귀국하시길 빌겠습니다."

나는 이곳에 관광하러 온 기분으로 일행과 함께 동포가 경영하는 식당 <포니>에 가서 싱싱한 생선회와 함께 반주로 이곳 명품 포도주를 한 잔 안심하고 들었다. 오랜만에 듣는 고국의 음악 소리가 북위 15도의 대서양 파도 소리와 잘 섞여 흐른다. 그 사이사이로 젊은 여인들의 웃음소리가 나를 진짜 관광객으로 오인케 할 정도로 감칠 맛을 풍기고 있다. 나는 카운터에 무엇하는 사람들이냐고 묻자 옆자리의 어떤 한국인이 일러준다. "소위 '연예인' 비자로 출국해 온 한국 아가씨들입니다. '애로 사항'이 많은 여자들입니다. 건너 편 섬 한국인 공동묘지에 어선원 무덤이 백여십기가 있는데요 '연예인' 무덤도 하나 최근에 생겼지오. 이제 라스 팔마스도 좀 조용해졌지오. 정치인도 기자들도 이제 안 나타나고요. 특히 기자들은 웃겼지오. 예컨대, 카메라를 잃었다고 우리들로부터 '라이카 F2'같은 고급품을 '선물'로 챙겨 가기도 했고요…."

그는 결국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어 버렸다. 돌아오는 길에 공중전화 부스에서 한국 어선 선원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가는 낚싯줄 끝에 동전을 매달아서 올렸다 내렸다하는 교묘한 수법으로 국제전화를 걸고 있었다. 낚싯줄로 물고기만 낚는 것이 아니고 국제전화도 낚고 있었다. 나는 궁금해 '연예인'들도 이런 수법으로 전화를 걸 줄 아는가요라고 물었더니, 어부들의 대답은 이랬다. "걔들은 현금을 직접 낚잖아요. 간혹 얻어터지기는 하지만요."

나는 왜 '연예인'들이 얻어터지나라고 물어려다 그만 두었다. 집안에서도 얻어터지는 것이 우리 여인네들이지 아닌가. 더 궁금한 것은 여기까지 정치인들이 와서 무슨 언약을 남발하고 갔을런지였다. 사람들은 흔히 사람들 자신을 여러 갈래로 분류하기를 일 삼는다. 남녀노소도 그렇고 빈부귀천도 그렇고 기타 각종 이념으로써도 분류를 해댄다. 그런 틈새 속에서도 나는 나름대로 이런 재분류를 해 보았다. 즉 '아는 것이 힘'이 되어 스스로 '십자가'를 맸다고 주창하는 자들과 '모르는 것이 힘'이 되어 어쩌다 '총대'를 맨 자들로서 두 분류를 말이다. 물론 원양어선 어부들이나 문제의 '연예인'들은 후자에 속할 것이다. 나는 어느 부류에도 속하지 않도록 공부하기를 공자의 중용에 대고 맹서했다.

82년 xx월 xx일

라스 팔마스 항을 출항한 이래 12일만에 발틱해 연안의 라트비아 쏘연방의 수도 리가항 검역지에 닻을 내렸다. 부근에서 쏘련 잠수함정들이 기동 훈련을 하고 있다. 최근에 어느 스웨덴의 고기잡이 어망에 쏘련 잠수정이 걸려들었다고 야단들이었는데 정말 웃기는 일이지만 한편으로 잠행실력이 그 정도라면 어뢰 발사 실력인들 믿을 수가 있는가하는 두려움은 결코 웃기는 일이 아니니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리가만 서쪽 해안의 리예파야항은 '발틱함대' 기지였다. 인플롯에 연락하여 언제쯤 항내에 들어가느냐고 물었더니 며칠만 더 인내하라는 낭낭한 목소리가 울려 왔었는데 다행하게도 우리는 바로 다음날 부두에 접안했다. 이제 우리는 쏘련항 입출항 수속에 이골이 나 있었다. 하역 작업이 곧 시작되었고 저녁 식사후에는 당직외에는 대부분 서원들을 상륙시킨다. 6시쯤에 우리 일행은 외출을 했는데 부두 정문에 나서고 보니 의외로 택시들이 많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택시는 아가씨들이 타고와 대기시켜 놓은 것이었데 그 아가씨들은 서로 자기들 택시를 타고 가자고 난리였다. 그런 와중이지만 경찰은 좀 원거리에서 남의 불구경만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일견해서 '아, 쏘련도 이제 나사가 풀리기 시작했구나'로 느껴졌다. 피부 색이 새까만 외국 선원들을 싣고 달리는 하얀 리가 아가씨들의 즐거운 보이 헌팅 모습이 너무도 구경꺼리였다. 선원들은 어느 나라에 가던지 그 나라 택시를 타보고 대충 시민 문화를 짐작한다. 이곳 택시도 합승, 과속, 승차거부, 교통위반을 밥먹듯이 하는 모양인데 한국과 그 사정이 비슷했다.

아름다운 모습은 나라마다 민족마다 모두 각양각색인데 아름답지 못한 모습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똑 같은 패턴이니 왜 그런지 모를 노릇이다. 리가 앞바다의 잠수함 작전 상황에 비해 시내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펑크족도 보이고 성조기가 그려진 T샤츠를 입고 다니는 놈도 보이고 'I ♡ New York'이란 종이 가방을 들고 다니는 여인네도 보인다.

우리 일행은 악기점에 들어가서 기타와 아코디온 그리고 플롯을 샀다. 기관장 부인은 긴 항해에 화장품이 거덜나서 몇 점을 구입했는데 품질이 '동동북크림' 정도라고 실소하고 있었다. 몰라서 그렇지 악기들도 그 수준일꺼라고 우리는 생각했다. 괜찮은 레스토랑으로 가는 차타기를 할 줄 몰라서 그냥 우리는 리가 시가지를 운동 삼아서 좀 걷기로 했다. 그러다가 혹시 일반 식당이라도 발견되면 여기 서민들 음식도 시식해 보는 기회도 갖고 혹시 진귀한 물건이라도 보이면 구경도 하고 사기도 하려고 우리는 거리를 걸었다.

조금 걷다가 식당을 하나 발견하였다. 우리는 창문으로 통해 우선 그들이 무엇을 먹는가를 좀 훔쳐보기로 했다. 메뉴가 한결같이 왕소금, 생파, 죽, 검은 빵으로 총 네가지였다. 죽과 빵의 내용도 대강 추측이 갔다. 쏘련은 이렇게 호구지책만 강구하고 절약한 돈으로 국방을 기르며, 비싼 잠수함이나 탄도 미사일을 만들어서, 먹는 것이 남아도는 부자나라 구미제국들과 군비경쟁을 치열하게 벌이고 있다. 얼마나 오래 버틸런지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82년 xx월 xx일

리가 Seamen's Club(선원 컬럽)의 안내원 에레나 양은 몸에 밴 겸손에서 동양적 지성미까지 반짝이는 차분하고 영리한 여성이다. 일행들이 보도를 걸을 때는 지나가는 자동차에까지 신경을 써준다. 마치 우리를 유치원생처럼 대한다. 제정시대의 어느 저택 앞에서 창문의 크기에 대한 설명을 하여 우리를 어린이처럼 웃게도 했다. "이 저택의 창문을 이렇게 작게 만든 이유는 '햇볕 사용세'를 줄이기 위해서였답니다."

그렇잖아도 일사량이 적어 고생하는 북국에서 햇볕 사용량에까지 과세했다는 폭정에 우리는 혀를 내두르며 웃었다. 나는 물었다. "저택주인은 무엇하는 사람이었습니까?" "빵장수였답니다." 에레나가 얼른 답했다. 동토에서 햇볕 사용량에까지 과세한 나랏님이나 굶어서 배고파 죽는 서민들에 빵을 팔아 치부한 장삿꾼이나 모두 공산주의 국가 건설에 일등 공신들이라 여겨졌다. 리가는 역사가 오래된 도시라서 관광 명소가 많았으나 선원들이 흙과 숲내음을 맡기 좋아할꺼라고 우리를 교외로 안내하였다.

여기 발틱해 3국은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그리고 리투아니아를 말하는데 마치 흑해의 코카사스 3국처럼 운명 공동체였다. 이곳 역시도 지리적 요충지라서 폴란드, 스웨덴, 독일, 핀란드의 침공 그리고 결국에는 러시아의 침략과 속국생활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루지아처럼 곳곳에 교회와 성당들이 보이는데 역시 오랜 유적으로서의 모습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코카사스 3국과 다른 점은 그기는 산악지대였고 여기는 산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평지다. 차창으로 어린 적송(赤松) 나무들이 줄줄이 지나가는데 심은지가 오래되지 않은 듯했다.

에레나 양은 구전 동화 한 토막으로 다시 우리를 웃겼다. "이 부근에 회춘 약수터가 있었는데 영감은 적당히 마셔 청년이 되었고 할멈은 과음하여 애기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는 장소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선원들은 한마디 보태며 킬킬거렸다. "진시황이 코스를 잘못 잡았네." "병마총 군사들을 일으켜 리가로 진군해 오겠네."

쏘련은 어디를 가도 경작지들에 울타리가 없었다. 끝없이 펼쳐지는 포도밭이나 혹은 체소나 과일 농장에도 울타리가 둘러쳐지지 않는 것이 신기했고 속시원했다. 물론 공산주의 집단농장이니까 그랬다. 꾸불꾸불한 논두렁길이나 탱자나무 울타리의 과수원길 같은 이른바 '낭만'은 전혀 차원이 다른 얘기가 되었다. 에레나 양은 우리가 탄 '스페이스 머신'을 어느 '황성옛터'에 안착시켰다.

중세 십자군이 원정을 왔었다는 폐허에는 으악새와 이끼풀이 소복히 덮혔고 유물관 진열장 속에는 녹슨 투구와 문드러진 창칼들만이 속절없이 진열되어 있다. 관광객들이 텅 빈 성채주위를 거닐기도 하고 간혹 구형 카메라 앞에 열명씩 스무명씩 모여서서 '중세의 틀'에 꼭 맞게 포즈를 취하며 기념사진을 찍는다.

물론 우리는 남의 과거사에 연연하는 기념짓거리를 하다 꼬리를 잡혀 봉변당 하는 현실 저편의 상황이 몸서리쳐져서 스냅도 한 장 안 찍었다. 역시 에레나 양이 왜 사진기를 가지고 나오지 안 했느냐고 물어서 사연을 좀 말했더니 '아예 출국조차 불가능한 우리보단 낫다'고 귀띰했다. 다시 우리는 숲속의 어느 현대식 레스토랑으로 옮겨왔다. 지붕 디자인이 큰 우산 버섯처럼 생겼는데 그 아래가 레스토랑이다. 생전 처음 먹어보는 라트비아 요리와 전통주는 우리의 호기심에 푹 삭혀서 별미가 되어 목줄을 타고 넘어가고 있다. 간혹 눈에 밟히는 것은 거리 식당에서 본 왕소금과 생파 그리고 밀죽과 소똥빵을 씹는 어머니들의 모습이었다. 쏘련은 격전지마다 '어머니의 땅'이란 구호와 칼을 높이 빼어든 여인상을 세워 놓았었다.

돌아오는 차중에서 선원들은 에레나의 마이크를 받아서 제각각 한 곡씩을 불렀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없는 이 발길∼'로부터 '돌아와요 부산항' 등등 까지의 레파토리를 다 하고 덤으로 불렀던 '이름마져 에레나로 달라진 순이'로 마침표를 찍은 기관장이 오늘의 인기상을 받고 마이크를 다시 에레나에게 넘겼다. 그리고 우리는 에레나에게 한곡 청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에레나가 얼굴이 빨게지는 것을 처음 봤다. 그리고 순수한 라트비아 노래를 불러 드리겠다고 한 곡조 풀어냈는데 우리나라 가수로 치면 심수봉의 엘레지를 듣는 듯한 감정을 풍겼다. 라트비아인의 한을 전파했는 것일가.

영화 백야 말고, 백야(白夜) 현상이란 것이 있다. 북위 약 66.5도(북회귀선) 이상의 지방에서 하지(夏至) 때 태양이 종일 수평선을 넘어가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와 반대로 동지 때는 태양이 수평선 아래에서만 맴돌기만 하고 뜨지 않아서 흑야라 일컫는다. 현재 위도 57도밖에 안되는 리가항 초여름에 백야 영향이 좀 나타나서 수평선위에 태양이 한두뼘 남았는 데도 시간은 밤 9시를 넘고 있었다. 관광 버스는 이 시간에 '선원 클럽'으로 돌아왔다. 선원들은 대부분 디스코 바나 레스토랑 쪽으로 빠져 나갔는 모양이다. 나는 에레나와 그녀의 동료에게 칵테일을 한 잔씩을 사고 나도 한 잔 시켜서 오늘의 수고에 고맙다며 건배를 했다.

한편 기관장 부인은 답례품으로 미리 준비해온 고급 여성용품을 선물하고 있었다. 라트비아 음률에 맞춘 무희의 민속 춤사위에 시선이 끌려다니고 있었고 몸은 칵테일 향기에 취해들고 있었다. 그때 에레나가 곁에 오더니 이렇게 말한다. "켑틴, 선원 한 분이 무어라고 얘길하시는데 저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 그 선원을 이리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선원 K 씨가 곁으로 닥아와서 나는 그에게 물었다. "무얼 물었다면서요?"

그는 이런 엉뚱한 대답을 했다. "'유 해브 타임'이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질문을 더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슨 뜻으로 그렇게 물었지오?"

그는 얼른 이렇게 이실직고한다. "좀 꼬셔보려고 그랬습니다."

나는 에레나 양에게 다음과 같이 돌려대며 겨우 곤경을 면했다. "이분께서 내일 저녁 식사에 초대하겠다고 합니다."

에레나는 활짝 웃으며 '댕큐'를 연발한다. 그리고 나도 꼭 참석해야 한다고 확인을 했다.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답을 했지만 선원 K 씨에게 속으로 이렇게 핀잔을 주고 있었다. "이 양반아, 제발 사람을 좀 가려가며 꼬시던 노시던 하시오. 그녀의 정체는 '정부요원'이라오, '정부요원'"

그렇지만 접대비를 좀 쓰더라도 K 씨 덕택으로 에레나 양과 그의 동료 S양 그리고 우리 측 몇 분들과 저녁을 함께 먹는 것은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일이었다.

82년 xx월 xx일

같은 쏘련 항구라도 가는 곳마다 INFLOT 직원들의 업무방식이 다르다. 여기는 하루도 빠짐없이 오전 중에 대리점 직원이 방문하여 업무에 관한 미팅을 하는데 특이한 점은 한결같이 여직원만 나오고 또 매일 사람이 바뀌며 새 얼굴을 만난다는 점이다. 오늘따라 중년의 점잖게 생긴 아주머니 한 분이 오셨다. 업무를 마치고서, 차를 한 잔 들면서 어쩌다 화제가 그 분의 가슴에 매달린 큰 호박(琥珀) 팬던트로 옮겨가게 되었는데 이 때 그녀는 살짝 속삭였다. "캡틴, 라트비아 해안에서 나는 이 호박(Amber)은 아주 유명한 기념품입니다. 사고 싶으시면 사람을 소개하겠습니다. 물론 일반 가게에는 파는 물건이 아닙니다."

'호박 부인'의 소개를 받아 007가방을 들고 나타난 사나이는 행동이 담대해 보이고 덩치도 보통 사람이 아니다. 인사를 나누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캡틴, 호박보다 훨씬 더 마음에 들 것들이 있지오. 허허!" "그게 뭔데요?" 그는 안주머니에서 이상한 물건들을 꺼집어 내보인다. 고색 찬란한 가락지며 귀걸이며 또 목걸이 등인데 품목이 다양하다. 일리체우스크의 유리로부터 산 반지를 보여주려다가 그냥 두었다. 영국에서 이미 검정을 필했기 때문이다.

돋보기를 가져와서 살펴보니 제품마다 제작자의 각인(Hallmark)이 정교하게 찍혔다. 이 양반은 얼마를 달라고 할런지 궁금해 하고 있었는데 자기 소개부터 먼저 한다. 항만국 간부고 전에는 외항선의 기관장이었다고 했다. 다음에는 미술품을 좀 가져오겠다고 했다. 흥정이 끝나자 그는 나에게 믿음을 표하려고 그런지 돈은 며칠 있다가 받으러 오겠다고 말하며 007가방에서 호박 목걸이 한 줄을 꺼내서 던져주고 하선해 갔다. 쏘련 어느 항구에 도착하더라도 전화 한 통화만 하면 비행기 편으로 찾아오겠다고도 했다.

82년 xx월 xx일

선원 클럽의 부속 극장에서 재미난 공연 프로가 있다고 해서 오후 일과를 마치고 출근해서 일치감치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사람들이 제법 북적되고 있었다. 곧 무대 커텐이 열릴쯤이었는데 우연히 뒤쪽으로 보니 한 무리의 가방을 든 '신사복'들이 들어와 입구쪽에 자리를 배정 받으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항무국에 관련되는 부서에서 일하는 사람들처럼 보여서 좀 유심히 시선을 주고 있었는데 이 순간에 희한한 쇼가 벌어졌다. 그들이 각각 자리에 착석하는 과정에서 어떤 땅땅한 녀석이 번개처럼 몸을 회전시키더니 강력한 태권한 방을 뒤에 섰는 동료(?)의 복부에 명중시키는 것이 아닌가!

더욱 놀라운 장면은 잇달아 일어났는데 눈깜짝할 사이였다. 제3의 '신사복장'이 너무도 정확한 태권도의 벽돌 격파 권법으로 그 가격자의 목덜미를 내리치는 것이었다. 나는 공연장이 엉망이 되지 않을가 걱정하였는데 그것도 기우였다. 심각성을 직감한 주위 일행들이 마치 체내에 들어온 병원균을 포위하는 백혈구들처럼 당사자들을 겹겹이 끌어안아 눈덩이처럼 크게 뭉쳐서 급속히 밖으로 빠져나갔다. 사태 발생으로부터 정리까지 걸린 시간은 몇 십초 이내였기 때문에 앞쪽만 보고 있은 관중들에게는 뒷무대의 이 쑈 장면이 관람되지 않아서 대단히 다행한 일이었다.

오늘 나는 눈앞의 무대위에서 펼쳐지는 뮤지컬 쑈보다 눈 뒤에서 벌어진 주최측(?) 쑈에 더 많은 관람 신경을 썼다. 며칠전 시내에서 서커스를 단체 관람하고 난 뒤에 막후의 시간을 얻어서 우리 선원 한명이 태권도 시범을 몇 장면 보였는데 가히 인기 폭발에다가 즉석 펜들이 줄줄 따라 다녀서 인솔 장교 에레나 양이 큰 곤욕을 치렀던 일이 있다. 아마도 북한을 통해 태권도가 쏘련 사회의 저변에 널리 퍼져 있는 것 같았다.

결투 얘기가 나왔으니 미국에서 본 장면을 한편 소개해 보자. 어떤 술집 앞이었는데 갑자기 두 장년이 맞붙어 결투를 벌이는 것이었다. 어떤 때는 엉겨붙어 땅을 구르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주차해둔 자동차에 몸을 붙여 싸우느라 세워둔 안테나를 뿌러트리기도 하면서 열전이었는데 남녀 구경꾼들은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이 무심하게 구경만 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한명이 다른 한명을 쓰러트려 손을 비틀어 등쪽으로 붙였다. 그러고 그는 이렇게 알리는 것이었다. "나는 경찰관이오. 뒷주머니 수갑을 좀 꺼내주시오."

구경꾼들은 그제야 고개를 끄득였으며 그 중 한명이 수갑을 꺼내서 쥐어주자 철거덕 채워서 연행해 갔다. 경찰과 수배인과의 격투였던 것이다. 좀 있으니 돌아와서 뿌러트린 안테나에 대해 차주에게 무슨 서류를 건네주었다. 미국다운 경찰의 결투장면이었다. 마냥 총질만 일삼지 않는다는 것을 보았다.

83년 xx월 xx일

북미 오대호에 들어가는 배로 나는 옮겨 왔다. 옛날에 일등항해사 시절에 오대호에 몇차례 들어온 경험이 있다. 선원들은 오대호에 들어가는 것을 무척 꺼린다. 그만큼 힘든 뱃길이고 고된 뱃일이 따르기 때문이다. 센트 로렌스 수로 (Saint Lawrence Seaway)는 본격적으로 카나다 몬트리얼에서 시작되는데 나는 미리 퀘백항에서 승선했다. 본선 파이오니어 호는 퀘백항에서 화물의 일부를 내려주고 다시 몬트리얼항에 도착하여 하역도 했고 본격적인 수로 통항 준비를 한다. 목적항 슈피어리어호의 덜루스항까지는 일만리(약 4,500km)가 훨씬 넘는 길인데 우선 필요한 장비와 충분한 선식을 보급 받고서 첫째 갑문을 통과한다.

우선 "센트 로렌스 수로"에 대해 대강 살펴보기로 한다. 협수로(센트 로렌스 강)는 몬트리얼 항과 온타리오 호수 입구까지 약 300km이며 그 간에 갑문이 7개 산재해 있다. 온타리오 호수 약 300여km를 건너면 40여km 거리인 이리 호수면으로 배를 띄워 올리는 갑문들이 8개나 집결해 나타난다. 두 호수의 고도 차이가 부근의 나이아가라 폭포만큼이니 약 99m를 연어가 물계단을 타고 오르듯이 배도 갑문들을 타고 오르는 셈이다. 나머지 한 개는 슈피어리러호 입구에 있다.
위의 그림에서 숫자들은 갑문들이 소재한 위치를 표시하고 있고 8번 웰란드 수도에 문제의 갑문 8개가 밀집해 있는데 이는 두 호수 사이의 고도 차이가 약 100미터나 되는 반면에 호수간의 거리는 짧기 때문이다. 호숫물의 중력이 갑문속에 물을 채우기를 반복해서 몇 만톤의 배를 들고 또 들고를 계속하는 것이다. 이 갑문 설치 공사는 1932년에 마쳤는데 에집트 기자의 대 피라밋 공사에 버금하지만 사람들이 몰라준다고 수로 도선사가 말해준다.

파나마 운하의 갑문에서도 그렇지만 여기서도 선박들이 이렇게 올랐다 내렸다를 하면서 통항하는 것을 관광객들이 조망대에서 구경하면서 선원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있다. 울며 겨자먹기로 우리 지친 선원들도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답례를 한다.

부근의 버팔로(Buffalo)시티는 뉴욕주에서 뉴욕 다음으로 큰 도시이다. 여기로 와서 미국측 나이아가라도 보고 규모가 훨씬 큰 카나다측 나이아가라는 물론이고 웰란드 수로의 갑문들 그리고 다양한 통항선들의 모습도 구경한다. 호화 욧트들도 마치 주인을 따르는 강아지처럼 큰 배의 뒤에 붙어서 갑문속으로 함께 들어와 갑문을 통과하고 있다. 참고의 얘기지만, 빛의 천사 헬렌 켈러(美 1880~1968)가 나이아가라 견문기를 쓴 적이 있었는데 당대의 문필가 마크 트웨인은 이렇게 논평했다. "눈과 귀와 말을 제대로 갖춘 정상인보다 훨씬 더 감동적으로 표현했다. 우리가 가진 감각기능은 신이 내려주신 액서사리같은 것으로 몇가지는 없어도 괜찮은 것 같다."

갑문 1번에서 7번까지의 통과는 세인트 로렌스(프랑스어로 상 로랑)강 부분인데 유례가 드문 강변 경치와 특히 온타리오 호의 북쪽 입구에 있는 킹스톤 시티 부근의 천섬 (Thousand Islands: 작은 섬들이 천팔백개 가량)의 절경에 심취해서 넋을 잃으니 지치는 것도 잊는다. 아담한 대소 섬들에 저마다 별장 혹은 저택 또 혹은 성채까지도 올려서 별별 자태를 자랑하고 그 주위엔 호화 욧트, 유람선, 스피드 보트들이 대령하듯 즐비하고 페리선들도 돌아다닌다.

강의 마지막 갑문은 이름이 이리코이(Iroquois)인데 이리코이는 이곳 인디언족을 말하고 그들이 마을을 카나다라고 부른데서 Canada라는 국명이 유래했다고 강 도선사가 설명을 한다.

갑문 8번은 고작 백리길(43Km)에 갑문이 여덟 개나 집결해 있어서 선원들이나 선장도 비상근무에 지쳐 혼이 빠져서 귀천이 다 달아난다. 시설이 제 아무리 웅장하다 해도 배를 그냥 들어올려주는 것이 아니다. 좁은 갑문에 들어가고 다시 나오고를 입출항에 비교하면 16번 치르는 셈이다. 아주 짧은 시간에 말이다. 차라리 하루 동안에 그 길을 그냥 걷는 것이 덜 지치리라. 갑문들을 다빠져나오면 마치 울안을 빠져나온 들소들마냥 해방감을 만끽한다. 이리호의 품속에 안겨 실컨 잠부터 자기도 한다. 누가 '호수는 달의 거울'이라 했던가. 밤 하늘의 달이 선원들의 노고를 어루만지고 있는 듯하다. 호수에는 호수의 도선사가 수로를 안내해 간다. 그 동안에 나도 좀 쉰다.
제목: "오대호의 거대선들" 이 사진은 온타리오호를 건너서 시카고로 항행하는 곡물선 G3 후작(Marquis)호를 사진가 Thomas Fricke 씨가 찍은 것이다. 그는 지금 사진상에서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 보며 갑판위에 서있다. 왼쪽 상부의 작은 글 내용: "우리들 대부분이 접해보지 못했던 수천만 달러의 사업. 오대호를 항행하는 화물선들 위에서 인생은 어떤 것인가를 순간 떠올린다." 
그리고 오른 쪽의 글 내용: "ACC사(社)의 벌크 운반선 G3 후작호가 몬트리얼의 성 램버트 갑문에 천천히 들어가는 것을 보라. 그리고 결론적으로 오대호 항해는 거대한 폭의 배를 갑문속에 교묘히 밀어넣는 도선 선장의 능력의 문제임이 틀림없다. G3 후작호는 배의 기리가 226미터인데 이는 토론토의 TD 은행 건물을 옆으로 눕힌 거와 거의 같다. 오대호 수로의 대부분의 갑문 기리가 그렇듯이 성 램버트 갑문도 233.5미터이다. 기리 문제도 빡빡하다만 요점은 폭이다. 갑문속에서 배의 양쪽에 각각 30센티의 여유가 있을 뿐이니 빵빵한 선체가 갑문안 끝으로 닥아오며 뱃머리 앞에 상당한 수량을 밀친다. 이 경우 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위장속으로 그 수량을 흡입하여 충분한 공간을 만들려는 마음, 이걸 상상하 기는 어렵지 않다. (필자 註: 오대호 수로 시스템은 1959년에 완공되었다.)

82년 xx월 xx일

배는 클리브랜드 항에 닿아서 짐을 계속 내렸다. 오하이오주의 클리브랜드시는 별로 관광지도 아니고 1960~70년의 중공업의 쇠태로 인구가 빠져나가서 그런지 항구 부근의 건물들은 스산해 보였다. 그러나 식물원이나 미술관은 조용해서 우리에겐 더 없이 좋았다. 밤의 번화가 술집들에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지만 피곤하게 구는 친구들이 없어서 마음을 놓아도 좋았다. 세상은 참 아이러니하게 변화무쌍하다. 여기서 철강품이나 자동차를 싣고 아시아 쪽으로 배들이 갔었는데 순식간에 지금은 그 반대니 말이다. 마치 우크라이나의 곡창지대가 그렇듯이 말이다. 지구는 둥글고 움직이는 물건이라 그런지 과연 정해진 것이 없다. 우리 배는 다시 약 200km를 움직여 미시건주의 디트로이트항에 입항하였다. 일견 한산하기로는 클리브랜드와 비슷하였다. 한 때 이곳은 자동차의 메카였고 2차대전 특수 때인 1950년경에는 인구가 200만에 가까워서 미국 제4대 도시였지만 지금은 이미 슬슬 망해간다고 도선사는 귀띰한다.

포드, GM, 크라이슬러 자동차 회사들이 쓰러져가고 있는 중이며 동시에 백인들이 빠져나가고 흑인들의 도시가 되어가고 있다고도 했다. '자동차 회사들이 망한 가장 중요한 원인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자동차 회사들이 에너지 효율이나 그 밖의 다른 실질적 기능엔 신경 쓰지 않은 채 자동차의 스타일 위주로 새로운 모델을 양산해 내는 매너리즘에 빠져 결국 국제경쟁력을 잃고 말았지오. 이 배에도 토요타 자동차가 지금 많이 실려 있지오?"

나는 속으로 '사람도 그렇게 외장 위주로 경영되면 망하는데…'라고 여겼다. 다음날 나는 혼자서 디트로이트시의 어느 빈민가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탑승하여 시내로 들어가는 '내면 관광'을 하고 있었다. 나 외에는 모두 흑인들이었다. 그런데 맨 앞좌석의 어느 승객이 술을 먹었는지 운전사보고 운전 잘못한다고 투덜거리고 있는 모양이었는데 이때 운전기사는 버스를 길가 가로수 옆에 차를 세우고 술취해 반쯤 꼬부라져 있는 손님을 이르켜 세우더니 인정사정없이 강펀치를 가하는 것이 아닌가. 그는 조지 포어먼처럼 생겼는데 펀치 날리는 모습도 그를 방불케했다.

하도 갑작스럽고 처절한 모습에 No! No!라고 외칠뻔 했는데 혹시 뒷일이라도 생기면 감당하기 어려워 꾹 참았다. 승객들이 거의 좌석을 다 차지하고 있었는데 누구도 말 한마디 붙이는 승객은 없었다. 운전자는 자기 좌석 쪽으로 가서 무슨 용지를 꺼집어 내어 오더니만 그 속에 무엇을 기록해 넣었고 승객쪽을 향하여 물었다. "이 '사실 신고서'에 서명해 주실 분 계십니까?" 그러자 한 좌석의 승객이 일어나서 서명해주는 것이 아닌가! 연후에 버스는 진행을 계속했다.

도심입구에서 운전자는 교통경찰을 만나서 문제의 '신고서'를 간단한 설명과 함께 제출했고 버스는 계속 움직였다. 대낮에 대중들 앞에서 자식같은 놈이 술 취한 어른의 잔소리에 그처럼 폭력을 가하고도 잘했다고 신고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디트로이트시의 편모를 보고, 나는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말을 떠올리면서 미국식 정의와 폭력에 대해 나름대로 의문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 녀석은 처자식이 애를 먹인다고 그렇게 폭력을 행사라도 한단 말인가. 그리고 비슷한 이웃놈의 사인을 받고 신고하면 그만인가.

82년 xx월 xx일

우리 배는 이리호와 휴런호를 연결하는 대략 130km에 걸친 디트로이트강(江)→ 세인트 클레어호(湖)→ 세인트 클레어강(江)으로 이어지는 협수로를 통항하면서 중간에 디트로이트강의 디트로이트 하항에 2일간 기항한 셈이었다. 대항해시대에 프랑스인 탐험가 앙투앙 캐딜락(1658~1780)이 오늘 날의 디트로이트 지역을 최초로 도착해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는데 Detroit이라는 말은 프랑스어 D.troit, 즉 해협(strait)이라는 뜻에서 나왔다고 한다. 호반의 밤을 연상시키는 아담한 호수와 협수로들의 중앙선이 미국과 캐나다의 국경선인데 우리 배는 대략 이 경계선을 따라 양안의 절경을 감상하면서 통항했고 지금 우리의 파이어니어호는 휴런호의 물결 약 370km를 헤치는 중이다. 미시건주의 북단 매키넥 해협을 통과하면 다시 약 360km 떨어진 미시건호의 항구 케놋사(Kenosha)로 남진할 것이다.

82년 xx월 xx일

우리 배는 드디어 목적지 위스콘신주 남단의 케놋사항에 닿았다. 시카고와 밀워키의 대략 중간 지점이다. 여기서 뱃짐을 모두 양하한다. 전항 디트로이트는 정동쪽으로 약 430km 거리인데 미시건주 북단을 돌아서 오느라 300km를 더 걸린 것이다. 비행기나 도로와는 달리 배들은 돌고 또 돌아서 다닌다. 그렇게 회항하느라 시간을 다 보내는 것이 배와 선원의 숙명인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결국 해양력(Sea Power)을 장악한 자들의 세상이지 않는가. 현재로서는 말이다. 그러나 인생은 바다보다 훨씬 더 돌고 도는 것. 언젠가 한반도에도 쨍하고 해 뜰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 나는 우리 배가 보이는 해변의 잔디밭에 누워 쉬면서 맑은 하늘의 흰구름으로 이런 모습 저런 모양새를 그려보고 또한 지워보기도 하고 있다. 아마도 선원들은 지금쯤 더 가까운 밀워키 시내쪽으로 흙냄세 맡으러 나갔을 것 같다.

82년 xx월 xx일

파이오니어호는 드디어 미네소타주 덜루스(Duluth)항에 닿았다. 오는 동안 대략 중간지점에서 수 세인트 마리(Sault Ste. Marie)에서 운하 하나를 더 건넜다. 여기는 수피어리어호의 제일 안 구석이다. 그래서 오대호의 끝이기도 하다. 대서양의 세인트 로렌스만 해수면보다 약 184m가 높다. 갑문이라는 물계단 16개가 그만큼 배를 들어 올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 배는 여기서 곡물을 며칠간 실을 예정이다. 알고 보니 덜루스항은 바로 곁에 붙은 수피어리어항과 쌍둥이 항이다. 두 항에 경계가 없다. 다만 하나는 미네소타주에 그리고 또 하나는 위스콘신주에 속해 있다. 케놋샤항과 수피어리어항은 위스콘신주의 극과 극에 처해있는 셈이다. 우리는 양극에 와있었지만 위스콘신주의 내부는 하나도 보지 못하고 빙빙 돌아서 왔다. 오대호의 이색적인 것 하나는 카나다쪽은 온타리오주 하나만 오대호 연안을 감싸고 있고 미국쪽은 뉴욕주로부터 미네소타주까지 7개(?) 주가 오대호가 접해있다는 점이다. 이렇든 저렇든 오대호는 북미의 심장이었다. 그와 연관이 있는지 퀘백주에는 주로 프랑스인들이 많았는데 캐나다로부터 독립을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심장은 곧 다른 곳으로 옮겨갈 것이다. 움직이지 않으면 심장은 멎기 때문이다.

다음 날 대리점 작원 다니엘이 나를 시내 구경을 시켜주었다. 그때 중앙대로를 가르키면서 말했다. "이 대로변에 술집이 아흔 아홉 곳이나 있습니다."

나는 물었다. "도로에 차도 사람도 별로 보이지 않는데 무슨 술집들이 그렇게 많은가요."

다니엘은 이렇게 반문조로 답했다. "농민들이 농사짓고 술집에 가는 것 외에 뭘 하겠습니까?"

나는 공감조로 말했다. "그 점에 있어서 우리 선원들과 별반 다름이 없군요. 다만 농삿일과 뱃일이라는 직업만이 다를 뿐이네요."

어느 술집에 들어갔더니 농부들이 붐비고 있었다. 술도 한잔씩 마시고 미니 당구도 치고 카드도 하며 나름대로 무료한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미국 서부와는 술집 풍경이 많이 다르다. 같은 것이 있다면 카우보이 모자뿐이었다.

다니엘은 나에게 말했다. "켑틴, 여기는 미국 서남부 항구나 다른 도시와는 풍습이 많이 다릅니다. 인종도 다릅니다. 종교도 다르고요."

그러고 보니 흑인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교회 대신에 카돌릭 성당이 많은 듯했다. 여기 인부들은 미네소타를 아무리 들어도 '메니쏘다'로 발음하는 듯하였다. 다른 곳으로 옮기자고 해서 어느 디스코 바에 들렸더니 넓기가 체육관만 한데 그기는 온 동네 젊은이들이 요란한 음악에 맞춰서 춤을 추고 노는 곳이었다. 그런데 이미 우리 선원들이 와서 몇 년 묵은 체증이라도 풀기라도 하듯이 흔들어 대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빠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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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루스항에서 선원 7명이 교대를 했다. 귀국선원들을 공항까지 바래다주고 오는 길에 대리점에서 뉴욕에 전화를 했더니 부사장께서 친히 전화를 받으시고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다. "캡틴, 참 수고가 많소. 선원들도 다치고 배도 상하고 해서 오대호에 배를 잘 안 넣는데 사정상 그렇게 되었으니 계속 수고해 주시면 쏘련항 들어가기 전에 휴가 보내드리겠소."

나는 감사를 표시했고 휴가를 내려달라고 청원도 했다. 우리배는 총 적재량의 4분의 1 정도만 싣고 오전에 출항했다. '여기까지 언제 또 다시 오려나'하고 뒤돌아 보면서 떠났다. 삼촌 나이 또래의 호수 도선사가 '어제 저녁에 선원 클럽에 가서 탁구를 쳤지오'라고 물었다. 탁구를 치고 놀았기에 나는 궁금해 '어떻게 아시는지오'라고 물었더니 함께 탁구친 상대가 자기 아내라고 답했다. 과연 미국이구나. 도선사의 아내들이 '선원 클럽'에서 자원봉사로서 입항 선원들에게 교통 편의도 제공해주고 내쇼널 지오그래피같은 책도 배부해주고 함께 탁구 상대도 되어주고 한다니... 나는 그가 다음 갑문에서 하선할 때 안부와 함께 쏘련 기념품을 하나 전했다.

오대호 연안의 여러 항을 찾아들어서 이렇게 곡물을 집하해서 끝까지 채우기는 퀘백항에 가서 한다. 이것이 오대호식 곡물적재법인데 이는 강들 특히 갑문들의 수심 제한 때문으로 어쩔 수 없었다. 서남부항이라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왠만하면 이틀 이내에 약 3만톤의 적하를 한자리에서 마쳐버린다. 그리고 곧 출항하지만 해운업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는 특징이 있다. 출항한지 하루가 지났다. 파이오니어호는 수(Sault) 갑문과 세인트 마리(Ste. Marie)강을 통과했고 또 하루 남짓 남하하면 세인트 클레어강 어귀의 카나다쪽 사니아항에 닿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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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니아(Sarnia)항에 입항하다. 하역이 2~3일 걸린다기에 선원들은 대부분 부근의 공원에 나가 놀았는데 잔디밭의 촉감도 좋았고 건너온 휴런호의 푸른 물결도 고왔을 뿐만 아니라 사니아 시민들의 가족 나들이 모습이 아름다워 절로 눈길이 가고 있었다. 갖난 애기로부터 젊은 부부 그리고 아가씨들 또 혹은 연만하신 노친들의 다정한 표정에 사람 냄세가 나는 듯해서 참 좋았다. 캐나다는 공원에서 술을 마시지 못한다.

무료한 우리 일행 몇사람은 택시를 타고 숍핑 몰로 나드리를 갔다. 돌아올 때 술 한병과 컵을 구입하고 안주로 싱싱하게 보이는 쇠간을 골랐다. 찍어 먹을 소금과 토막낼 작은 칼도 하나 샀다. 그리고 우리는 인적이 드문 어느 길가의 풀밭으로 옮겨가서 자리를 잡았다. 칼이 문방구용이라서 너무 작아 큰 쇠간을 토막 내기에 어려워 대강 썰어서 입에 넣었더니 입 수변의 경치가 벌겋게 되고 우스웠지만 보는 사람이 없어 한잔 넘기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재밌는 소풍이었다.

그 때였다. 경찰 순찰차가 달려와 우리들 옆에 차를 세우더니 뭘하냐고 물었다. 우리는 쇠간을 입에 문 벌건 입술을 가리며 말을 못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곁에 오더니 상황을 파악하더니만 일행을 모두 차에 태우는 것이 아닌가. 그제서야 나는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고속도로변 음주행위는 위법이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경찰서에 붙잡혀 갔지만, 우리가 자기들이 추수한 곡물을 실어나갈 외항선 선원들이란 점을 감안하여(?) 배에다까지 친절히 태워 주었다. 기분은 상했지만 택시비 안 들고 배에 돌아온 것으로 만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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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배는 사니아항에서 곡물 일부를 다시 집하해서 출항했다. 세인트 클레어강을 그리고 세인트 클레어 호수 다시 디트로이트강을 따라 나와서 이리호에 들어왔다. 그리고 얼마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는 오하이오주의 털리도(Toledo)항에 입항했다. 대리점 직원 제임스는 하역이 며칠 걸린다고 하면서 내일은 선원들과 함께 바람을 쐬러 가는데 시내 축제 구경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게 준비하겠다고 약속했고 저녁 식사후 선원 10여 명으로 참가자 리스트를 미리 작성했다.

우리가 도착한 장소는 야외 행사장으로 가운데 무대장치가 있었고 그 주위를 부챗살처럼 둘러싼 높은 스탠드가 가리고 섰었는데 제임스는 우리를 적당한 자리에 모두 앉혔다. 그들은 행사의 시작으로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을 낭독하였다. 미국 행사장에서 그들이 엄숙히 선언하는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구절은 감회를 새롭게 하고도 충분했다. 그리고 그 연설이 약 2분간의 짧은 연설이었다는 점도 처음으로 알아서 과연 링컨이구나고 그의 스마트한 재치를 실감했다. 행사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의 일이었는데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한 것은 사회자가 이렇게 외쳤을 때였다.

"저 멀리 한국의 서울에서 온 손님들이 이 자리에 참석하셨습니다."

이와 함께 모든 조명들이 무대로부터 일어나 우리에게로 집중했었고 동시에 우레와 같은 박수 세례를 받았다. 우리 일동이 일어나 두 손을 흔들자 박수소리는 더 커졌었다. 나의 일생에 전무후무할 경사일 것이었다. 미국의 서남부에서는 이젠 한국인이라고 해도 별로로 여긴다. 그러나 이곳 동북부 시골에서는 아직도 한국에 대한 정서가 살아있었다. 물론 한국전에 참가한 오랜 정서였지만 말이다. 사고치는 한국인들도 아직은 이런 시골까지 진출하지 않아 보였다.

작업을 마치는 날 오전에 관광버스 한 대가 부두에 와닿아 사람들이 내리더니 모두 우리 배에 올라오는 것이었다. 대부분이 아주머니들과 할머니들로 보였다. 이상하다 했더니 일등항해사 얘기에 의하면 이 곡물들을 재배한 농부들이라 했다. 그들은 이 곡물이 어디로 실려가느냐고 물었다. 쏘련간다고 했더니 그들에게 안부 전해달라는 부탁도 했고 브릿지에 올라가 한참이나 배 구경과 싣는 장면 촬영도 했다. 그리고 어떤 분은 선장 사무실에 찾아와 손가락을 빨며 커피를 좀 내 놓으라고도 했다. '쏘련 사람들하고는 꽤 많이 다르구나'고 나는 내내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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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백항을 출항하여 오대호를 한바퀴 돌아서 퀘백 외항에 되돌아오니 총거리 7,577km 이동에 날짜가 41일 걸렸다. 오대호는 한반도와 비슷한 면적을 지닌 호수다. 한반도를 자전거로 40일 가량 누비면 어느 정도 다 볼가 궁금해진다.

외항에서 마무리 적재(Topping)를 대기하는 동안 선원들이 혹시나 하며 낚싯줄을 드리웠다는데 대구가 줄줄이 올라온다는 어신이 선장실까지 들려온다. 늦게 낚시터에 내려가 보니 갑판위가 대서양 대구로 난장판이다. 씨알이 좀 작은 걸로 보아서 세인트 로렌스 만이 대구 산란지처럼 여겨진다.

토르 헤이에달의 에 의하면, 가령 대구가 산란에서 성어까지 모두 무사히 살아서 남는다면 3년 몇 개월만에 대서양이 대구로 가득 찬다는 계산 이 나온다고 했다. 오대호와 세인트 로렌스 강과 만을 빠져 나오면서 감회가 착잡하다. 위대한 자연도 절감했지만 이에 반한 거대한 토목 공사와 오염이라는 인간 문명의 반역으로 인한 생태계의 파괴도 피부에 와 닿았다. 우리는 오대호에서 물고기 한 마리도 낚지 못했다. 원래 오대호가 그랬을 리가 만무하지 않았겠는가. 주방장이 이처럼 처리하지도 못할 고기를 좀 그만 잡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나에게 어필했다. 나는 그 말을 접수했다. 곧 입항 도선사가 승선한다고 말하며 낚시터 청소를 지시했다. 내일이면 퀘백항을 출항하여 북대서양 고위도 항해를 시작한다. 그에 대비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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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배 파이오니어호는 약 3만톤의 밀을 싣고 퀘백만을 빠져 나와서 북대서양을 건네고 있다. 무선사에게 빙산 주의보가 잡히는지 계속 신경을 쓰라고 부탁했고 항해사들에겐 레이다 망에 유빙이 잡히는지 지속적인 감시를 지시했다. 이 바다와 세인트 로렌스 강은 일찍이 프랑스 항해가 자크 카르티에(1491~1557)가 몇 차례나 왕복 항해를 했었다. 어떤 때는 20일만에 또 어떤 때는 70일만에 이 바다를 건넜었다. 그리고 탐험도 했다. 당시에 카르티에 선장은 캐나다와 세인트 로렌스 강을 금이 많이 나는 중국강으로 알았다. 그런 의미로 프랑스와 1세도 카르티에 선장을 후원했다. 금은 구하지 못 했지만 카나다 동부 영토를 얻은 것이었다. 마치 컬럼버스가 카리브 제도를 황금의 땅 인도로 오인했지만 중남미 속국들을 얻은 것처럼.

배가 곡물을 만선하면 좋은 점이 있다. 배의 복원력이 적당히 좋아서 여간 선체가 파도에 굴러도 별로 우려하지 안 해도 된다. 안개가 몰려오기도 한다. 발틱해로 찾아가는 중인데 어느 나라로 가는지는 아직 알려오지 않는다. 부사장과의 약속대로 나는 영국의 북해를 건너서 코펜하겐항에서 휴가차 하선할 예정이다. 일등항해사가 덜루스에서 교대 멤버로 왔었는데 그는 쏘련항이 처음이 라고 해서 여러 가지 주의사항을 주지시켰다.

후기

배는 레닌그라드로 가게 되었고 나는 코펜하겐항에서 하선하지 못하고 교대한 선장이 역시 쏘련항이 초행이라서 함께 발틱해를 건넜고 레닌그라드에서 같이 지냈으며 2주후 출항했는데 도중에 핀란드의 헬싱키항에서 하선했다. 호텔에 찾아들어서 누우니 폴란드 출생의 영국 선장 출신 해양문학가 조지프 콘래드(Joseph Conrad 1857~1924)가 생각났다. 아래는 그의 묘비명으로 알려지고 있다.

"Sleep after toyle, port after stormie seas, Ease after war, death after life does greatly please."

(수고가 끝난 후의 수면, 폭풍우치는 바다를 항해한 후의 항구, 전쟁이 끝난 후의 안락함, 삶 다음의 죽음은 위대한 기쁨을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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