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택을 찾아서] 4. 거창 정온 선생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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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과 北 한옥의 조화… 강추위·무더위 모두 피한 지혜

정온 선생 가옥의 사랑채 누마루를 보면 지붕에 다시 지붕을 덧댄 '눈썹지붕' 형태인데, 멋스러움과 그늘을 끌어들이기 위한 실용성을 겸비한 장치다.

경남 거창군 위천면 강동마을 정온 선생 가옥을 찾아간 날은 한파주의보가 내린 날이었다. 위천교를 건너 마을 어귀에 들어서니 한눈에 목적지가 잡힌다. 높다란 솟을대문에 당당한 기와집들이 고택의 품격을 여지없이 말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겨울 강풍 심하고 여름 고온다습한
경남 거창 지역 기후 특색에 맞춰
남방식·북방식 가옥 형태 섞인 형태

영남에선 드문 '겹집'으로 추위 막고
높은 '대청의 퇴'는 더위 피하는 효과

정온 선생 15대 종손 정완수 선생.
■남방·북방 특징 골고루 갖춰

정온 선생 가옥은 동계(桐溪) 정온(鄭蘊·1569~1642)을 불천위(나라에 큰 공훈이 있거나 덕성과 학문이 높은 분에 대해 사당에서 영구히 제사를 지내도록 허락된 신위)로 모시는 고택으로, 동계종택이라고도 한다. 1820년께 후손들이 중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국가민속문화재 제205호.

마침 대문이 열려 있었다. 미리 약속한 표선자 거창군 문화관광해설사 혼자서 툇마루에 쪼그리고 앉아 햇볕을 쬐고 있었다. 남향집이라 햇살이 따사로웠다.

솟을대문 앞에 서자 붉은 바탕에 흰 글자의 현판이 돌올하다. '文簡公桐溪鄭蘊之門(문간공동계정온지문).' 효종 임금이 동계의 증손 정기수에게 내려준 동계의 시호가 문간공이다.

대문간을 들어서자 사랑채가 우뚝하다. 사랑채는 ㄱ자형으로 정면은 여섯 칸, 측면은 누마루가 붙어 있는 두 칸 반 규모다. 누마루는 3면에 '들어열개 사분합문'을 달아 공간을 언제든지 여닫을 수 있게 했다. 분합문들은 아래위를 삼등분해 가운데는 완자살, 아래위는 정자살로 멋스럽다.

사랑채 현판들이 눈에 띈다. 집 가운데쯤에 忠信堂(충신당)이란 당호의 필체가 예사롭지 않다. 역시 추사 김정희의 친필이란다. 오른쪽에 某花屋(매화옥)은 대원군 글씨이고, 某窩(모와)는 의친왕 이강 공의 글자체다. 동계 선생이 말년에 덕유산 자락 모리(某里)에서 죽은 것과 관련된 현판들이다. 1909년 의친왕(이강)이 이 집에서 한 달여간 머문 적이 있다. 독립자금 모금을 위해 전국을 돌아다닐 때였다. 구한말 승지를 지낸 정태균과 친분이 두터웠던 이강은 정태균의 호를 모와로 지어줬다. 정태균은 현재 이 집의 주인장인 동계의 15대 종손 정완수(76) 선생의 증조부다.

이 집은 영남에선 보기 드문 겹집 형태를 띤다. 경남 거창은 금원산(1353m), 기백산(1331m) 등 높은 산들로 둘러싸인 분지여서 남쪽 지방에 있으면서도 겨울엔 춥고, 여름엔 고온·다습한 날씨를 보인다. 이 때문에 북방식과 남방식 한옥의 요소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방과 방을 칸막이로 연결하는 두줄박이 겹집 형태는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한 지혜다.

반면 여름 무더위를 이겨내기 위한 장치가 높은 대청의 퇴다. 또 누마루를 보면 지붕에 다시 지붕을 덧댄 '눈썹지붕' 형태인데, 멋스러움과 그늘을 끌어들이기 위한 실용성을 겸비한 장치다. 하늘을 이고 있는 듯한 지붕의 용마루에도 '눈썹'이 붙어 있다. 착고와 부고 사이에 기와 한 장 너비로 짧은 기왓골을 내었다. 이것 역시 장식적인 효과와 함께 빗물이 스며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남방적 요소다.

중문을 거쳐 안채로 들어간다. 안채는 여성들의 주거공간인데도 정면 8칸의 큰 규모다. 여기다 건넌방 앞의 툇마루를 높이고 난간을 둘렀다. 이 집 여성들의 위상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안채 오른쪽엔 뜰아래채가, 왼쪽엔 곳간채가 자리했다.

안채 뒤쪽에 사당이 있다. 사당에는 정조의 어제시가 붙어 있어 이 집의 내력을 말해 준다.

"세월이 흘러도 푸른 산이 높고 높듯/천하에 떨친 바른 기상은 여전히 드높아라/북으로 떠난 이나 남으로 내려간 이나 의로움은 매한가지/금석같이 굳은 절개 가실 줄이 있으랴."

북으로 떠난 이는 병자호란 당시 척화론자였던 김상헌이며, 남으로 내려간 이는 바로 동계다.
겨울철 난방에 도움이 되는 높은 굴뚝.
■멸문지화의 위기를 벗어나다


동계 정온은 조선 선조·광해군·인조 때 학자로 대사간, 경상도 관찰사, 이조참판 등을 지냈으며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학풍에 두루 영향받은 대유(大儒)로 평가된다.

1614년 광해군이 나이 어린 영창대군을 증살하고 생모인 인목대비마저 폐출하려 하자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에서 10년간의 위리안치를 당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석방, 헌납에 등용됐다. 1636년 병자호란을 겪을 당시엔 이조참판으로서 김상헌과 함께 척화를 주장하다가 '삼전도의 굴욕'을 목도하면서 할복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후 모든 관직을 내려놓고 덕유산 모리에 은거, 고사리와 미나리만 먹으며 연명하다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의 백이·숙제를 연상하게 한다.

동계의 항거 정신은 그의 현손(손자의 손자) 정희량(?~1728)에 와서 폭발했다. 1728년 조선 후기 최대 민란인 이인좌의 난(무신난)에 연루돼 정희량은 참수됐다. 정희량은 영남지방 총책이었다. 이로 인해 동계 집안은 멸문지화의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정조는 동계 집안에 대해 사면을 내린다. "동계와 같은 충신의 제사가 끊기게 해서는 안 된다"는 사대부들의 간언을 수용한 것이다.

정씨 집안을 다시 일으킨 인물은 영양 현감을 지낸 야옹 정기필(1800~1860)이다. 정기필이 살던 집이 동계종택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반구헌(경남문화재자료 제232호)이다.
안채 처마 밑에 매달린 메주들.
■대를 이은 손맛

이 집에는 15대 종손 정완수 선생과 부인 류성규(71) 여사가 모친(최희·92)을 모시고 산다. 정 선생 부부는 10여 년 전에 연로한 모친을 부양하고 집안을 지키려고 낙향했다.

14대 종부 최희 씨는 경주 최 부자 집 맏딸로, 15세 때 이 집으로 시집왔다. 최 부자 집의 현재 종손인 최염 선생의 누나다. 부인 류성규 여사는 안동 명문가 전주 류씨 류치명의 직계 자손이다. 가계도가 범상치 않은 집안임을 단박에 알 수 있다.

풍수학자 조용헌은 "금색 원숭이의 정기가 뭉쳐 있다는 뜻의 금원산을 배경으로 한 동계종택은 그 강강한 기세가 무림 고수가 살기에 적당한 집이라는 이미지를 준다"고 쓴 적이 있다. 이 집에서 동계나 정희량 같은 반골 선비가 나온 게 풍수지리와 관련이 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동계 집안엔 현대에 들어서도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걸출한 인물이 많이 배출됐다.

어쨌거나 최희·류성규 고부의 대를 이은 음식 솜씨는 익히 알려졌다. 이 집의 장맛은 일품이다. 고부가 직접 담근 장(된장, 고추장, 간장)은 '기왓골'이란 상품으로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다. 각종 장아찌와 육포도 이 집의 자랑거리다.

아쉽게도 기자가 찾아간 날은 집이 텅텅 비어 있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후한 인심을 베풀며 접빈객에 빈틈이 없던 최 할머니와 정 선생 모자는 병환으로 서울에 출타 중이었다. 류 여사는 딸이 있는 미국에 잠시 머물고 있다고 했다.

다행히 다음 날 오전, 집 사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다시 동계종택을 찾아갔을 때 마침 정 선생이 서울에서 막 도착해 대문을 열고 있었다. 그러나 정 선생은 큰 수술 후유증 탓인지, 컨디션이 좋은 상태가 아니어서 오래 붙들고 있을 수가 없었다. 궁금한 것 몇 가지만 묻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 선생은 "멀리까지 왔는데, 식사 한 끼 대접하지 못해 죄송하다"며 연신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대문간에 서서 한참 이쪽을 바라보는 선생의 모습이 승용차 후사경에 흐릿하게 비쳤다.

글·사진=윤현주 선임기자 hohoy@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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