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천년 왕조의 원동력 '과거시험'

  • 이도국 여행작가·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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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4-28 07:32  |  수정 2023-04-28 07:34  |  발행일 2023-04-28 제35면
어렵게 대과 급제해도 보임은 별개…보직 두어 번 맡고 나면 대부분 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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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속화, 과거 시험장의 모습. 작가 미상. 〈국립민속박믈관 소장〉

고려 광종 때(958년) 처음 실시한 과거제도는 갑오개혁(1894년)으로 폐지될 때까지 천년 사직과 함께했다. 백성의 출세 사다리였고 인재의 순환 통로였다. 수많은 역사적 인물이 과거로 등장했고 역사의 한 축이 되어 왕조를 유지하는 원동력이 됐다. 급제자에게 나라에서 내리는 연회를 은영연(恩榮宴), 집안에서 벌이는 잔치는 용문에 이르렀다고 도문연(到門宴)이라 했다. 세 아들이 과거에 오르면 그 어머니에게 잘 키웠다고 늠록을 주었고 다섯 아들이 과거에 오르면 오자등과댁이라 칭송했다. 하지만 급제와 보임은 별개였다. 과거는 과연 양반계층의 전유물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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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방목, 갑오식년시에 실시한 소과 생원 진사시의 합격자 명부로 3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국립대구박물관 소장〉

◆소과와 대과(문과)

'계사년 춘삼월에 소과합격하고 이듬해 식년시에 대과급제하여'같이 옛글에 소과합격과 대과급제가 한 문장으로 나오니 소과를 대과의 1차 시험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소과는 1차 시험이 아니라 엄연한 과거이다. 글공부하는 유생은 많고 벼슬자리는 한정돼 있으니 대과로 관리를 뽑고 소과는 성균관 입학자격과 명예를 주었다. 소과와 대과의 1차, 2차 시험이 초시와 복시이고 3차 전시(殿試)는 대과에만 있었다. 대과는 유학(幼學·유생 신분)이면 누구나 응시할 수 있어 조선후기 대과급제자의 80%는 소과 없이 대과만 합격했다. 대과에 합격하면 홍패를, 소과에 합격하면 백패를 받았다.

대과합격자 명부가 국조방목, 소과합격자 명부가 사마방목이다. 3년마다 열리는 식년시(자·묘·오·유년의 정기과거)와 증광시(경축과거)에 함께 실시됐다. 대과는 초시 240명, 복시 33명을 뽑았고 소과는 생원시와 진사시로 나뉘어 각각 초시 700명, 복시 100명을 뽑았으며 합격자를 허생원·박진사와 같이 벼슬처럼 불렀다. 초시는 지역별로 합격자수를 안분했고(경상도는 대과 30명, 소과 각 100명) 향시라 했다. 향시장소는 고을별로 순환했고 합격자를 마찬가지로 벼슬처럼 불렀다. 황순원의 단편소설, 소나기의 주인공이 윤 초시 증손녀이다.


'소과'를 '대과'의 1차 시험으로 종종 오해
소과 합격시 관리 임용 대신 성균관 입학 자격
영남선비는 학식 뛰어나도 대과 미응시 많아

당상관은 하늘의 별따기…7품 참하 마치기 일쑤
'무과' 평민·서자도 응시 가능해 신분상승 기회
조선 오백년 왕업에 무반 반란 단 한번도 없어



대과는 어려운 시험이니 풍진 세상에 소과만으로 나라에서 인정하는 인물로 대우받고 학자로서 사회적 명망을 누릴 수 있었다. 합격자 평균 연령도 소과가 높았으며 향교·서원의 청금록(유생명부)에 이름을 올리고 향촌 유림을 이끌었다. 소과를 사마시라 하는데 고을마다 합격자 모임인 사마계, 명부인 사마안이 있었다. 이는 고대 중국에서 관리 천거인물을 대사마라 하는 데 연유했다. 또 '감시와 동당시'가 짝인데 감시(監試)가 소과, 동당시가 대과이다. 대과 과거장이 동당(東堂)이다.

조선왕조 오백년 동안 소과 229회, 대과 500여 회 열렸으며 합격자는 소과가 4만5천명, 대과가 1만5천명이다. 별시인 정시·춘당대시·알성시는 대과만 열어 소수 인원을 뽑았다. 조선후기 영남문중이 명문가임을 내세울 때 '대과14장·소과66장'처럼 소과를 대단하게 여겼다. 영남선비는 학식이 뛰어났더라도 대과에 응시하지 않은 인물이 많았고 진사 이상 벼슬은 하지 말라는 유명도 있었다.

◆무과와 잡과

무과는 고려 때 거의 없었고 조선초 문과와 함께 실시됐다. 선발인원은 28명인데 대체로 지켜졌고 많이 뽑을 때도 50명 내외였다. 그런데 갑자기 수천 명을 뽑는 별시가 더러 있었는데 이로 인해 무과급제자수가 10만명이 넘었고 질이 떨어지는 과거로 여겼다. 수천 명을 뽑은 특별무과는 당시 국제정세에 따른 긴급 군병모집 과거였다. 조선 군대는 속오군(양민·천민 군역군대)으로 전투력이 약했다. 나라가 위급할 때 전투력을 강화하고자 신분을 불문하고 무예에 능한 군병모집에 무과과거를 활용했다.

군병모집 무과는 임란 때 황해도 장정을 군병으로 만들기 위한 행재소 별시, 광해군 때 명과 후금 전쟁에 실리외교를 펼쳤던 강홍립의 만주출병 군병 8천200명, 병자호란 때 인조의 남한산성 호종 군사를 위한 산성무과 6천500명, 또 숙종 초 청나라에서 삼번의 난이 일어나자 호운불백년(胡運不百年)이라 하며 북벌준비로 실시한 만과(萬科) 1만4천200명. 만과 급제자는 청의 강희제가 명의 오삼계를 진압하자 유야무야됐다. 이 밖에 정조 때 문효세자 책봉 증광시에 2천700명, 개화기 마지막 과거에 신식군대 자원 1천150명 등이 있었다. 이러한 군병모집 특별무과를 제외하면 문과와 별반 다르지 않았고 국조방목에 수록된 급제자도 3만명이다.

서자는 물론 천인도 면천되면 무과에 응시할 수 있으므로 평민의 신분상승 기회가 주어져 사회적 의의가 컸다. 문반 우위의 조선 오백년 왕업에 무반 반란이 한 번도 없었다. 무관이라 할지라도 충효를 중요시한 성리학을 일찍부터 배웠으며 주로 변방을 지키는 고된 업무이지만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고 세종 이래 국토가 한 뼘도 줄지 않는 것도 무반의 공이 컸다.

잡과는 기술직 과거인데 역과(통역), 음양과(천문), 의과(의술), 율과(법률)로 4과이다. 식년시와 증광시에 열렸고 각각 10명 미만을 뽑았다. 중인이 주로 응시했고 3품 당하관까지 승진했다. 역과 출신인 역관은 중국어 일본어 통역을 담당했고 조선후기 밀무역으로 거대한 부를 축척한 역관집안이 출현했다. 밀양변씨 변승업, 인동장씨 장현, 김해김씨 김근행, 우봉김씨 김지남 집안이다. 대대로 세습했고 당상역관이 돼 역사 무대에 등장하기도 했다. 1712년 백두산 천지 남쪽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울 때 실제로 올라가 국경을 실측한 인물은 역관 김경문이었고, 천주교 신도로 밀양에 유배, 최초로 희생된 김범우와 개화기 선각자 오경석도 역관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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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문과 시권(답안지). 상주 조정종가 문적으로 가로 228cm 세로 80cm 크기의 보물 문화재. 〈상주박물관 소장〉

◆과거 시험문제

과거 답안 종이는 명지(明紙)라 하여 응시자가 준비했고 붓 벼루와 함께 과장으로 가져갔다. 소과생원시는 경전 지식을, 진사시는 시부 짓기였고 문과는 대책을 묻는 논술이었다. 문과시험은 무척 까다로워 백지 답안지가 많았다. 문과 문제로 세종은 윤대(輪對·신하와 국왕만남)시 신하들이 서로 이간질하는 것을 막을 방법을 물었고, 세조는 북쪽 변방의 인구는 줄고 남쪽 인구는 늘어나는데 효율적인 나라 대책을 제시하라며 오늘날 고민거리를 오백년 전에 출제했다. 정조는 사물에는 본디 매우 작으나 이치가 담겨있는 것이 있다며 귤을 사례로 들어 사람의 기호와 자연의 이치를 설명하라는 문제를 냈다.

숙종 때 영양 주실마을의 조덕순은 1690년 식년시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올라와 도성 사람들에게 지금 가장 급선무가 무엇인지를 물으니 한결같이 도둑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고 했다. 그는 며칠 동안 곰곰이 대안을 생각했고 과거에 도적 해결방안이 출제됐다. 조덕순이 쓴 답안은 어느 시대인들 도둑이 없고 어느 나라인들 도적이 없으랴만, 그것을 다스리는 법이 세대마다 같지 않다며 법집행의 엄정함보다 교화라고 하는 인정(仁政)을 근본 처방으로 제시했다. 이 답안으로 조선후기 영남선비로 드물게 장원급제했지만 등과 3년 후 사헌부지평 시절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옥천 조덕린의 친형으로 시인 조지훈의 선조이다.

◆급제와 보임

어렵게 대과 급제하여 향리에서 도문연을 열고 사흘 동안 유가(遊街·고을행진)를 벌이며 가문의 영광이라 했지만 보임은 별개였다. 영남선비는 글을 잘 지어 주로 겸춘추에 보임됐고 조선후기에는 두어 번의 임기가 끝나면 더 이상 보직을 받지 못해 대부분 낙향했다.

영조 전후로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조태억과 유척기는 영남에는 문과급제자가 90~100명이나 있지만 겨우 한 고을 살고는 더 이상 보임을 받지 못해 초야에 묻혀 울분을 삼키고 있다고 조정으로 서계를 올리기도 했다. 당시 영남인물의 당상관 보임은 하늘의 별 따기였고 참상은커녕 7품 참하로 마치기 일쑤였다. 급제자는 계속 배출되고 관직은 한정돼 있으니 힘없는 영남 급제자는 녹봉 없는 무보직이 많았고 이를 벼슬 운이 없다고 하며 하늘의 뜻으로 여겼다.

◆역사적 인물과 오자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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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국 (여행작가·역사연구가)

고려시대부터 역사적 인물은 대부분 과거로 등장했다. 고려의 강감찬 서희 윤관 김부식 이규보 안향 이제현 문익점 정몽주 정도전은 모두 문과 급제자였고 고려와 원나라 과거 동시 급제자는 이곡·이색 부자를 비롯하여 10여 명이 나왔다. 고려시대 문관 최고 선호직은 과거시험관으로 급제자들은 그를 좌주(座主)라 부르며 평생 스승으로 모셨다.

또 다섯 아들이 등과한 집안을 오자등과(五子登科)댁이라 하여 크게 우러러 보는데, 낳아 키우기도 힘들거니와 모두 과거 급제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선조 때 문장가 김시양은 자해필담에서 아들 5형제가 급제한 집안은 겨우 몇 뿐인데 여말에 단양우씨 우현보, 세종조 순흥안씨 안관후, 전의이씨 이예장, 성종조 광주이씨 이극배, 중종조 함양박씨 박홍린, 선조조 남원윤씨 윤서 집안이라면서 그 집안 터를 명당이라고 했다. 영남에서는 학봉 김성일 본가인 의성김씨 내앞 대종가를 오자등과댁(소과 포함), 풍산 오미의 풍산김씨 김대현 집안을 팔연오계(소과 여덟, 대과 다섯)라 하여 명문가로 우러렀다.

조선후기 과거급제자의 50%가 양인 출신으로 신분이동이 역동적이라는 최근의 연구 결과가 나왔고 18세기부터 서얼에게도 문과 과거 문이 열렸다. 실제로 한미한 가문에서 등과하여 동량재가 된 인물이 무척 많다. 조선 750여 문중에서 문과 급제자를 배출했다. 어느 제도인들 폐단이 없으랴만 과거는 나라에 새로운 인재를 공급하여 역사를 순환시켰고 고려·조선을 천년왕조가 되게 한 원동력이었다.

여행작가·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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