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투데이=장호영 기자|

‘인천투데이’는 ‘인천민주화운동센터’의 도움을 받아 이달의 민족‧민주‧노동열사를 소개합니다. 열사의 삶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것이 앞으로 한국과 인천의 민주주의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천에서 1970~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에 헌신하다 운명한 열사는 89명에 달합니다. 매월 초 민족‧민주‧노동열사의 삶을 소개하고 열사의 삶을 기억하는 이의 목소리도 담습니다.

▲ 변형진(사진 없음) - 1986년 5월 1일 39세 운명

1948년 3월 16일 강화도 삼산군에서 태어나 1976년 대성연탄에 취직 후 1981년 택시기사로 일을 시작했다. 1985년 삼환택시에 입사했다.

당시 택시 43대로 기사 115명이 하루 10~12시간씩 연장수당 없이 일하는 열악한 노동조건이었고 대물사고 처리비용과 세차비까지 모두 노동자에게 부담시킬 정도였다.

열사는 열악한 노동조건과 회사 횡포에 맞서 당당히 항의했는데, 차를 몰고 좁은 회사 골목을 나오던 중 마주오던 사장의 차와 마주쳐 뒤로 비키지 않고 나간 것을 빌미로 사장이 ‘자기를 모독했다’는 이유로 1986년 4월 22일 해고했다.

열사는 다음날부터 복직을 요구하며 출근투쟁을 벌였고, 4월 30일 비장한 각오로 “복직을 안시키면 분신하겠다” 경고했으나 사장은 “죽을 려면 죽어”라고 빈정거렸다. 결국 열사는 오후 2시 30분께 온 몸에 시너를 붓고 불을 당겼다.

회사측은 아무도 모르게 열사를 병원에 옮겼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가족과 동료에게 면회도 시켜주지 않으며 회유와 협박을 했다. 열사는 5월 1일 가족들에게 “미안하다. 하지만 이 길 밖에 없다. 노동자들이 떳떳하게 잘 사는 세상이 와야 할 텐데”라는 말을 남기고 운명했다.

▲ 조정식 - 1989년 5월 2일 25세 운명

조정식.
조정식.

1964년 1월 17일 대구시 수성구에서 태어나 1982년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 입학해 학생운동을 했다. 1984년 7월 대학교에서 제적된 후 인천 범아산업에 취직 후 1986년 5월 인천 ‘진도’에 입사해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1987년 11월 반제동맹사건으로 치안본부 인천 대공분실에 불법 연행돼 고문을 당하고 0.7평의 독방에 수담됐다. 1988년 석방 후 1989년 5월 10일 영전기계 선반공으로 취업했다. 힘들지만 노동자들과 생활을 좋아했던 열사는 5월 24일 공장에서 일하 던 중 뒤에서 튀어나온 30㎏ 무게의 추에 머리를 맞고 병원으로 옮기던 중 운명했다.

▲ 박영근 - 2006년 5월 11일 48세 운명

박영근.
박영근.

1958년 9월 3일 전북 부안군 산내면 마포리 산기마을에서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74년 전주고등학교에 입학 후 ‘홈룸’ 시간에 시국 관련 발언으로 학교의 요주 인물이 됐고 더 이상 억압적인 학교생활이 불필요하다고 판단해 자퇴했다.

1975년 17세 나이에 고등학생 문학서클 모임에 참여하고 시화전을 개최했는데, 소비에트 혁명 등을 빗댄 창작시 때문에 경찰 조사와 가택 수사를 받기도 했다.

1976~1979년 서울 종로에서 민청학련 관련 인사를 만나 민주화운동 관련 토론모임을 했고 인천 동일방직 노동자들과 교류했으며, 종로 초동교회 청년회 활동과 한국기독교회협의회를 비롯해 민주화를 바라는 기독교와 재야인사들의 모임에도 참여했다.

군대 제대 후 1981년 민중문화운동 인사 등 각계각층과 교류하며 신촌에서 쌀가게를 운영했고 동인지 ‘말과힘’을 발간하며 ‘반시(反時)’ 6집에 시 ‘수유리에서’ 등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1985년부터 1995년까지 부평 산곡동에서 살다가 부평4동으로 이사해 2005년 11월까지 생활했다. 인천민족예술인총연합회와 민족문학작가회의 인천지회를 창립하는데 함께 하고 간부를 역임했다. ‘솔아솔아 푸르른 솔아’등 다수의 작품을 남기고 2006년 5월 11일 오후 8시 40분 결핵성 뇌수막염과 패혈증으로 운명했다.

▲ 배동복 - 1999년 5월 17일 37세 운명

배동복.
배동복.

1963년 5월 인천 덕적도 출생으로 동인천중학교와 정석고등학교를 중퇴했다. 양은을 만드는 공장에 다니며 일찍 노동자의 삶을 시작했다.

1991년 초 롯데기공에 입사해 풍물과 인연을 맺고 관리자의 부당한 횡포에 맞서 싸우다가 5년 8개월 만에 롯데기공을 그만뒀다. 1996년 8월 영창악기에 입사해 노동조합 8대 집행부 초기 풍물패 ‘어울림’을 만들어 초대 풍물패장으로 활동하며 민주노조 건설에 큰 역할을 했다.

1999년 5월 17일 퇴근길에 과속으로 달리는 덤프트럭에 치어 장파열로 병원에 실려가던 중 운명했다.

▲ 조경천 - 1993년 5월 19일 48세 운명

조경천.
조경천.

1945년 7월 29일 평양 출생으로 1963년 고등학교 중퇴 후 공장생활을 시작했다. 1981년 한양합판에 입사했고 1987년 노동자 대투쟁 후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느끼고 1988년 한양합판 노조 결성에 주역으로 나섰다.

1991년 해고될 때까지 노조 회계감사를 맡으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회사측은 열사가 휴식시간을 이용해 전체 조합원에게 회계 보고를 한 것을 문제 삼아 해고했다.

해고 후 열사는 인천지역 해고노동자협의회에 속해 동료들과 해고 반대 투쟁과 지역연대 투쟁에 앞장섰다. 1993년 4월 고등법원에서 승소했지만 회사측은 법원의 판결과 단체협약을 무시한 채 복직을 거부했고 임금도 주지않으며 오히려 사표를 강요했다.

해고 전부터 가슴의 통증을 느끼던 열사는 해고 후 건강을 더 해친 탓에 1992년 심근경색 판정을 받았다. 수술하면 완치될 수 있었으나 수술비가 없어 미뤘고 1993년 고등법원 판결에도 회사측이 거부한 후 그해 5월 19일 심장마비로 운명했다,

가족과 해고노동자들이 병원 영안실 농성과 회사 정문 앞 투쟁으로 보상 등 합의를 이끌어내고 20여일 후 인천지역 해고노동자장으로 장례를 치뤘다.

▲ 김기옥 - 1992년 5월 30일 35세 운명

김기옥.
김기옥.

노동자 대투쟁이 있던 1987년 인천지역 영진운수에서 초대 노조 위원장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인천지역 택시 노동자들의 총파업투쟁을 이끌며 구속됐다.

1989년 영진운수 3대 노조 위원장으로 선출돼 택시노동자들의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투쟁을 진행했다. 1991년 복직 후 현장 활동을 하던 중 1992년 5월 30일 취객에 의한 폭행으로 운명했다.

▲ 김순종 - 2002년 5월 31일 35세 운명

김순종.
김순종.

1966년 경북 영주 출생으로 영주에서 고등학교까지 나온 후 1987년 인천대학교 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 1987년 동아리 풍물패 ‘울림’에 가입하고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군대를 다녀온 후 1991년 인천대 후배사랑 예비역모임과 동아리 ‘활동사진’ 준비위원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1992년 인천대 총대의원회 의장을 했고 1994년 대학 졸업 후 노동현장에서 활동했다.

1995년 인천평화복지연대의 전신인 평화와 참여로 가는 시민문화센터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98년 평화와 참여로가는 인천연대 서지부 지부장, 인천대 민주동문회 초대회장을 역임했다.

1999년 한성운수와 2001년 신신운수 입사 후 택시노동자로 살았다. 2002년 5월 31일 오전 10시께 사고로 운명했다.

▲ 이효윤 - 2011년 5월 31일 51세 운명

이효윤.
이효윤.

1960년 경남 출생으로 1987년 인천 소재 청보환경에서 근무 중 체불임금 정산투쟁을 하는 과정에서 분신과 투신으로 2급 장애인이 됐다.

1989년 청보환경 관련으로 구속됐으며 출감 후 인천 일용공노동조합 창립을 주도했다. 2011년 5월 31일 당뇨 등 합병증으로 인한 저혈당 쇼크사로 운명했다.

▲ 박기연 - 2006년 6월 3일 47세 운명

박기연.
박기연.

1959년 태어난 뇌병변 1급 중증장애인으로 본인 몸조차 가누기 힘든 환경에도 누구보다 앞장서서 장애인 차별에 대항해 투쟁했던 활동가이다.

2000년 서울 중심으로 장애인 이동권 투쟁이 진행됐는데 열사의 활동으로 2002년 인천장애인이동권연대가 출범할 수 있었다.

2005년에는 장애인의 교육권 확보를 위한 투쟁을 했는데 엘리베이터가 없는 인천시교육감실에 들어가 7일 간 점거농성을 했다. 덕분에 인천의 장애인 교육권은 괄목할만한 성과를 이뤘다.

그러나 열사는 자신을 돌보는 아버지가 연로하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장애인의 자립생활 지원을 위한 사회적 지원체계 마련과 중증장애인들의 처절한 삶을 알리고자 경인전철 1호선 간석역에서 2006년 6월 3일 투신해 운명했다.

열사의 죽음 뒤 인천 장애인들은 활동보조인 제도화를 위해 투쟁했고 인천시청 앞에서 15일 간 천막투쟁이 이어졌다. 이후 인천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만들어졌고 열사의 정신을 이어받은 단체는 지역에서 장애인의 권익과 차별에 저항하는 단체로 활동하고 있다.

▲ 임옥례(사진 없음) - 1995년 6월 5일 29세 운명

1963년 전북 임실 출생으로 1980년 17세 나이로 청계시장 내 봉제공장에서 시다(보조원) 생활을 시작했다. 1983년 서울 장충동 형제교회의 ‘시정의 배움터’에서 노동현실을 깨우치고 1984~1986년 청계피복노조 복구활동을 헌신적으로 했다.

1988년 인천으로 내려와 현장에서 대중활동을 했고 1990년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인사련) 회원에 가입했다. 2~3년간의 치료에도 회복되지 않는 불치병으로 회생의 희망을 갖지 못하고 1992년 6월 5일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 박진규 - 2001년 6월 10일 45세 운명

박진규.
박진규.

1956년 8월 9일 충북 단양에서 태어났다. 1986년 12월 한국분말야금에 입사했고 1987년 8월 노동조합 결성에 참여해 쟁의부 차장을 역임했다.

1988년부터 1998년까지 노조 교육선전부장과 선거관리위원장, 대의원 대표를 맡았다. 2000년에는 민주노총 인천본부 운영위원과 부평지구대표, 2001년에는 전국금속노조 인천지부 부지부장을 역임했다. 2001년 6월 10일 노조 간부수련회 중 물놀이를 하다 사고로 운명했다.

▲ 한병학 - 1993년 6월 10일 24세 운명

한병학.
한병학.

1969년 6월 26일 전남 진도 출생으로 1988년 진도실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92년 부평 소재 대한마이크로전자에 입사했다.

1993년 해인교회 청년회 임원과 한국기독노동자 인천지역연맹 준회원으로 활동했고, 대한마이크로 노동조합 재건 활동을 전개했다.

1993년 6월 8일부터 3박 4일 일정의 동원예비군 훈련에 참가했는데 10일 포사격훈련 중 155㎜ 포탄 폭발사고로 동료 20명과 함께 운명했다.

▲ 이경심 - 1979년 6월 14일 33세 운명

이경심.
이경심.

1949년 10월 9일 전북 정읍에서 1남 7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동생들 뒷바라지를 위해 서울로 상경해 버스 여차장(안내원), 식모살이, 공장 노동자로 살았다.

1968년 12월 24일 가톨릭 영세를 받은 후 가톨릭 노동청년회(JOC)를 알게 됐고 행동하는 투사가 됐다. 서울 북부연합 소속으로 해양섬유와 태광섬유 노동조합을 조직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1975년 인천 동일방직 투쟁을 지원했다. 1976년 나마진 신부, 권조희 수녀와 함께 부평노동사목을 공동 설립했다. 1978년 부평노동사목 실무자로 근무했다.

1979년 부천지역 JOC 조직 활성화를 위ㅏ해 거처를 부천으로 옮겨 생활하던 중 난소암이 온몸에 전이된 상태인 것을 알았다. 투병생활 3개월여 끝에 “어려운 때 가게 돼 미안해요. 용기를 잃지 말고 항상 즐겁게 지내세요”라는 유언을 남기고 운명했다.

▲ 이진희(사진 없음) - 1991년 6월 15일 27세 운명

(주)삼미기공 노동조합 홍보부장이던 열사는 1991년 6월 8일 오전 9시 30분께 분신해 몸의 90% 이상 화상을 입었고 8일 만인 15일 오전 9시께 한강성심병원에서 운명했다.

당시 4월 11일부터 사측과 노조가 임금 교섭을 했는데, 6월 8일 노조 위원장이 임금 인상 보고대회에서 회사가 제시한 안을 그대로 수용해 타결 짓는 보고를 했다. 이에 노조 간부로서 집행부의 어용성에 분노해 분신을 감행한 것이다.

사측은 병원에 찾아와 가족들에게 “가정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 아닌가, 회사에 분신할 만한 이유가 전혀 없다. 조용히 수습하자”고 회유하는 등 열사의 뜻을 왜곡하는 모습을 보여 조합원들의 분노를 샀다.

▲ 김익선 - 2009년 6월 16일 49세 운명

김익선.
김익선.

1961년 12월 1일 출생해 1980년 광주인성고등학교, 1985년 전남대학교 교육학과를 졸업했다. 1988년 4월 1일 전남 해남 송지중학교 초임 발령 후 전담 담양여중, 담양 수복중에서 근무했다.

1998년 3월 1일 인천 검단 중학교 발령 후 북인천여중과 계산고등학교에서 근무하면서 전교조 분회장으로 활동하던 중 2009년 6월 16일 병으로 운명했다. 췌장암 말기를 선고받고 6년 동안 투병하면서도 분회장으로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 신호수 - 1986년 6월 19일 23세 운명

신호수.
신호수.

1963년 8월 8일 전남 여수에서 출생해 1980년 2월 성동중학교를 졸업했다. 어려운 가사를 고려해 학교를 자퇴했다. 1983년 8월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당시 독재 체제 하에 신음하는 사회 현실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국가의 자주화와 민주화에 관련한 서적과 유인물을 많이 읽고 가끔 친구들과 집에서 토론하곤 했다.

1986년 인천 5‧3 민주화운동 직후 경찰이 열사의 여수 집으로 찾아와 신원과 행방을 확인한 것으로 보아 5‧3 민주화운동과 관련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열사는 1986년 6월 11일 오후 1시 30분께 인천 남구 소재 연안가스 충전소에서 가스통 밸브작업을 하던 중 서울시경찰청 대공수사과 형사라고 신분을 밝힌 남성 3명에 연행됐다.

이후 소식이 끊겼다가 8일 만인 19일 오전 10시께 고향집으로부터 4㎞ 거리인 전남 여천군 대미산 중턱 한 동굴에서 흰색 면양말과 속옷만 입은 채 사체로 발견됐다.

2002년 9월 16일 발표한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보면, 열사는 1986년 민주화운동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인천 5‧3 민주화운동 직후 공작대상으로 선정돼 간첩 혐의로 연행되고 위법한 공권력에 의해 사망했다고 보여진다고 판단했다.

▲ 유재관 - 1991년 6월 21일 29세 운명

유재관.
유재관.

1962년 서울 출생으로 1981년 고려대학교 사학과에 입학 후 1983년 학내 시위 주도로 장시간 수배생활을 했다. 1984년 학원 자율화 조치로 수배 해체돼 재입학했다. 1987년 인천 신흥목재(우아미 가구)에서 활동 중 해고됐고 1989년 인천 목재 노동자회 실무자로 활동했다.

1990년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인사련) 회원으로 활동했고 남부 노동반 반장을 맡았다. 1991년 6월 노태우 정권이 폭압적인 공안통치를 저지르던 중 인천 동서식품에 경찰이 투입되고 인하대 총학생회장 강제 연행, 인천대 학생들 강제 연행과 폭행으로 인한 중상 등 사건이 발생했다.

6월 27일 오전 1시 50분께 인사련 사무실에서 정기총회를 준비하던 중, 인천대 공권력 투입소식을 접하고 유리창을 열고 3층에서 뛰어내리다 크게 다쳐 병원으로 옮기던 중 운명했다.

▲ 김기만 - 1998년 6월 23일 28세 운명

김기만.
김기만.

1992년 한양공영에 입사 후 1994년 한양공영 노동조합 선봉대 활동과 풍물패 활동을 했다. 노동자 통일대 ‘백두’ 주안지대 활동을 했고 1996년 노동법 날치기 국면에 총파업 투쟁을 벌였다.

1997년 한양공영 노조 편집위원으로 활동했고 금속연맹 모범 조합원상도 수상했다. 1998년 한양공영 부도 후 고용안정 투쟁을 벌이다 영종도에서 운명했다.

▲ 석광수 - 1991년 6월 24일 30세 운명

석광수.
석광수.

1961년 강원 삼척군 출생으로 1977년 세일포장에서 월급 13만원을 받는 노동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20살에 인천으로 와 계양구 계산동 주차장에 취직해 어머니를 모시고 자취생활을 시작했다.

1982년 부평 강국택시에 입사해 3년간 근무하다 취업을 못한 친구를 위해 자리를 물려주고 강국택시를 퇴사했다. 1986년 3월 공성교통에 입사해 만근을 할 만큼 성실히 일했다. 1991년 공성교통 노동조합 대의원으로 활동했고 6월 14일 노조 지도부 연행에 항의하는 차량 시위에 적극 참가했다.

당시 지도부와 조합원 210여명이 연행됐는데, 열사는 회사로 돌아와 동료들에게 “혼자만 벌어먹고 살려면 하루 갈 것이 일주일이 간다”고 열변을 토했고 밤새 북을 치며 노동가를 부르다 오전 6시 20분께 분신했고 24일 오전 10시 28분께 병원에서 운명했다.

열사는 사업주의 비열하고 무책임한 임금 협상과 공권력의 폭력 진압, 무자비한 강제 연행에 온몸으로 항의했다. 회사 이사장은 사태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잠적했는데 가족의 15일이 넘는 농성과 노조 집행부의 노력으로 보상금과 장례비, 치료비를 받아내고 장례를 치렀다.

[열사를 기억하다] 매순간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순종이형

인수영 지역아동센터 인천지원단 단장

인수영 단장은 인천대학교에 입학해 학생운동을 하며 선후배 사이로 김순종 열사를 만났다. 이후 인천평화복지연대 서지부 전신인 평화와참여로가는인천연대 서지부 활동을 하며 사회에서 다시 만났다.

인 단장은 열사를 매순간 굉장히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으로 기억했다. 힘든 순간에도 힘들고 어렵다는 표현은 잘 하지 않고 “좋은 세상 금방 올거야”라는 말로 위로를 많이 해줬다는 것이다.

시민단체 활동이 힘들어 그만두고 싶다고 하면 “지금은 힘들어도 좋은 세상 금방 올 건데, 50살 되면 같이 낚시하러 다니자”라고 웃으며 얘기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택시기사로 일을 시작해 왜 힘든데 택시운전을 하게 됐냐고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은 ‘노동자 대투쟁 때 택시 노동자들이 집단 차량 시위를 하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뛰어 나중에 택시운전사가 꼭 되고 싶었다’였다며 앞뒤 재지 않고 순수한 선배였다고 기억했다.

인 단장은 “갑작스런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는 병원 의자에 앉아 한 참을 움직일 수 없었다”며 “당시 힘들어서 활동을 쉬고 있었는데 형이 못 다 이룬 꿈을 위해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잡게 된 거 같다”고 말했다.

*열사 관련 정보와 사진은 인천민주화운동센터가 제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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