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실대학교 철학과 4학년 최아정

숭실대 철학과 4학년 최아정
숭실대 철학과 4학년 최아정

[환경일보] 글의 시작으로 사용하기는 참 식상한 말이지만, 나는 사랑하는 것들이 제법 많다. 꽃 피는 봄날, 온 세상이 푸름으로 가득 차는 여름, 저물어 가는 가을, 그리고 흰 융단 깔리는 겨울까지. 나의 취미 중 하나가 계절마다 새 원단을 끊어 한복을 해 입는 일임은 아마도 계절의 아름다움에 영향을 받은 것이리라.

봄에는 옅은 파스텔 색으로 짧동한 치마를 맞추고 여름에는 햇살만큼이나 강렬한 원색으로 모시 한복을 해 입는다. 가을과 겨울에도 마찬가지다. 종종 한복을 차려입고 나들이를 나가면 꼭 한 명씩은 내게 사진 촬영을 부탁한다. 외국인일 때도, 연세 드신 어르신들일 때도 있다. 그러면 나는 근처 나무에 기대서서 치맛자락을 휘어잡고 렌즈를 응시한다. 얼마 전에도 그렇게 사진을 찍고 서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나누며 연락처를 공유한 일이 있었다. 그러고 나서 몇 걸음 걷던 중, 나는 문득 뭔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분명히 5월 중순, 철 이르게 핀 여름 꽃 아래서 사진을 찍었건만. 벌이 한 마리도 없었다.

예로부터 한국의 겨울은 삼한사온이라고 했다. 사흘간은 꽁꽁 얼 만큼 춥고, 나흘 동안은 비교적 따뜻한 날씨가 반복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작년 겨울은 그 말이 무색하게 칠한칠온이었다. 매일이 추웠고 한 번 따뜻해지기 시작하면 짐작할 수 없을 만큼 따뜻해졌다. 그리고 다시 예측할 수 없는 날부터 코끝이 얼어붙는 것이다. 그때부터였을까. 아니. 사실 그전부터 지구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매년 겨울이 작년 겨울보다 더 추웠고 매년 여름이 작년 여름보다 더 더웠다. 에어컨을 틀 수 없는 사람들과 난방을 땔 수 없는 사람들이 죽어갔다. 빙하가 녹아 차오른 물로 사람들이 집을 잃었다. 제주도에서만 나던 귤이 전라도에서도 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우리 바다에서 명태가 잡히지 않았다. 지구는 계속해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우리가 외면했을 뿐이지.

나는 생수병 대신 텀블러와 실리콘 빨대를 쓰고 있다. 철에 한 번은 한복을 맞추는 만큼 다른 옷을 10년 넘게 입는다. 우유 대신 두유를 마시고 쇠고기를 잘 먹지 않는다. 고기 자체를 먹는 양을 줄여 보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에코’ 아닌 ‘에코 백’을 더 사지 않고 내 의지와 무관하게 생긴 에코백과 비닐봉지들을 최대한 많이 사용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덤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걸로는 모자랐다. 나 한 명이 텀블러를 쓴다고 해서 강의실에 가득한 생수병들의 양이 줄어들지 않고 내가 실리콘 빨대를 쓴다고 남들이 쓰는 플라스틱 빨대를 코에 박고 헤엄치는 거북이들의 수가 줄어들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방법을 바꿨다. 은근슬쩍 더 많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편의점에서 플라스틱 생수병을 구매한 친구에게 ‘텀블러가 좀 더 경제적인 것 같지 않아? 환경에도 좋고.’라고 은근슬쩍. 화장실에서 핸드타월이 없다고 투덜대는 친구에게 손수건을 건네며 ‘손수건 들고 다니면 은근히 편하다?’라고 한 번 더 슬쩍. 우유 대신 두유로 커피 커스텀을 하며 친구에게 ‘난 유당불내증이 있어서 이렇게 바꾸기 시작했는데, 우유 대신 두유를 마시면 환경이랑 동물 복지에 도움이 된대.’라고 또 한 번. 이제 내 친구들 중 몇은 텀블러를 들고 다니고 몇은 손수건을 들고 다닌다. 몇은 하루 한 번 ‘비건(VEGAN) 식’을 시작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모자랐다. 어느 다큐멘터리에서는 개인의 노력보다 기업의 전환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내가 지금까지 하고 있던 노력이 별 볼 일 없었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내가 무겁게 텀블러를 들고 다녀도 기업이 만들어 내는 쓰레기가 줄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다는 말 아닌가.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지구는 계속해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사라질 봄과 가을이··· 그래서 사랑하는 것들만큼 미워하고
잊어버릴 것들을 늘리기로 했다.

지구를 위해 마음 한구석에 작은 증오를 품으며

그렇지만 여기서 포기하기에는 앞으로 다가올 10년 뒤, 아니, 당장 내년 여름과 겨울이 두려웠다. 사라질 봄과 가을이 벌써부터 그리웠다. 그래서 사랑하는 것들만큼 미워하고 잊어버릴 것들을 늘리기로 했다. 나는 이미 남양과 옥시 제품을 쓰지 않고 있었다. 최근에는 SPC 식품도 먹지 않고 있다. 물론 이 일들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마트 세일 매대에 쭉 늘어선 것은 내가 불매하는 회사의 제품들이고 내 지갑에 든 돈은 한정되어 있으니 종종 세일 매대에 눈이 돌아가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이 회사들이 태도를 바꿀 때까지 그 회사의 물건을 쓰지 않기로 다짐했다. 여기에 몇을 더하는 것은 더 불편하지만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대체할 것은 얼마든지 있다.

나는 이제 어떤 커피 브랜드의 그린 워싱을 미워하기 시작했다. 고객들에게는 종이 빨대를 주면서 수많은 시즌 텀블러를 찍어내는 행태는 명백한 기만 아닌가. 필요 없는 플라스틱을 굳이 끼워 주는 캔 햄과 빨대를 주는 요구르트도 사지 않기로 했다. 환경을 파괴하는 기업들과 그들을 소비하는 나를 미워하기로 했다. 대신 그만큼 환경에 신경 쓰는 기업들과 그 기업을 소비하는 나를 좋아하기로 했다. SK텔레콤을 비롯한 롯데제과, 오뚜기, LG생활건강은 2022년 3월 기준 ESG 55위 안에 드는 기업들이다. 환경과 사회, 지배 구조에 신경 쓰는 기업의 매출을 올려 주는 것은 단순히 텀블러와 실리콘 빨대를 사용하는 것보다 더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더 이상 텀블러와 실리콘 빨대, 손수건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다. 계속해서 나는 이 물건들을 사용할 것이다. 더하여 목소리를 키우는 것도 조금 더 효율적인 방법을 찾기로 했다. 친구에게도 환경에 대해 계속해서 이야기하겠지만 정부와 사회, 기업에도 환경과 사회에 신경 쓰라고 요구할 것이다. SNS와 소통이 발달한 21세기에 무엇이 어렵겠는가?

그레타 툰베리는 도널드 트럼프에게 ‘How dare you!’라고 소리쳤다. 어떻게 감히! 혹자는 그의 말을 두고 조롱하지만 ’어떻게 감히‘ 환경을 파괴할 수 있느냐는 말은 세상의 모순을 명백히 꼬집는 말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은 사람들 대신 이미 부를 축적한 기성세대가 어떻게 감히 그들의 미래를 파괴할 수 있고 조금만 더워도 에어컨을 펑펑 트는 사람들이 어떻게 감히 더위에 쓰러져 가는 사람들의 죽음을 방관할 수 있을까.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나는 사랑하는 것만큼 미워하는 것도 많은 사람이다. 숲과 바다, 하늘의 전부 다른 파랑을 사랑한다. 꽃잎과 단풍, 석양의 모두 다른 붉음도 사랑한다. 그들을 위해 나는 마음 한구석에 늘 작은 증오를 품기로 했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 역시 우리의 사랑하는 창백한 푸른 점, 지구를 위해 마음 한구석에 작은 증오를 심기 바란다. 새싹부터 시작하여 나무를 길러내는 일은 어렵겠지만 당신의 미움은 생각보다 훨씬 금방 자라 거목이 될 것이다. 너, 나, 우리가 함께 사랑하는 만큼 미워하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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