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저점과 최고점 정해진 학교 성적표
시간당 최저 정한 노동 가치, 최고는?

"성적표 나왔어요." 먹이를 찾아 포로롱 날갯짓을 하는 새들처럼 바쁜 아침시간. 아들은 간밤에 건네도 될 법한 성적표를 내밀었다. 후다닥 봉투를 열어 쓰윽 훑어보곤 아내에게 보여줬다. 바쁜 아내도 봉투 겉면만 보고 서둘러 챙기며 "시험 친다고 수고했다. 앞으로가 더 고생이겠지만" 하고 짧은 답례를 마쳤다. 고등학교 2학년 중간고사가 끝나고 다시 기말고사를 준비하는 아들이 안쓰러워 보였다. 물론 대부분 어른들이 겪어온 시간이지만, 자식이라 더 애처로워 보일지 모른다.

자유가 자율로 변하는 청소년기를 응원해야 하지만, 현실 장벽을 무시할 수도 없다. 100점 1등급은 선택의 자유를 보장받지만, 그 아래로는 선택의 자유를 보장받지 못하는 엉터리 사회구조가 미래를 제한하기도 한다. 대학이 대수라고 할 수 없지만, 본인이 원한다면, 또는 사회 변화와 흐름상 필요하다면 가야 하는 곳이 대학이다. 아들이 성적표를 받기 전에 개별 과목 성적은 미리 나왔다. "수학은 ○○점인데 몇 등급이고, 영어는 ○○점인데 몇 등급이고, 한국지리와 정치와 법은 몇 점이야. 그런데 나 이번에 국어(문학) 1등했다. ○○점." 아들은 은근 자랑을 했다. "그럼 나도 나중에 형처럼 대충 해도 고등학교 가면 더 잘하겠다. 중학교 때는 놀아도 되네." 형의 자랑에 동생은 위안을 삼는 듯 보였다. 중2 아들은 늘 자유롭게 다니지만, 얼마 전 시험기간에는 나름 신경이 쓰였는지 책을 뒤적이기도 했다. 시험 결과를 보더니, 평타(평균)보단 낫다며 나름 합리화도 시도했다. "그래서 몇 점인데?" 엄마의 물음에 의외로 답은 간단했다. "국어는 ○○점, 영어는 ○○점, 수학은 ○○점…." 작은아들 대답에 "아버진 한 자리 숫자도 있었다. 힘내봐. 수고했다. 점수가 대수가? 네가 하고 싶은 거 하면 되지" 하며 응원했다.

가끔씩 아들이 묻는다. "엄마는 월급이 얼마야? 아버지는 얼마 벌어?" 어른들의 노동임금과 학생의 점수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상대적 비교에서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수험생의 시험 점수는 최저점 0점에서 최고점 100점이다. 최저점과 최고점이 정해져 있다. 그런데 사회의 노동임금은 최저점은-이마저도 오래된 역사는 아니지만-얼마로 정해져 있지만, 최고점은 정해지지 않았다. 최저임금 역사는 나라별로 다르지만, 우리나라 최저임금은 2008년 시간당 3770원에서 2022년 현재 9160원이다. 최저임금에 대하여 찬반을 따지고자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최저임금은 정해진 반면, 최고임금은 정해진 수치가 없으니 노동자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이 더 크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얼마 전 정당과 시민단체들은 최저임금 인상 억제와 업종별·지역별 차등적용은 저임금 노동자 600만 명의 삶을 외면한다면서 경제성장과 물가상승을 반영한 최저임금 대폭 인상을 요구했다(경남도민일보 5월 17일 자 8면). 하지만 다른 세상도 있다. "대통령 연봉보다 많이 받는 기관장이 40곳이 넘는 가운데, 산업은행 회장은 한 해에만 4억 3000만 원의 급여를 지급받았다"(2022년 5월 18일 SBS 뉴스).

급여는 노동자가 받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관장의 노동보다 일선 현장의 노동가치가 떨어지는 건 아니다. 급여가 이렇게 극과 극을 달려도 된다는 것인가. 최저임금이 최소한의 인간 생존을 위한 장치라면, 최고임금은 최소한의 인간 도리가 아닐까? 노동의 가치를 시간당 최저로 정한다면, 최고의 가치는 무엇일까? 굳이 수치로 나누자는 것은 아니지만, 신성한 노동의 가치를 본질적으로 살피는 성찰이 필요한 순간이다.

/장진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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