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칼럼] 언어자본교환소를 지역 곳곳에 세우자

  • 이국운 한동대 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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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5-04   |  발행일 2022-05-04 제26면   |  수정 2022-05-04 07:08
한글 전용 세대 문해력 쇠퇴
동아시아 언어인 한자 '문맹'
소통 기회 잃어 국가적 손해
뜻있는 자치단체 중심으로
젊은 세대 한자교육 나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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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운 한동대 법학부 교수

거의 사십 년 전 내가 다니던 대학에는 경제사상사를 가르치던 할아버지 교수님이 계셨다. 매일 140번 시내버스에서 내린 뒤 한쪽 겨드랑이에 작은 가방을 낀 채로 캠퍼스 맨 위쪽에 있던 경제학과까지 혼자 걸어 올라가셨다. 걸음걸이가 조금 어색하고 속도가 느렸기 때문에 모든 학생이 교수님을 지나쳐 갈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다들 성함은 몰라도 존재는 알고 있었다. 간혹 교수님과 말벗을 해드리려는 학생들도 있었는데, 대부분 하시는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해 곤란을 겪곤 했다. 아마도 중년 말엽에 앓으셨던 병환 때문일 거라는 소문이 있었다. 원래는 법대에 계셨던 임원택 교수님이다.

경제사상사 강의는 300명이 들어가는 거대한 강의실에서 열렸다. 내 기억에 첫 주에는 강의실이 가득 찰 만큼 학생들이 모였는데, 두 주 정도 지나면 맨 앞에 30명 정도가 남았다. 지금은 꿈도 꿀 수 없지만, 강의 안 듣고 시험만 치고도 학점을 받던 시대의 풍경이다. 어쨌든 그렇게 남은 전체의 10%는 한 달쯤 지나 임원택 교수님이 카를 마르크스를 비판하고 제2자본론을 주창하기 시작하면 다시 둘로 갈라졌다. 솔직히 교수님의 논지에 따르는 학생들은 소수였고, 한글전용폐지론 대목에서는 거의 전체의 1% 정도로 줄었다. 강의가 끝날 때쯤이면, 임원택 교수님은 캠퍼스를 걸어 올라가실 때처럼 다시 혼자가 되셨다.

요사이 임원택 교수님의 외로운 모습이 내게 가끔 떠오르는 까닭은 한국 사회에서 젊은 세대의 문해력 쇠퇴를 언제까지 두고 볼 것인가 하는 자문 때문이다. 심지어 동년배에서 가장 언어능력이 뛰어날 신문 기자들의 기사에서까지 문해력 쇠퇴의 증거를 만나게 될 때는 씁쓸한 감정을 넘어 왠지 모를 부끄러움을 피하기가 어렵다. 최근의 검찰 수사권 관련 기사들만 보더라도 예컨대 사건의 단일성을 사건의 당위성으로 잘못 알아듣고 받아 적은 대목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단일성과 당위성의 한자를 안다면 벌어질 수 없는 실수다.

코로나 이전에 학생들을 데리고 비교과활동으로 일본이나 중국, 홍콩이나 대만에 가면 흔히 벌어지는 광경이 있었다. 내 눈에는 훤히 읽히는 한자들을 학생들은 전혀 해득할 수가 없어서, 우선은 꾸역꾸역 음독을 찾아 영어알파벳으로 바꾸고, 다시 그것을 구글 번역기로 돌려서 의미를 확인하는 모습이었다. 그 앞에서 나는 디지털 세상의 신속성에 놀라다가 말고, 불과 한 세대 만에 한국 사회에서 거의 사라져버린 동아시아 언어 자본의 빈곤한 현실에 더욱 놀라곤 했다.

표음 문자로서 한글의 위대성이나 디지털 시대의 무한한 유용성에 동의하지 않을 대한민국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하지만 그와 함께 우리가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여전히 표의 문자인 한자로 문화적 두께를 축적하고 소통하는 사람들이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물경 20억명을 넘어선다는 사실이다. 그 안에는 대한민국의 구성원들을 포함하여 한글로 소통하는 거의 1억명에 가까운 사람들도 당연히 존재한다. 만약 이들이 동아시아의 20억 대중과 깊게 소통할 수 있는 언어 자본을 잃는다면, 이는 너무 커다란 손해가 아닐까?

어떻게 해서든 한국 사회의 젊은 세대에게 동아시아 언어 자본을 물려주어야 한다. 그러나 전승의 통로를 찾는 일은 쉽지 않다. 한글 전용에 관련된 공적 토론은 이미 지나간 일이고, 섣불리 공교육에 하소연했다가 혹시라도 교과목 밥그릇 싸움으로 번지기라도 하면 숭고한 취지마저 몰각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굳이 국가나 중앙정부에 기대지 말고 차라리 뜻있는 자치단체들이 나서서 지역 곳곳에 노년 세대와 청년 세대를 아우르는 언어자본교환소를 세우는 것이 낫지 않을까?

문득 참 외로우셨을 임원택 교수님이 생각나는 아침이다.
이국운 한동대 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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