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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압을 재고 으슥한 곳으로...?

 

물뚝심송 선배를 보낸 다음날부터 동네 근처에 있는 해체팀으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바라시(ばらす(바라스)의 명사형. ばらす는 "해체하다"라는 뜻의 일본어다. 건설 현장의 수많은 용어들이 그렇듯, 일본용어가 많이 쓰인다. 물론 부정확하고 정체불명의 일본어도 많이 쓰인다;;)팀이라는데, 그게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안전화와 면장갑만 딸랑 들고 출근했다. 혹시 모르니 갈아입을 옷도 준비해서.

 

길을 헷갈려 팀원들이 탄 차가 출발하기 직전에 도착했다. 시간 늦었다고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바로 구형 카니발에 몸을 실었다. 도착한 곳은 용인에서 한참 떨어진 곳이었다. 대형 아파트 단지 안의 초등학교 건설 현장. 단지 내 공터에 있던 현장 식당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남아시아 돌아다니면서 이를 악물 일이 많아 치아에 꽤 많이 금이 가있어 음식을 빨리 씹지 못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먹는 속도를 쫓아가기 위해선 대충 쓸어 담아 넣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시 차에 올랐다. 일행이 서 있는 곳에서 좀 떨어진 컨테이너로 가라고 했다.

 

일정 이상 규모의 건설 현장으로 가면 일용 근로계약서를 작성하고 간단한 건강검진을 한다. 주로 혈압을 재고 현장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지어지고 있는 건물들은 식별할 것이 거의 없다. 돌아다니다가 길 잃어버리지 말고, 허둥거리다가 다치지 말라고 하는 절차다. 하지만 그 현장은 좀 많이 허술했다. 혈압 기계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한 번은 말도 안 되게 고혈압이라고 나왔다가 그 다음번엔 정상 혈압이라고 하는 정도.

 

여튼 혈압 재고 각종 계약서와 서약서 작성하고 나서, 안전부장은 내 혈액형과 사고 시 이송병원의 전화번호가 붙어 있는 스티커를 안전모에 붙여주면서 내가 가서 일해야 할 곳을 알려줬다. 2층인가 3층인가의 한쪽 구석이었다. 두리번거리면서 찾아갔더니, 벌교 사투리 징한 키 작은 작업반장이 나를 맞았다. 짝지어서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거푸집과 각종 자재들을 주어다가 한쪽에 모으는 일이었다.

 

얼떨결에 통역사...!?

 

시킨 일을 대충 끝내고 나니 한 시간이 지났다. 작업 반장이 커피 캔 하나와 도넛 한 개를 참이라고 줬다. 그걸 먹으면서 보니 주변에 앉아 있는 이들이 쓰는 말이 한국어가 아니었다. 생긴 건 분명히 동양인인데, 약간 달랐다.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니 부랴트 공화국과 몽골에서 왔다고 했다. 바이칼 호수 근처의 동네 주민들이었던 것. 그때 내가 건설 현장에 대해 뭘 좀 아는 상태였다면, 그길로 때려치우고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작업 동료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쥐뿔도 몰랐다.

 

중국 국적을 제외하곤 외국인이 합법적으로 건설 현장에서 일하기 쉽지 않다. 일부 결혼 비자로 일하고 있는 이들이 있지만 아주 소수다. 내 주변에 앉아있던 이들은 모두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이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렇게 대규모로 불법을 쓰는 곳은 노동 강도부터 초현실적일 뿐만 아니라 사람 대접을 못 받는다. 경력이 좀 있다고 팀에 와서 반나절도 일 안 하고 도망가는 이들을 보면서도 별생각이 없었다. 아는 게 있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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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경우엔 일하러 나왔다는 것을 확인받는 일종의 영수증인 일일출력서에 이렇게 표시한다. 세무서 등에 보고할 때는 합법적인 신분을 가진 이들의 이름을 쓰고, 내부에서 정리용으로 실제로 일한 사람들의 이름을 표시하는 방식.

 

별생각이 없다 보니 그들과 쉽게 친해졌다. 부랴트 공화국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걸 알아먹는 넘을 처음 봤다고 했다. 그래서 포기하고 러시아에서 왔다고 이야기해왔다고. 짧은 영어로 이야기하다가 좀 복잡한 이야기를 하게 될 경우엔 구글 번역기의 도움을 빌렸다. 작업 반장은 그걸 보고 반색했다.

 

“말 귀를 알아먹어야 일을 시키지!”

 

라며 화내고 있던 걸 구글 번역기 몇 번의 도움으로 바로 정리해줬으니까. 그들의 민원도 바로 들어줄 수 있었고.

 

그렇게 체류 자격이 되지 않는 이들은 건물 안에서 주로 정리 작업을 하고 있었고, 밖에서 거푸집 뜯는 건 한국인들과 한국계 중국인들, 그리고 몽골에서 온 이 한 명이었다. 그쪽은 기공들, 우리는 조공도 못 되는 존재들이었다. 기공들 끼린 차도 따로 몰고 다녔다. 해체팀은 시스템 동바리팀과 함께 건설 현장에서 가장 일찍 퇴근하는 팀들 중 하나다. 그들은 일찍 퇴근하고 정리하는 우리는 늦게 퇴근해야 하니 타고 다니는 차도 달랐던 것이다. 

 

몽골 씨름 챔피언과 싱글맘

 

그렇게 차를 타고 다니면서 그들과 꽤 친해졌다. 먼저 친해진 이는 바이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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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씨름인 부흐 챔피언이었는데 생긴 것처럼 힘쓰는 게 달랐다. 길이 1.2m. 폭 60cm. 무게 20kg 정도 되는 상용 거푸집(현장에선 6012, 혹은 600이라고 줄여 부른다)을 한 손으로 머리 위로 들어 올리던 괴력의 소유자였다. 역시 17kg 정도 되는 다른 자재도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건설 현장에서 힘이 좋으면 일단 환영받는다. 힘든 일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전체적인 작업 속도가 꽤 차이 나서 빨리 끝내고 집에 갈 수 있기 때문. 몽골에서 중국을 오가는 트럭을 운전하다 관광비자로 한국에 와서내가 들어간 팀에서 일하고 체류 기간이 만료되기 하루 전날 몽골로 떠났다.

 

바이락은 내가 근육이 별로 없다고 뭘 먹고 어떻게 운동을 해야 근력이 생기는지 꼼꼼하게 설명해줬다. 솔직히 지금도 버티는 이유들 중에 하나가 그때 바이락이 알려준 운동법 때문이었다. 플랭크와 스쿼트는 예쁜 근육 만드는 운동이지 힘쓰는 근육 만드는 게 아니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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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친해졌던 것은 야리나. 팀 내에서 준기공 대접을 받고 있었던 싱글맘이었다. 어머니는 부랴트 공화국, 아버지는 몽골인인 다문화 가정 출신. 사실 이 지역이 바이칼 호를 둘러싸고 있는 지역이라 지역적, 인적 교류는 꽤 많았던 것 같다.

 

이 험한 세상에서 아이를 혼자서 키우는 분답게 대단히 씩씩했다. 한국어는 거의 몰라도 워낙 눈치가 빠르고 일도 잘해서 팀장(사장, 사실은 오야지)은 여성 해체공으로 키워보겠다는 이야길 종종 하기도 했다. 그 정도로 일을 잘했던 터라 일 못하는 사람들, 혹은 쉬운 일만 하려는 이들을 무진장 싫어했다. 기둥 한쪽에 모아놓았던 서포트들이 우르르 무너지면서 몇 개가 안전모와 어깨 위로 떨어진 것을 경험한 뒤론 현장에선 절대로 안전모를 벗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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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발로 누워있고 세워져 있는 것이 내가 일하는 현장의 서포트들.

공사판 용어론 ‘사뽀도’. 개당 17kg 정도 된다. 이거 하나가 1톤 이상의 수직 하중을 받아낸다.

 

흥도 대단해서 언젠가 강당 청소하다가 방송 테스트한다고 누가 뽕짝을 틀었을 때 집단 춤판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일하던 이들 중 대학 졸업하고 왔던 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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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토는 파란색 뒤에 숨어 있다...!!

왼쪽에 보이는 남자가 나...!

 

힘도 좋고 순발력도 좋아 처음엔 거의 이 친구만 쫓아다녔다. 일단 한국어 사용자들은 다들 자기 일한다고 바빴을 뿐만 아니라, 가오 잡고 이야기하느라 정말 내가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볼토는 시간 날 때마다 위의 사진에서 폰을 들고 있는 여친에게(뒷통수만 보인다...!) 전화하기 바빠 뺀질이로 찍혀 있었다. 

 

보도방 사장과 티켓 다방 사장 출신 

 

부랴트 공화국, 몽골에서 온 이들과 별생각 없이 친하게 지내며 일했다. 그들은 학교 선생, 트럭 운전수, 경찰 등의 자기 일을 갖고 있는데 그것만으로는 수입이 좀 적어 젊었을 때 바짝 일하고 모국에서 보다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고 싶었던 이들이었다.

 

당시는 내 책(거의 모든 재난으로부터 살아남는 법)이 나온 지 몇 달 안되던 시점이었다. 강연회나 방송 등으로 월 100만 원 언저리는 벌고 있었다. 그땐 나도 200 이상을 벌 수 있다면 뭐든 하겠다는 생각을 했지, 건설일을 업으로 하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다.

 

거기다 나는 물론, 아버지도 해외에서 일을 오래 했다. 이주 노동자였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들이 불법 체류자라거나 대한민국 노가다판 최하층 계급이라는 것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사실 딱히 별생각이 없었던 게, 그래도 일이 일찍 끝나는 편이라 아내와 함께 할 시간이 회사 다닐 때보다 길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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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말을 쓰는 사람들과는 같이 일할 일도 없었다. 어쩌다가 이것저것 찾아달라는 이야기만 하지, 퇴근 시간대는 물론 타고 다니는 차도 달랐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같이 모여서 술 마실 일이 있었다. 그때 한국말 쓰는 사람들을 처음 한꺼번에 봤다. 자기소개들을 듣고 나니 아주 황당해졌다.

 

사장은 72년생으로 자기 말로는 D모 대학을 나왔다고 했다. 그 영어실력이면 교양영어 점수 때문에라도 졸업장 받기 힘들었을 것 같았다. 대학을 나와서 태국에서 비자런(Visa Run. 국경을 넘어 다니며 관광 비자를 연장하는 것. 내륙으로 연결된 국가들에선 이게 가능했다. 하지만 꽤 오래전부터 태국에선 불법이다) 하며 관광가이드를 했다고 할 때도 좀 깼다.

 

내가 아는 한국인 식당들은 거의 모르는 것 같았다. 네팔의 경우, 방콕 경유로 다니는 것이 가성비가 가장 좋아서 자주 들리던 곳인데, 내가 아는 곳은 모른다니. 거기다 그 관광국가에서 가이드로 꽤 많은 돈을 벌었다는 것도 좀 깼다. 배낭여행자들이 많이 가는 나라에, 가이드가 따로 필요 없을 정도로 관광 인프라가 잘 되어 있는 곳이라 가이드북을 읽는 것도 귀찮아하는 판인데 뭔 가이드란 말인가.

 

한참 뒤에 알았다. 가이드가 필요한 영역이 있다는 것을. 잘못 갔다간 몰매 맞기 딱 좋은 이른바 ‘밤 문화’ 탐방 가이드. 그 ‘밤 문화’가 뭔지는, 이 분이 사기를 당하고 한국에 들어와 했던 일로 좀 더 확실해졌다. 귀국 후 가장 처음 했던 일이 보도방 사장이었다고... 태국에서 알게 된 고객님(!)과의 인연 덕택에 그쪽 일을 벌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미성년자 고용해 매매춘 하다가 걸려 자기 이름으로 일을 못 벌리는 상태였다. 다른 이들은 다 잊어도 사장은 꽤 오래 기억할 것 같다. 내가 겪어본 사람들 중, 자본주의적 욕망에 그렇게 충실한 사람은 본 적이 없다.

 

반장 중 한 명은 자신의 리즈 시절을 티켓 다방 사장할 때라고 하던 사람이었다. 주급을 받으면 최저 생활비와 술값을 제외하곤 몽땅 토토에 밀어 넣었다. 그것도 최고 배당만 잡아서. 로또는 북한에 돈을 보내기 위해 문재인 정부에서 조작하기 때문에 믿을 수 없고, 토토는 그게 아니라고 믿고 있다고 했다. 나중에 들었던 말로는 티켓 다방 여러 개로 한참 돈을 잘 벌다가 정선 카지노에 맛들여 몽땅 날려먹었다고 한다. 일하느라 정선 갈 시간은 없으니 토토만 한다고..

 

또 다른 반장 하나는 포주 출신이었다. 일하다가 어떤 분을 만났는데 예비 장인 어른께서 돈 버는 수단을 반대해 옷 장사를 시도했다가 말아먹고 해체공의 길에 들어섰다고 했다. 압권은 자기 딸이 학교에서 일진이라 행복하다고 했던 것. 거기에 사채업자 시절이 자신의 리즈 시절이었다는 막내까지.

 

사실 직업과 관련해 사람을 평가하는 것도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조폭 출신인데 카트만두에서 맘잡고 여자 만나 식당 하고 있는 분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분들의 상태는 좀 심각했다.

 

노동의 계급

 

갖은 음모론을 신봉하는 이들이야 세계 어딜 가든 쉽게 만날 수 있지만 이들의 정신세계는 상당히 독특했다. 특히 그들의 정의관. 한국인은 아무리 뼈 빠지게 일해도 수도권에서 아파트를 살 수 없는데, 중앙아시아 출신들이 한국에서 몇 년간 일하면 방 3개짜리 아파트 살 수 있다는 것은 '정의롭지 않다'고 했다. 그때 임금은 한국인 초보자가 11만 원 받을 때, 외국인 준기공은 7만 원을 받았다. 기공은 한국인이 14만 원, 외국인은 9만 원.

 

그때까지 결혼도 하지 않은 볼토네가 한국에서 2~3년 정도 일하면 방 3개짜리 아파트 하나와 사업을 위한 종잣돈 정도까진 마련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이야기한 것에 분개하고 있었다. 뭐 자기들은 가족을 떠나 수원에서 숙소 생활을 하는 바람에 명랑한 성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걔네들은 하고 있다는 것을 공정하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것 즈음은 애교였다.

 

얼마나 대책이 서지 않냐면, 세상은 자신이 받는 일당으로 계급이 나눠져야 한다고 주장하던 이들이었다. 더불어 일을 잘하기 위해선 안전장비를 쓰면 안 된다는 주장들도 나왔었다. 상태들이 이 모양이다 보니 한국어를 쓰는 사람들끼리 모이면 짝끼리 있는 부랴트 공화국민들과 몽골인들을 두고 온갖 음담패설을 지껄여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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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G마켓

 

그들이 가장 증오했던 것은 위 사진의 장비다. 일명 그네식 혹은 전체식 안전벨트. 허벅지까지 묶어서 추락해도 허리에 부하가 많이 가지 않아 좀 더 안전한 장비다. 그런데 이걸 쓰면 ‘일이 안된다’고 목청들을 높이는 걸 보고 내가 뭔 마굴에 와 있나 싶었다. 거기에 합류하기 직전에 내가 썼던 책이 ‘거의 모든 재난에서 살아남는 법’이었다는 것을 그들이 알았으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지금도 궁금하다.

 

지금이라면 나보다 전에, 딴지에 이쪽 세계에 관한 글을 쓰셨던 ‘꼬마목수’님처럼 인력사무소를 찾았을 것이다. 그것도 꽤 크고 지자체에서 이런저런 표창장을 받은 곳들을 시작 지점으로 잡았을 것이다. 그런 곳은 대체로 1군 기업(대부분 상장 건설사)들과 거래한다. 그리고 일을 제대로 하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다는 평가만 받아도 훨씬 더 많은 경험들을 해볼 수 있다. 

 

해체 정리팀에서 일을 시작했던 것이 꼭 마이너스로만 작동하진 않는다. 하지만 내 경험상, 처음부터 전문 업체, 그것도 맨바닥이라고 할 수 있는, 체류 자격이 안 되는 분들을 고용하는 곳에서 일하면 통으로 사람대접 못 받는다. 그리고 본인들이 그걸 잘 알다 보니 ‘위험한 작업을 한다’는 것을 자신들이 가질 수 있는 ‘훈장’이라고 정신 승리한다.

 

그 돈, 그렇게 안 벌어도 된다.

 

단, 가끔 그들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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