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52년 전 전태일 열사는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산화했다. 그런 아들의 뜻을 이어받은 이소선 어머니는 “노동자는 하나가 돼라”며 노동자 곁에서 투쟁하는 데 온 생을 바쳤다. 전태일의 친구들은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전태일 열사의 마지막 외침을 가슴에 품고 이소선 어머니와 함께 노동현장에서 군부독재에 맞서 투쟁하며 전태일 정신을 이어 왔다.

전태일 열사는 장시간 노동을 하며 배를 곯아야 했던 어린 여공에게 풀빵을 사 주고 자신은 집까지 먼 거리를 걸어갔던 연대와 나눔의 정신을 우리에게 남겼다. 그는 항상 배움에 목말라 했지만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닌 더 어려운 노동자 곁을 지켰다.

전태일 열사와 이소선 어머니의 ‘풀빵 정신’은 지난해 11월 전태일·이소선장학재단 출범을 통해 더 어려운 이웃에게 전해질 수 있게 됐다. 2016년 2월 시작한 전태일 장학사업이 전태일·이소선장학재단으로 재탄생한 배경은 무엇일까.

<매일노동뉴스>가 지난 1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전태일·이소선장학재단 사무실에서 이수호(74·사진 오른쪽)·최종인(73·사진 왼쪽) 공동이사장을 만났다. 전교조·민주노총 위원장 출신인 이수호 이사장은 전태일재단 이사장·전태일기념관 관장을 역임했다. 전태일 열사와 평화시장에서 삼동회를 만들었던 친구 최종인 이사장은 전태일 열사 산화 뒤 청계피복노조(전국연합노조 청계피복지부) 지부장을 역임했고 청계피복노조 친목회인 청우회 회장을 맡고 있다.

월 80만원씩 10년 모은 1억원 쾌척한 전태일의 친구

- 전태일 장학사업을 시작해서 올해로 7년째를 맞았다. 시작은 어땠나.

이수호 : 2015년 전태일재단 부름을 받아 이사장에 취임했다. 전태일의 가장 절친인 최종인씨가 갑자기 저를 보자고 하더라. 1억원을 내놓으며 장학사업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깜짝 놀라기도 하고,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태일이와 같이 평화시장에서 일하면서 다들 초등학교 졸업도 제대로 못한 배움의 한이 있어 어떻게든 배워 봤으면 하는 뜻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 마음과 함께 지금 우리 사회에 아직도 배움에 목마른 사람이 많지만 사각지대가 많으니 장학사업을 했으면 한다고 하더라. 종인씨가 이제 나도 그 일을 하고 싶고 인생을 마무리하면서 이런 일을 해야 하지 않겠냐, 해서 그런 마음으로 시작했다.

최종인 이사장은 당시 월 80만원씩 10년간 모은 1억원을 장학금으로 쾌척하면서 전태일 장학사업의 기틀을 놓았다.

최종인 : 저도 못 배웠던 사람이다. 전태일재단이 뭘 하면 좋을까 생각하던 차에 이수호 이사장이 전태일재단을 맡게 됐다. 이수호 이사장이라면 장학기금을 맡겨도 잘 쓰겠다, 그런 믿음이 갔다. 장학사업을 시작해 달라고 요청했다. 어떤 단체든 지도자에 대한 믿음이 제일 중요하다. 이수호 이사장이 여기까지 오는 데 믿음을 줬다. 그가 재단을 맡은 뒤로는 재단이 활기차게 되고 장학사업도 잘 운영돼 굉장히 보람을 느꼈다.

최 이사장은 이 이사장 표현대로 전태일 열사와는 ‘절친’이었다. 1970년 재단보조로 평화시장에 발을 디딘 뒤 전태일 열사를 만나 친구가 됐다.

“전태일은 무슨 일이 생기면 저를 찾아와 의논했죠. 평화시장에서 많은 연소근로자가 노동환경이 나빠 폐결핵으로 죽어 가는 현실에서 우리 역할을 하자면서 삼동회 활동을 했죠. 전태일은 회장, 저는 회원으로. 그해 11월13일 (전태일은) 제 앞에서 분신했어요. 제가 잠바를 벗어서 불을 껐는데, 쓰러져 다시 일어나 또 외쳤습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말을 남기면서. 그 모습이 트라우마처럼 머리에 남았어요. 하지만 (살면서) 그런 이야기를 해 보지 못했어요. 마지막 죽어 가는 모습을. 갑자기 북받쳐 눈물이 나요. 너무 슬퍼서 말 못 했죠. 요새 들어서야 장학재단 하면서 말할 수 있게 됐어요.”

또 다른 ‘전태일의 친구’를 찾아와 장학사업 제안

- 전태일 장학사업에 대한 뜻은 언제부터 품었나.

최종인 : 청계피복노조 지부장을 5년 했다. 전태일 뜻을 따라. 교육사업도 많이 했다. 연소근로자에 대한 3개월 중등교육과정도 했다. 이대 학생들이 자원봉사로 가르쳤다. (장학사업에 대한) 생각을 한 지 오래됐다. 15~16년 전부터. 제가 개인사업으로 출판사를 했는데 장학사업 모델을 운영했다. 하지만 3년 만에 문을 닫았다. 이후에도 장학사업을 하겠다고 생각했다.

이수호 이사장 있을 때 빨리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이사장이 오면서 우리 꿈이 이뤄졌다. 오래전부터 추진했지만 지지부진했던 전태일기념관 설립이 이뤄졌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인생 마지막에 더 늦기 전에 장학사업도 진행하고자 했다.

이수호 이사장은 전태일 열사와 동갑이다. 그는 스스로를 ‘전태일의 친구’라 부른다. 그가 전태일의 친구가 된 사연이 있단다.

“전태일재단을 맡기 전에 최종인씨 등 삼동회 친구들과 유가족이 함께 저를 찾아와서 꼭 재단을 맡아 줬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결단하고 다른 하던 일을 정리하고 오게 됐죠. 그때 친구들과 약속한 게 있어요. 전태일 열사가 노동자 삶을 위해 자기 몸을 헌신할 때 저는 지방에서 제 삶을 살며 (그런 사실을) 거의 몰랐지만, 그 뒤 교사를 하면서 알게 됐죠. 같은 나이다 보니 마음속으로 친구로 생각하며 지냈어요. (나를 찾아왔을 때) 최종인씨에게 나를 친구로 끼워 달라고 요청했죠. 기꺼이 그러자고 하더라고요.”

“나는 기초지식이 없어서 영어와 수학 과목은 이해하는 데 무척 힘이 들었다. 그렇지만 다른 과목은 다 재미있고, 50분 수업시간은 너무 짧은 것 같았다. 정말 하루하루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전태일 평전> 중에서)

- 전태일 열사는 남대문초등학교를 1년 남짓 다니고, 야간학교인 청옥고등공민학교를 몇 달 다닌 것이 학력의 전부로 알려졌다. 배우고자 하는 열망이 뜨거웠지만 어려운 형편에 봉제공장에서 일을 해야만 했다. 전태일의 친구로서 그런 배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나.

최종인 : 당연하다. ‘근로기준법’이 한자로 돼 있었다. 읽을 수 없으니까, 독학으로 읽었다. 대학생 친구가 옆에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항상 꿈을 갖고 있었다. 저 역시도 비슷했다.

- 전태일 열사는 월급을 모아 학교에 갈 계획을 세웠지만 결국 이루지 못했다. 전태일은 배움의 열정을 접고 어린 시다 곁에 남았다. 전태일 장학사업도 전태일 열사의 ‘풀빵 정신’을 잇기 위해서라고 했다.

이수호 : <전태일 평전>에서도 보면 전태일은 배움에 대한 열망이 엄청 강했다. 정규학교는 못 갔지만 자기가 아끼던 곤로를 팔아서 통신교육 교재를 샀다. 공부해 보려고. 그만큼 배움에 대한 열망이 간절했다. 자기가 잘살려면 재단사를 하면서 일만 하고 나머지는 공부를 할 수도 있었을 거다. 하지만 어린 시다들을 돌보고 친구들을 만나 평화시장을 어떻게 고칠지 의논하고, 어려운 일 있으면 노동청을 찾아갔다. 청옥고등공민학교에서 채 1년이 안 된 그 시기를 자기 생애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했다. 전태일의 친구들도 다 비슷했다. 어린 나이에 어쩔 수 없이 공장에 가서 일하는 사람들 목표가 기술을 배우거나 공부하거나 그런 꿈이 있었을 것이다. 전태일은 다른 목표를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고 친구들은 노조를 중심으로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새로운 역사를 펼쳤다.

최종인 : 전태일이 우리를 깨우친 것은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정부와 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누구도 그 사람 열정에 못 쫓아갔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했다. 친구들 보기에도 대단했다. 친구들은 같이 그 열정을 습득했다. 본인을 불태웠는데 우리가 그 뒤를 맡아야 한다고, 우리도 같은 열정을 갖게 됐다.

▲ 정기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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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의 ‘풀빵 정신’ 담아 낼 더 큰 그릇 준비

전태일 장학사업은 시작한 지 6년째인 지난해 11월 전태일·이소선장학재단 출범으로 새로운 도약을 했다. 처음 최 이사장이 적금으로 모은 1억원은 5년짜리 장학사업을 기약했던 것이다. 최 이사장은 또다시 결단했다. 자신의 조그만 건물을 담보로 5억원을 대출받아 출연금으로 기탁했다. 과거 청계피복노조 활동 중 당국 탄압으로 입은 피해 보상 재판에서 일부 승소해 받은 보상금, 이수호 전 전태일기념관장의 퇴직금 등 전태일의 친구들과 후배들이 십시일반으로 9천200만원을 모았다. 그렇게 장학재단이 탄생했다.

- 왜 장학재단으로 전환하고자 했나.

이수호 : 장학사업을 끌고 가는 주체들이 이 사업을 더 잘해 보자, 중요한 사업으로 해 보자는 의지를 갖고 노력했다. 그러던 중 규모를 키워서 새로운 법인으로 만들면 우리 사회에 더 신뢰감을 줄 수 있을 거고, 더 많은 이들이 참여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또 하나는, 우리 둘 다 70대 중반이 되니까 이제 인생을 마무리할 때가 됐는데, 지금 재산을 좀 더 의미 있게 쓸 수 있게, 참여할 수 있는 틀과 그릇을 만들자는 의미가 상당하다. 그런 것이 합쳐져서 정식 재단으로 등록하고 법인을 냈다. 사회적 인식과 분위기가 달라지고 참여 폭이 넓어진 것 같다.

최종인 : 공신력이 더 생겼다. 기존 기부문화를 보면 대기업 장학재단이 많다. 우리도 장학재단이 있어야 장학사업을 계속할 수 있다. 진짜 (사각지대에 있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지급할 수 있는, 그런 새로운 기부문화를 목표로 해서, 회원들도 모집하고 있다.

이수호 : 대체로 장학재단의 경우 재벌이나 기업에서 출연자가 몇백 억원, 몇천 억원을 내고 그 이자로 기관의 추천을 받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형태다. 우리는 그보다 실제로 많은 분들이 참여하게 하는 재단으로 가자, 종인씨가 말한 것처럼 장학재단 후원회를 만들자. CMS를 통한 소액출연 형식으로 말이다. 장학사업이자 후원회원사업으로 해 보자. 최근 들어 노동공제회 운동이 떠오르고 있는데 그것과 잘 결합해서 우리 후원회원이 되면 ‘노동공제연합 풀빵’ 공제회원 자격을 주고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도 만들고 있다.

전태일 장학사업을 통해 지난 7년간 모두 125명에게 1억8천550만원의 장학금을 줬다. 올해는 총 26명에게 4천100만원 정도 장학금을 지급했다. 기존 장학생과는 사뭇 결이 다르다. 노동·사회운동가나 봉제노동자 자녀, 이주노동자 지원도 이뤄진다. 최근에는 코로나19로 어려움에 처한 자영업자 자녀들도 많이 포함됐다고 한다.

지난 7년간 125명에게 1억8천여만원 장학금 수여

- 그동안 장학금 수여자 중 기억에 남는 사례가 있나.

이수호 : 홀로 간병을 맡다가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해서 법정에 선 대구 청년이 있었다. 이 사건은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였다. 복지 사각지대 속에서 아무도 돌보지 않다가 벌어진 사건이었다. 장학재단에서 장학금 지급을 결정했다. 매월 영치금으로 얼마씩 넣어 줘 공부하고 희망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랐다. 전순옥 이사가 재판도 방청하고 가끔 면회 가고 편지도 보내면서 언론에 보도됐다. 그걸 보고 많은 분들에게 소액이지만 후원이 이어졌다.

또 하나는 나이 마흔의 라이더인데, 그 일로는 도저히 (먹고살기가) 안 되니 온라인으로 주택관리사·전기기사 자격증 같은 공부하고 싶다고 신청해서 (장학생으로) 받았다. 그분은 지금 일하면서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다.

- 장학생들은 어떻게 선정되나.

이수호 : 꼭 정규학교가 아니라더라도 정말 사각지대에 있는, 돌보기 힘든 분들을 찾아서 주고자 한다. 너무 형식적인 절차보다 신청이 들어오면 제가 일일이 전화해서 확인하고 그 과정에서 힘도 주고자 한다. 장학금 지급에서 끝나지 않고 계속 연결해서 공부를 열심히 하는지 확인도 하고 격려도 한다. 전화를 하면 좋아하더라.

최종인 : 청우회 회원 가족들도 장학금을 받았다. 저는 그 사실을 몰랐는데, 나중에 청우회 가족들을 만나면 이런 틀을 만들어 줘서 감사하다고 인사하기에 알게 됐다.

세월이 흘렀어도 그 시절 어려운 노동자 현실은 지금이라고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최 이사장은 “70년대민주노동운동동지회(70민노회) 가족들에게도 장학금이 지급됐나 보다”며 “나중에 진짜 어려운 사람에게 쓰였다고 감사하다고 인사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전했다.

- 전태일·이소선장학재단이다. 이소선 어머니 이름도 함께 들어간 이유는.

최종인 : (장학재단을 만든 것을) 너무 잘했다고 생각한다. 어머니 살아생전 친어머니처럼 모셨다. 어머니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섰다. 어머니 뜻도 장학재단과 많이 관계돼 있다. 어머니도 참 훌륭한 분이다. 어머니가 이런 일 한다고 참 좋아하실 것 같다.

이수호 : 종인씨는 친어머니처럼 이소선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이소선 어머니는 평소 손잡아라, 하나가 돼라고 말씀하셨다. 태일이가 어린 여공들에게 풀빵을 나눠 준 마음이 이 안에 다 녹아 있다. 어머니도 늘 가난했다. 누가 뭔가를 갖다 주면 더 힘든 투쟁하는 곳에 갖다 줬다. 그러니 늘 가난했다. 최종인도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내가 가진 것을 나누려고 하는 거다.

최종인 : 살아 있을 때 하려고 그런다. 죽으면 못 한다.

이수호 : 전태일은 자기 돈으로 풀빵을 사주고 걸어서 집으로 갔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어려운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서 참여하고 나누자는 게 우리 장학재단의 기본정신이다. 종인씨와 친구들은 그것을 몸으로 실천하며 살았다.

최종인 : 제가 출판사 할 때였다. 유가협 가족 중 어려운 학생이 있는데 네가 도와줬으면 한다고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그러면 뿌리치지 못했다. 어머니와 태일이는 정의롭지만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친구들도 어머니와 태일이를 따른 것은 그런 과정을 봤기 때문이다.

정기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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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롭지만 정이 많은” 전태일·이소선을 따르다

이소선 어머니의 배움에 대한 일화는 또 있다. 이수호 이사장은 “청계피복노조 건설과정에서 묘한 에피소드가 있다”며 “1972년 육영수 여사가 어머니를 초대해 필요한 게 없냐고 물었는데, 어머니가 공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강력히 주장해서 새마을노동교실을 세웠다”고 소개했다.

노동교실은 이후 사용자에 의해 노조의 운영권을 빼앗겼고 어머니는 노동교실 운영권을 되찾기 위한 투쟁을 벌이다 구속되고, 노동교실은 강제로 폐쇄당하기도 했다.

최 이사장은 “평화시장 노동자와 청계피복노조 조합원들은 배움에 대한 갈망이 컸다. 똑똑하고 의식이 깨인 사람들이 참여했다. 저는 청우회 회원들에게 항상 긍지를 갖자고 했다, 우리는 평화대학 출신이다, 여기는 일반대학에서 가르치지 못하는 사회대학이다. 여러분은 똑똑한 사람들이다, 어디에 가든 긍지를 갖자고 했다. 실제 초등학교만 나온 사람들이라도 그 뒤에 공부해서 대학원도 나오고 그랬다”고 회고했다.

- 장학재단의 목표는.

이수호 : 다른 장학재단처럼 양적으로 경쟁하기는 어렵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장학금을 주고자 한다. 특히 다른 장학재단에서 빠진,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많이 가지려고 한다. 장학금도 1회 지급하는 것으로 끝내는 게 아니라 계속 관계를 맺고 사후관리를 하자는 생각이다. 10만 후원회원 가입운동을 펼쳐 장학기금 100억원을 만들자고 구호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만큼 크게 만들도록 노력하자는 의미다.

- 전태일 열사와 산업화 시대라는 동시대를 살았던 두 이사장께서는 지금 한국 사회에서 전태일 정신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보나. 장학재단을 통해 어떻게 이어지길 바라나.

이수호 : 전태일 분신 뒤 50년 넘었음에도 우리나라는 양극화 속에서 불평등은 점점 심화하고 있다. 이름만 다를 뿐 당시 태일이가 풀빵을 사준 어린 여공 같은 가난한 사람들은 지금 더 많이 존재하고 있다. 전태일의 나눔의 정신, 이소선 어머니의 함께 손잡는 정신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우리 사회 불평등 해소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것이 전태일 운동의 또 다른 방향이 아닐까.

최종인 : 70년대 산업화 시대에 봉제노동자들은 하루 15시간 이상, 일요일도 없이 일했다. 그렇게 해서 수출도 많이 했다. 그 어려운 시대에 전태일은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불살랐다. 전태일 정신을 친구들이 뒷받침하고자 노조를 통해 계속 그 역할을 했다. 역사의 십자가를 진 전태일의 뜻을 후세들이 잘 이끌어 줬으면 한다.

정리=연윤정 기자
사진=정기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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