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영 상명대 경제금융학부 교수(<트렌드 코리아> 시리즈 공저자)

이준영 상명대 교수
이준영 상명대 교수

다중정체성의 시대, 멀티 페르소나(multi-persona) 트렌드가 심화되고 있다. 원래 페르소나(persona)는 고대 그리스 시대에 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일컫는 단어다. 심리학자 구스타프 융이 이 단어를 심리학 용어로 사용하게 되는데, 인간은 천 개의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어서 상황에 따라 적절한 페르소나를 바꾸어 쓰면서 삶을 살아간다고 했다. 인간은 페르소나를 통해 삶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바꾸어 가며 주변 세계와 상호 소통하고 관계를 형성한다. 이른바 ‘연극학적 정체성’에 따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연극무대이고, 우리들 각자는 스스로 배우라고 한다. 사람 ‘person’이라는 단어가 가면을 의미하는 페르소나 ‘persona’에서 어원을 가지고 있는 이유다.

과거에는 혈통, 가문, 직업 기반의 전통적 정체성이 중요했다. 그러나 현대사회로 오면서 전통적 정체성은 해체되며 이를 대신하는 다양한 정체성 의식이 등장하고 있다. 우선 소비정체성이 있다. 이는 자신이 구매한 물건이나 소유물에 의해 자기 정체성이 결정된다는 물질주의적 관점이다. 결국 사람들은 더 많은 돈과 물질을 갖기를 원하고 이를 통해 더욱 값비싼 물건을 소유해서 자신의 정체성 의식을 고양하기를 원한다.

온라인을 통한 가상정체성 역시 현실의 자아와는 완전히 상이한 방식으로 펼쳐진다. 특히 인간관계의 온라인화 현상이 심화된다. 온라인의 인간관계가 중요해지면서 오히려 오프라인에서의 인맥을 ‘실친(실제 친구)’이라고 특별히 일컫기도 한다. 실친보다 ‘페친(페이스북 친구)’, ‘인친(인스타그램 친구)’이 중요해진다. 오히려 온라인 친구를 더 신뢰하고 이들의 신념과 견해에 의해 더 큰 영향을 받기도 한다. 온라인·SNS 자체가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나가는 중요 플랫폼으로 자리잡고 있다.

SNS를 사용할 때도 그것이 페이스북인지, 인스타그램인지, 트위터인지에 따라 전혀 다른 정체성을 표출한다. 심지어는 한 사람의 SNS에서도 부계정, 가계정 등 여러 개의 계정에 서로 다른 자신의 모습을 다양하게 표현한다. 마치 중국의 변검배우가 여러 가면을 돌려가며 바꿔 쓰듯이 현대인들은 시시각각 다른 사람으로 변신한다. 실제로 많은 Z세대 청년들은 인스타그램 계정을 두 개 이상 만들어 각 계정에 서로 상반되는 라이프스타일과 정체성을 표출하는 경우가 많다.

인스타그램 해쉬태그(#)를 통한 취향중심의 SNS가 주요 커뮤니케이션 매체로 떠오르면서 이제는 취향정체성이 매우 중요해졌다. 전통적인 직업정체성을 넘어서 이제 자신의 취미와 취향을 통해 스스로를 규정하고 표현하는 것에 익숙해지고 있다. 최근 SNS를 중심으로 ‘~하는 누구’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보디빌딩하는 쿨가이 소방관’, ‘운동하는 치과의사’와 같이 뒤에 있는 ‘누구’라는 직업정체성보다 오히려 앞의 수식어인 ‘~하는’이 더 중요해지는 취향 정체성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현대인의 멀티 페르소나는 AI와 알고리즘을 통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수동적 정체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자신의 취향과 취미를 내 스스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AI와 머신 알고리즘에 의해 기계가 끊임없이 나의 취향을 분석하고 그 사람의 정체성을 인위적으로 형성시킨다. 취향의 주체가 내가 아닌 기계가 되는 것이다. 콘텐츠 이용에 있어서 소비자가 자율적으로 취향들을 스스로 선택한 것 같지만 실상은 취향이 기계 즉 머신(machine)에 의해 인위적으로 수집되고 형성된다. 계속해서 나의 취향과 사상이 머신에 의해 편향되게 심화되는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많이 시청하는 동영상 앱의 추천 알고리즘도 사상과 이념의 ‘온라인 확증편향’을 부추길 위험성이 있다.

멀티 페르소나의 시대에 인간의 다원성은 확장되었지만 역설적으로 정체성의 기반은 매우 불안정해졌다. 정체성이 다양화되어 분절된다는 것은 그만큼 정체성 의식이 혼돈되고 해체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의미다. 무엇보다 ‘나다움’이란 무엇인가? 진짜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확고한 자기 답변이 있어야 한다. 정체성 해체의 시대에 진정한 ‘나다움’의 의미를 찾고 견고한 정체성을 형성하는 방법에 대한 현대인의 고민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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