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 산골에 들어오기로 작정하고 이삿짐을 쌀 때는 나이 51살이었다. 모두들 한참 일할 나이라고 했다. 나도 그렇다고 여겼고, 이후 이 산골에서 진주시내까지 통근했다. 대중교통으로 오가려니 왕복 네댓 시간이 걸렸다.

아침 6시 조금 지나 2km를 걸어 버스정류장으로 나갔고, 지리산 칠선계곡에서 나오는 첫차를 받아 타고 읍내 버스터미널로 가고, 거기서 진주행 버스를 탔으니 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출근길 역순으로 퇴근하면 밤중이었다.

그래도 나는 이 집이 좋았다. 직장을 버릴까, 이 집을 버릴까 하는 고민 끝에 나는 직장을 버렸다. 살아보면 살아지겠지 했다. 월급을 못 받게 된 현실은 나에게 크게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렇게 이 집은 나를 품었다.

“아따. 집터가 참 좋네요. 배산임수에 좌청룡 우백호가 척 그려집니다.”

“수맥도 피하고 수구도 피했으니 이만한 집터가 어디 있겠소.”

우리 집을 찾은 민박손님 가운데 내로라하는 건축가도 있었고, 과학적 근거에 입각해 터를 본다는 지관(地官)도 있었다. 그들은 우리 집터를 이렇게 평했다. 뒷짐을 진 채 멀리 지리산을 내다보며 집터를 해설하는 그의 뒷모습이 무척 평화로워 보였다.

심지어는 이 집 어느 방에서 아이를 가지면 좋을 것인가를 봐주겠다는 풍수장이도 있었다. 자식이 혼인을 하면 자기가 찍어주는 방에서 아이를 가지도록 하면 기막힌 운세를 가진 자손을 볼 거라고도 했다.

“매사에 조심혀. 그 집 전에 살던 사람이 망해서 나간 집이여.”

“그 집 예전에 면장이 살던 집이여. 그 전에는 사오백 석 하는 부잣집이고.”

마을 이웃들의 우리집터에 관한 평가는 이처럼 극명하게 갈렸다. 어떤 이는 좋은 집터라 하고 어떤 이는 망한 집터라 했다.

내가 이사 오기 전 이 집은 빈집이었다. 농협 빚에 쫓겨 야반도주한 집이라 했다. 한밤중 1톤 트럭에 짐 챙겨 네 식구가 소리 소문 없이 도망친 집이라 했다. 말 그대로라면 흉한 집이었다.

 

김석봉 농부
김석봉 농부

좋은 집터

그러나 내가 처음 이 집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마당을 뒤덮은 잡초와 부서진 문짝은 보이지 않았다. 장독대 흩어진 사금파리와 썩어 내려앉은 마룻장은 눈에 들지 않았다. 오직 마을을 휘두른 산맥과 앞으로 건너 보이는 지리산이 나를 포근하게 감싼다는 느낌뿐이었다.

“이 집터는 기가 참 셉니다. 그 기운을 누를 수 있는 사람이 차지하면 좋은 집터요,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자리 잡으면 필경 망할 집터지요.”

이 집에서 대여섯 해 살았을 무렵 우리 집을 찾은 손님 가운데 지관이 있었는데 그이가 이런 평가를 내려주었다. 용과 범의 혓바닥 위에 자리 잡았고, 동고서저(東高西低) 지형이니 기운만 변치 않으면 순리대로 잘 흐를 집터라고 했던가.

그때야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가 제법 고집불통이기도 하고, 사뭇 그릇된 일을 만나면 물어뜯고 늘어지기도 하니 나 스스로 내 기운이 제법 셀 거라 여기던 차였다. 어쨌거나 이 집터에 얽힌 여러 평가 가운데 어쩜 나에게 딱 맞는 해설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며칠 전이었다. 한밤중에 마을방송이 요란을 떨었다. 산 너머에 산불이 났으니 대피할 준비를 하라는 거였다. 마당으로 뛰쳐나왔다. 서쪽 능선으로 연기가 솟구치고 불꽃이 반사되어 하늘이 벌겋게 물들었다. 바람은 세차게 불었다. 매캐한 연기냄새가 바람결에 실려 왔다. 금세라도 불꽃이 산을 넘어올 것만 같았다.

“이를 어째, 불이 넘어오면 어째요. 저 봐. 산 너머가 온통 벌겋네.”

아내는 발을 동동 굴렀다. 이웃들도 하나둘 골목으로 뛰쳐나오고 있었다.

“불이 금방 넘어오겠는데? 그래도 우리 마을이야 괜찮지. 개울이 가로막고 있고, 논밭이 산 아래까지 이어졌으니 아무리 센 불길이라 해도 여기까지야 건너오겠어?”

“아, 저기 울진인가 거기 산불 안 봤어요? 불덩이가 산을 넘어 다닌다더마.”

“우리 마을은 걱정할 거 없고, 저 너머 금대암 가는 길 가에 지은 집들이 큰일 나겠네. 산불이 넘어오면 저기 뒷골 새로 지은 집들도 온전치 못할 거고.”

몇 년 사이에 마을 뒤편 산자락엔 제법 많은 집이 들어섰다. 머구밭골에 3채, 운골에 5채, 안골에도 3채가 들어섰다. 다들 외지인이 주말용 별장으로 쓰거나 귀촌한 사람 집이었다. 숲과 지근거리여서 울진산불을 상기하면 피해는 불을 보듯 뻔했다.

“집은 마을 안에 지어야지. 마을이 그냥 마을이 아니거든. 그만큼 오랜 세월 사람들이 살아오면서 재해로부터 안전을 검증받은 곳이 마을이야. 물 좋다, 경치 좋다 하며 여기저기 아무 곳에나 집을 지으니 재해 앞에서 문제가 생기는 거라고.”

다음날 아침 다행히도 불길이 잡혀 별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소식을 전해 듣기까지 우리는 걱정에 잠을 설쳤다.

지금껏 이 집에서 15년을 살았다.

살아오는 동안 크게 우환이 없었으니 우리 가족에겐 좋은 집터임에 분명했다. 큰 비가 내리고 태풍이 왔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 지관 말대로 내 기운이 이 집터를 다스리는 건지, 집터가 우리 가족을 잘 품어 안았는지는 모를 일이다.

이런 세상에서 참한 며느리도 만났고, 귀여운 손녀도 받아 안았고, 언덕배기 논배미도 장만했으니 이게 다 집터 덕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고, 경제적 형편도 많이 풀렸으니 그 이유를 딱히 어찌 설명할 수 있나. 그저 조상이 도왔거나 좋은 터를 만났기 때문이리라.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우리가 여기로 들어온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지?”

“그러게. 우리가 아직도 도시에서 살았으면 지금쯤 뭐하고 있을까?”

“전세방을 전전하면서 당신은 조그만 식당이나 운영하고 있겠지?”

“당신은 식당일 도우며 꾀죄죄한 모습으로 기원이나 들락거리고?”

가끔 아내와 나누는 대화가 이랬다. 내가 생각해도 그런 모습밖에 그려지지 않았다. 어느 순간 이 집을 만났고, 도시를 떠났고, 온 가족이 이 터에 깃들어 나름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으니 집터에 대한 신뢰는 누구보다 더했다.

권위주의가 집터에서 나오나?

대통령 집무실을 국방부 청사로 옮긴다고 한다. 청와대는 권위주의의 상징이니 시민을 만나기 쉬운 장소로 나가겠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당선자의 행보도 남다르게 탈권위적인 모습을 보였다. 남대문시장을 방문하고, 국밥을 먹고, 대중목욕탕에 가는 행실을 보여주었다. ‘나는 이런 서민인데 어찌 청와대와 같은 집에 들어가 산단 말이냐.’며 응석을 부린 것 같았다.

기필코 청와대로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떼를 쓰는 듯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릴 때 여기저기서 ‘청와대 터가 좋지 않아 못 들어간다.’는 말이 돌았다. 그래도 이 나라 대통령 당선자인데 그렇게까지 하랴 싶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또 혹시라도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당선자가 후보 시절 손바닥에 써 보인 왕(王)자도 그렇고, 당선자 부인이 한 언론사 기자와 나눈 대화라든가, 역술인들과의 친분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쥐고 흔드는 요설에 얽매이지 않고서야 어찌 저런 모습을 보일까 싶기도 했다.

나라에서 쫓겨난 이승만 대통령부터 탄핵되어 감옥 간 박근혜 대통령까지 청와대 주인들은 대개 비운의 말년을 맞았다는 것이 탈청와대 이유라는 것이지. 시쳇말로 터가 매우 사납다는 거지. 대통령 당선인의 말년이 걱정된다는 거지.

어느 유능한 지관이 있어 대통령 당선자의 생각을 그리 이끌었는지, 국가운영에 관한 본인의 철학과 의지의 발로인지는 모르겠으나 이건 아니다. 국민 삶을 위해 할 일이 부지기수건만 대통령 당선자라는 사람이 일터타령이나 하는 것이 못마땅하고, 이 나라 국토방위의 사령탑을 자기 일터로 삼겠다며 밀어붙이는 것이 볼썽사납다.

대통령이 국민 말에 귀 기울여 주기 위한 장소가 청와대면 어떤가. 대통령이 국민을 만나고 섬기기 위해서라면 집무실 위치가 그리 대순가. 국민은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데 그런 군색한 이유로 고집을 부리니 그 우매함에 기겁하는 것이다.

청와대 터가 안 좋을 리가 있나. 내가 보기에 좋기만 하드만. 거기 무장경찰이 국민들 발걸음을 통제하고, 목소리를 틀어막고, 눈동자를 가리니 안 좋은 게지. 그러고도 주인입네 행세하다 부정축재하고, 권력을 사유화하고, 총칼로 겁박하고 그래서 그런 말년을 맞은 게지.

저 자리에 청와대를 두고서도 국가는 번영했고 국민은 잘 살아왔다. 억울한 일도 당하고, 이리저리 떼밀리면서도 꿋꿋이 이 나라를 지켜왔다. 터가 사납거나 말거나 나라는 대국이 되었고 국민들은 법을 잘 지키고 따랐다. 불의에 항거할 줄 알았고, 국난 앞에 힘을 모아 나라를 건사해왔다.

핑계도 댈 걸 대야지. 권위주의가 집터에서 나오나? 청와대는 불통자리고 용산 국방부청사는 소통자리라고? 청와대를 국민에게 돌려준다고? 기가 차고 속이 터질 일이다. 괜한 짓 하면서 ‘국민과의 소통’이라는 말을 수식어로 덧붙이지는 말아야지.

나는 이 집터가 좋다.

살아오면서 좋은 일만 있었으랴. 마을일로 송사도 당하고, 민원에 시달리며 머리카락도 많이 듬성듬성해졌다. 이장선거에 나가 낙선도 하고, 아는 사람에 속아 돈도 좀 떼였다. 보름이가 크게 다치기도 했고, 아내는 대상포진으로 고생도 했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 일을 사랑했다. 각자가 성의 있게 열심히 살았다. 나는 농부로, 아내는 민박집 주인으로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며 살았다. 옳고 그름을 분별하며 살았다. 약한 사람을 편들며 살았다.

그렇게 살다 보니 마음이 평온해지고, 집안일도 순조롭게 풀렸다. 마침내 이 집터가 좋은 집터가 되었다.

청와대도 그랬으면 좋겠다. 주인이 부패하지 않으면 된다. 부정한 일을 삼가고 과한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된다. 너그럽게 지혜롭게 국민을 섬기면 된다. 그러면 좋은 터가 되고 그렇지 못하면 사나운 터가 된다.

코로나가 극성이고, 국제정세가 안개 속이다. 이래저래 국민의 삶은 도탄에 빠졌다. 새 집을 짓는 일보다 더 시급한 일이 차고 넘친다. 청와대에 들어가 살면서 천천히 살펴보고 계획하고 옮겨가도 늦지 않다.

국민은 하루하루 허겁지겁 어렵게 살아가는데 어찌 대통령 당선자로써 이런 일을 함부로 꾸미는가. 이처럼 무리하게 밀어붙이는 것이 고집불통이지 국민소통이랄 수 있나. 집무실 이전계획과 대통령 당선자의 서민 흉내 내기가 풍수장이의 요설에 의한 행각이라는 합리적 의심이 드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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