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안녕, 기독교>(토기장이) 저자 김정주 전도사가 진행한 평신도 글쓰기 모임 '쓰고뱉다' 완성반 참석자가 쓴 글입니다. '한 권의 책 쓰기' 프로젝트에서 저술한 단행본 형식의 미출판 원고 중 일부를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 '사모행전 - 교회밖에 사모'는 10회에 걸쳐 격주로 연재됩니다. - 편집자 주

은정이는 청년부에 온 지 얼마 안 된, 지적장애가 있는 친구였다. 나이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친구라서 오자마자 모든 사람의 나이를 물어보고 다녔다. 은정이는 우리가 나이가 같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민달팽이, 너는 내 친구야"라며 내 말만 듣고 내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처음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5학년 때까지 지적장애가 있는 어느 언니와 같은 반을 하며 짝꿍을 도맡아 했던 경험이 있다. 나는 그 언니를 잘 몰랐고 언니네 부모님도 당연히 몰랐는데, 그 언니 부모님이 매번 나를 짝꿍으로 지목했단다. 그 이전까지 내가 가진 기억이라곤 초등학교 1학년 때 언니네 남동생과 짝꿍을 한 적이 있었다는 것뿐인데 말이다.

짝꿍으로서 해야 할 일이 참 많았다. 쉬는 시간마다 언니를 데리고 화장실을 가야 했고, 언니가 수업 시간에 이상한 소리를 내면 조용히 시켜야 했다. 결국 지치고 말았던 나는, 5학년 어느 날 "저만 언니랑 짝꿍을 하는 건 부당하다"고 담임 선생님께 울면서 말했다. 같은 반 여자아이들의 핀잔이 있었지만 언니와의 짝꿍에서 벗어났고, 솔직히 참 홀가분했다.

은정이는 그 언니를 떠올리게 했다. 그 언니로부터 도망쳤던 죄책감, 청년부 목장 리더라는 책임감, 나이가 같다는 동질감, 남자친구가 신학생이라는 어떤 의무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게다가 은정이를 전도한 어느 집사님께서는 나에게 전화해 "은정이를 믿고 맡기겠다"고 말씀하시기까지 했다.

청년부 예배는 토요일 저녁 7시였지만 은정이는 4시부터 교회에 왔다. 목장 리더로, 중고등부 교사로 준비할 게 많았는데 은정이만 보살펴야 했다. 비만·당뇨·고혈압 등으로 약을 먹는 은정이가 근처 편의점에서 몸에 안 좋은 음식을 사 먹는 것도 말려야 했다. 은정이네 부모님께 은정이 용돈이 얼마나 되는지 여쭤보기도 했다. 은정이가 편의점에서 돈을 쓰지 않도록 용돈을 조절해 달라는 당돌한 전화를 드리기도 했다. 

언젠가 수련회에 때는, 가던 길에 버스를 돌려 은정이네 집까지 다녀온 적이 있다. 은정이가 뇌전증 약을 두고 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기 때문이다. 뇌전증 환자가 약을 먹지 않았을 때 벌어지는 일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약을 가져오느라 결국 수련회에 늦고 말았고, 모든 일정이 어그러진 게 은정이를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내 잘못인 것만 같았다.

책임감만으로 은정이를 돌보다가 결국 또 지치고 말았다. 언제부터인가 은정이가 자꾸 중고등부 예배에 왔다. 당장 중고등부 아이들도 챙겨야 하고, 할 일도 많은데 계속 나만 따라다니며 '민달팽이야~ 있잖아~'를 외치는 은정이가 너무 싫었다. 그만 참아 왔던 버거움이 터져 버렸다. 청년부 담당 목사님을 찾아가 펑펑 울면서 도저히 못 하겠다고 했다.

목사님은 그런 나를 책망하지 않으셨고, 은정이에게 가서 더는 중고등부 예배에 찾아오지 말라 얘기하라고 하셨다. 그래도 괜찮다고 말이다. 하지만 정말 괜찮았던 걸까. 내가 그 말을 꺼낸 이후, 은정이는 어느 순간 이사를 간다며 교회에 나오지 않았다.

학교에서 언니로부터, 교회에서 은정이로부터 도망쳤던 나는, 장애를 가진 시아주버님과 가족으로 만나게 됐다. 시아주버님은 은정이만큼 중증은 아니었지만, 태어날 때부터 알 수 없는 병으로 뼈가 이상하게 자랐고, 시력과 청력도 매우 낮은 희귀 질환을 앓고 있었다. 일상생활에 큰 지장은 없지만, 신체가 건강한 이들과 똑같이 생활하기는 힘들었다.

장애인 친구와 가족은 느낌이 달랐다. 아주버님을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다. 어떻게 해서든지 아주버님의 자립을 돕겠다고 했지만, 사실은 언젠가 닥쳐오게 될, 아주버님을 맡아야 하는 책임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 같다. 돌아보면 딱히 자립을 돕지도 못했다.

아주버님의 독립을 돕지도 못한 채, 남편과 함께 새로운 사역지로 이사했다. 그렇게 또 도망을 쳤다. 뜻밖에도 아주버님은 다니던 교회 공동체를 통해 원하는 일자리를 얻었다. 비록 비정규직이지만 재택근무를 하며 하루 한두 시간 정도 컴퓨터로 일을 하고 있다. 그 교회는 아주버님을 찬양팀 리더로 세우기도 했고, 나이가 많아져 더 이상 청년부 예배에 가기를 부담스러워하는 아주버님을 위해 자주 전화 심방도 해 준다고 한다.

우리 아이들도 아주버님을 아주 자연스럽게 대한다. 아이들에게 큰아빠는 그저 큰아빠일 뿐이다. 아이들은 모든 놀이 시간에 꼭 큰아빠를 부른다. 다리가 아프면 앉아서 놀아 주면 된다고 말한다. 그 사람의 상황에 맞게 '함께하는 방법'을 생각한다. 책임지지 못할 것 같아 도망만 쳤던 나와는 다르다.

나는 끝까지 도망치는 자였다. 가족이 된 이에게서조차 도망칠 궁리만 했다. 그러나 아주버님이 속한 청년부 지체들과 우리 아이들은 달랐다. 그들은 모두 아주버님과 '함께 나아가는 방법'을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다가갈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하나로 어우러질 수 있지 고민하고 행동했다.

나도 그 청년부 지체들과 같은, 우리 아이들과 같은 모습을 갖고 싶다. 나와 다른 이를 나와 같은 한 사람으로 대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사모가 된 나를 '존재 자체'로 받아 주지 않는 이들에게 밀려 교회 밖에 있었던 거라고 원망했던 내가, 오히려 누군가를 교회 밖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아니, 그들이 싫어 교회 밖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도망치는 나로부터, 도망치고 싶다. 그들과 함께 교회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

민달팽이 / 사모師母가 아닌, 하나님을 사모思慕하는 사람으로 살겠다고 다짐하며, 매일매일 아등바등 삶을 살아 내고 있는 이 시대의 '불량 사모'. 교회 '밖에'서가 아닌, 교회'밖에' 모르던 삶으로 돌아가려 여전히 애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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