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근배 전북대 과학학과 교수

국내 첫 여성과학자인 김삼순 박사. 1966년 57세 나이에 박사학위를 받고 버섯 연구에 일생을 바쳤다.[사진=과학과사람들 SNS 갈무리] 
국내 첫 여성과학자인 김삼순 박사. 1966년 57세 나이에 박사학위를 받고 버섯 연구에 일생을 바쳤다.[사진=과학과사람들 SNS 갈무리] 
김삼순 박사가 보여준 과학연구의 궤적은 아주 극적이다. 일본에서 그는 세계적 연구, 기초적 연구를 수행했던 데 반해 한국에서는 놀랍게도 지역적 연구, 응용적 연구에 치중했다. 활동 공간이 달라졌을 뿐인데 과학연구에서 커다란 방향 선회가 일어났다. 그럴지라도 그의 과학연구는 여전히 우수했고 남달랐는데, 왜 과학연구를 다르게 추구하고자 했고 그 과정에서 어떤 주요 연구성과가 얻어졌는지 살펴보자. 

◆ 세계적 과학저널 '네이쳐'에 논문을 발표하다

김삼순 박사가 쓴 첫 연구논문은 1943년 홋카이도제국대학 식물학과에서 발표한 학부 졸업논문이다. 일본 제국대학은 졸업요건의 하나로 논문을 요구하여 그도 1년에 걸쳐 실험연구를 실시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는 2편의 졸업논문을 제출했는데 현재까지 조사한 바로 한국인 제국대학 졸업생들 중 그가 유일했다. 과학연구에 얼마나 열중했는지 간접적으로 잘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연구주제는 곰팡이의 생리화학을 밝히는 것이었다. 홋카이도제국대학에는 식물학과와 동물학과가 있었고 곰팡이를 비롯한 균류는 분류체계가 명확히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식물학의 일부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가 제출한 논문은 '사상균에 의한 초산염 및 색소의 흡수'와 'Nitrite의 흡수에 대하여'였다. 이때 실험 과정을 낱낱이 기록한 연구노트도 남아있으므로 그의 졸업논문에 대한 과학사적 연구도 추후 본격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한 하나는 그의 과학연구는 매우 학문적 접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해방 이후 그가 과학연구에 남다른 열정을 기울인 결정적 이유는 박사학위를 취득하기 위해서였다. 연구대상은 곰팡이가 분비하는 탄수화물 분해효소인 타카아밀라제 A에 대한 것이었다. 일본에서 박사학위를 받으려면 여러 편의 우수한 연구논문을 발표해야 했다. 그는 일본의 과학저널에는 물론 세계적 유수저널에도 논문을 적극적으로 게재했다. 바로 1965년에 지도교수와 함께 2편의 연구논문을 Nature에 실었던 것이다. 한국인들 중에서 이 과학저널에 논문을 발표한 경우가 거의 없을 때였다.

이 논문은 빛과 단백질의 상호관계를 분자수준에서 밝히는 매우 도전적이고 첨단적인 연구주제를 다루었다. 학문분야로는 융복합적 성격을 지닌 생물물리학에 속했다. 구체적으로는 자외선과 가시광선을 다카아밀라제 A에 쬐었을 때 광에너지가 어떻게 리보플라빈(비타민B2)을 증감시키고 화학에너지로 전환되어 가는지 그 물리적, 화학적 과정을 체계적으로 규명한 것이었다. 실용적 가능성은 염두에 두지 않고 학문적이고 기초적인 과학연구를 수행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일본에서 그는 오직 대학의 연구실에 근무하며 순수연구를 추구했다. 지도교수가 제시한, 때로는 자신이 선택한 새롭고 중요하다고 여긴 학문적 주제를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그것도 지도교수의 도움을 받아 혼자서 수행하는 개인연구 방식이었다. 그 연구결과는 학위논문으로 발표하거나 우수하다고 인정받는 과학저널에 출간했다. 영미권의 세계적 과학저널에 연구논문을 게재하는 것에도 관심을 크게 기울였다. 반면에 자신의 연구성과를 활용하려는 진지한 생각과 노력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자신과 과학의 발전에 이바지할 생각으로 과학의 보편성을 지닌 ‘순수한 과학자’의 상을 추구했다. 

◆ 느타리버섯 인공재배에 최초로 성공하다

김삼순이 한국으로 돌아와 첫 연구주제로 잡은 것은 버섯이었다. 사실 버섯은 그가 연구를 한 적이 전혀 없는 매우 낯선 연구대상이었다. 그렇다면 왜 익숙하지 않은 연구주제를 선택한 것이었을까? 그는 한국에 돌아온 후부터 국가와 국민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될 과학연구를 하기로 결심했다. 버섯은 일본에서 인기 있는 먹거리로 한국의 농가소득과 식생활 개선에도 상당한 기여를 할 것으로 판단했다.

버섯 중에는 느타리버섯이 일차적 연구대상이었다. 그가 관심을 기울인 버섯은 야생에서 흔히 채취하던 느타리와는 다른 일명 굴버섯이었다. 이 버섯은 맛이 좋고 가격이 비싸며 재배가 쉬운 데도 당시 한국에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국가 차원에서는 해외 수출이 열리고 있던 표고와 양송이 재배에 대해서만 치중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는 1968-69년 정부로부터 연구비를 지원받아 굴버섯 연구를 체계적으로 수행했다. 일본에서 들여온 균주를 가지고 원목은 물론 인공배지를 이용한 효율적 재배 방법의 개발에 성공을 거두었다. 

그 결과 한국에서 느타리버섯이 보급되며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에 의해 느타리 균주가 농촌진흥청으로 제공되고 재배법도 알려졌다. 더 놀라운 것은 새로운 굴버섯이 기존 야생 느타리를 대체하며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를 계기로 농촌진흥청은 주변에서 구하기 쉽고 가격도 저렴한 볏짚을 이용한 재배법도 개발하며 국가 차원에서 그 보급에 열의를 기울였다. 이처럼 그의 과학연구로 새로운 품종이 느타리버섯의 전형이 되고. 나아가서는 3대 버섯의 하나로 급부상했다. 

그는 한국인들이 최고의 버섯으로 여긴 송이에 대해서도 연구했다. 송이버섯은 번식이 까다로워 오직 자연에서만 채취할 수 있는 고가의 진귀품으로 전량 수출되고 있었다. 그는 증산에 초점을 맞추어 중요하게 영향을 미치는 여러 환경 요인을 분석했다. 특히 송이 발생에는 온도, 습도, 강우가 절대적이므로 그 최적의 조건을 밝혀 제시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야생버섯의 인공재배 연구에도 힘썼다. 버섯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 인공재배의 대상 품종을 한층 더 넓히기 위해서였다. 무엇보다 구하기 쉽고 저렴한 톱밥 배지를 이용함으로써 버섯 재배의 실용성과 경제성을 높이려고 했다. 그는 여러 야생버섯이 인공재배가 가능하고, 그중에는 불로초(영지버섯)에 대한 선구적 연구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밖에 그는 농가소득 증대와 국민 식생활 개선에 도움이 될 다양한 과학연구를 수행했다. 국민 식생활과 관련해서는 청국장을 만드는 낫토균에 대한 연구를 벌였다. 단백질 분해력이 우수한 효소를 분비하는 새로운 균주를 얻었고 이를 이용한 개량식 청국장이 영양과 향미에서도 더 뛰어나다고 밝혔다. 발효식품에 사용될 균주를 죽림 토양에서 채취하여 시험연구를 한 결과 탄수화물 분해효소인 아밀라제의 생성력이 높은 새로운 균주를 찾아냈다. 이 균주는 일본에서 사용되고 있던 균주에 비해 2배 이상의 우수성을 보여주었다. 농가의 소득 향상과 관련해서는 메탄가스 연료화에 직결된 고능력 메탄가스 생성균을 찾는 연구를 국내 처음으로 시도했다. 다양한 가축 배설물에서 새로운 균주를 찾아 분리하고 이를 이용하여 메탄가스 발생시험을 추진했다. 이를 통해 메탄가스 생산에 적합한 우수 균주, 적절한 배지, 환경조건 등을 찾아내 제시했다. 사상균과 담자균을 이용하여 고구마순, 옥수수대 등과 같은 농산물 폐기물 혹은 균체 그 자체를 가축 사료로 만드는 시험연구도 수행했다. 그의 연구로 섬유소 분해 효과가 비교적 우수한 것으로 나타나 사료화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이 얻어졌다.  

◆ 버섯연구 원전 '버섯도감'을 출간하다

김삼순이 버섯 분류연구에 새로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한국균학회에서 활동을 하면서였다. 한국균학회는 그의 주도로 1972년에 각계 인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세워졌다. 그는 초대 회장으로 많은 연구자들을 참여시켰고, 그중에는 버섯 연구자들이 대거 포함되었다. 이에 따라 버섯 연구와 관련한 다양한 학술행사가 개최되었고 학술지에 가장 많이 실린 논문도 버섯에 대한 것이었다.

1977년에는 수백 종에 이르는 버섯에 대한 우리말 이름이 저마다 달라 교육과 연구에 문제가 발생한다는 생각으로 한국균학회 총회에서 그의 발의로 대책을 마련키로 했다. 우리말 버섯이름의 통일안과 원색 버섯도감을 만들 위원회를 설치하고 그가 책임을 맡아 이끌었다. 많은 논의 끝에 한국 기록종 버섯 190속 588종에 대한 ‘한국말 버섯이름 통일안’이 제정되었다. 노란갓벚꽃버섯, 흰삿갓깔때기버섯, 여우꽃각시버섯, 마귀광대버섯(독성), 비단그물버섯, 푸른주름무당버섯, 부채메꽃버섯 등과 같은 수많은 멋진 버섯 이름이 만들어졌다.

이 과정에서 그는 두 가지 사실을 크게 깨달았다. 하나는 한국 균학이 버섯 분류에 대한 전문성이 결여되어 있고, 다른 하나는 수준 높은 새로운 버섯도감의 출간이 절실하다는 점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버섯 분류연구에 참여하여 연구논문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야생 채집을 통해 한국 미기록종을 확인하고 그에 우리말 이름을 새로이 붙였다. 나아가서는 버섯 분류를 정교히 하기 위해 미세구조도 조사해 발표하기도 했다.

버섯도감 준비를 위해 그는 후학 김양섭을 1982년 일본 시가대학의 버섯분류 권위자 혼고에게 보냈다. 이에 소요되는 일체의 비용을 지원해 주었다. 일본에서 국제적인 최신 분류체계를 익힐 수 있었고 전자현미경으로 버섯 미세구조를 조사하고 그것을 분류체계에 반영하는 기법을 터득했다. 이후 장기간에 걸쳐 전국 곳곳에서 야생 버섯 조사연구를 실시하고 그 형태, 분포, 생태 등을 상세히 기록하는 작업을 벌였다. 그에 힘입어 김양섭과 공동으로 1990년에 버섯도감을 출간했고 “우리나라 버섯연구 원전”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책은 형태적 특징을 기반으로 하는 당시 버섯 분류체계를 미세구조까지 고려하여 최고 수준으로 올려놓았다. 이 책은 학문적 측면만이 아니라 실용적 측면도 고려하여 식용 버섯에 중점을 두었고 실제 식용여부를 일일이 밝혔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그의 과학연구는 크게 달라졌다. 사회에서 필요하다고 여긴 응용연구에 치중했다. 미생물과 균류는 학문적 대상으로서보다는 인간생활에 유익한 과학적 수단으로 여겨졌다. 그는 연구실에만 머무르지 않고 자주 필드로 나갔고 여러 연구자들과 협력하며 공동연구를 수행했다. 서로 다른 기관에 종사하는 연구자들과 합심해서는 새로운 과학단체를 만들고 그 빠른 정착을 위해 전면에 나서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과학연구에 많은 시간을 지속적으로 기울였지만 연구논문을 해외의 유명 과학저널에 발표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이처럼 그는 국가와 국민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도록 과학의 지역성을 추구한 ‘실천적 과학자’로 변신했다.

과학자는 흔히 연구성과의 수준으로 주되게 평가받는다. 논문이 세계적 과학저널에 발표되었거나 노벨상을 받을 획기성을 지녔다면 그것은 최고의 성취로 여겨진다. 20세기 이래 과학자의 중심 가치는 우수한 연구성과를 발표하는 것에 있다. 그러나 김삼순의 예에서 보듯 과학연구는 세계적으로 주목을 끌지 못하더라도 국가나 지역 차원에서 특별한 가치를 지닐 수 있다. 과학의 국가적 수준이 낮을수록 그 필요는 더 커진다. 김삼순은 과학연구의 글로벌 가치와 더불어 지역적 가치도 열성적으로 추구한 보기 드문 과학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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