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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결국 사람들의 이어짐이다. 까마득한 과거 같지만 그것이 기록이든 혈연이든 흔적이든 불현듯 우리 앞에 나타날 때 과거와의 거리는 순식간에 줄어들고 문자와 증거로 남은 건조한 역사가 아니라 오늘과 이어지는 어제로 그 숨소리가 닿을 듯 다가서는 것이다. 

 

이를테면 어렸을 때 내가 교과서에서 배웠던 폴란드 출신의 화학자 퀴리 부인의 어린 시절 묘사는 그 딸 에브 퀴리의 작품을 발췌한 것이다. 퀴리 부인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를 살았던 사람이다. 그 딸 에브 퀴리도 일종의 역사 속 이름이었지만 그녀가 2007년 10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 퀴리 부인은 위인전 속 사람에서 에브 퀴리의 엄마로 살갑게 되살아났던 것이다. 

 

에브 퀴리와 나는 수십 년을 같이 살았던 것이 아닌가. 한국 현대사의 풍운아 박헌영의 마지막 혈육인 원경 스님, 박병삼이 2021년 12월 6일 입적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느낀 감회도 비슷했다. 

 

박헌영이란 이름의 역사

 

박헌영(1900~1956)의 이름은 이미 역사다. 김일성과 띠동갑이었던 그는 해방 때까지 전향을 거부하고 지하 활동을 통해 일제와 투쟁한 불굴의 항일 투사이자 공산주의자였다. 해방 직후 ‘박헌영 선생 나와서 우리를 지도하시라’라는 호소가 나올 만큼 그 역량과 지도력을 인정받았던 혁명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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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당시의 박헌영

(출처 - <위키피디아>) 

 

미군정에서 체포령이 내린 후 월북한 뒤에는 스탈린 앞에 가서 ‘남조선 해방’이 가능하다고 종주먹을 쥐었던 사람이다. 그 때문에 남한에서는 전쟁의 원흉으로 낙인찍혔다. 북한에서는 ‘미제의 간첩’으로 숙청됐다. 먼 훗날 남한의 주사파들이 ‘간첩 박헌영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되뇌는 별 근거 없는 경전 속 악역이 됐다. 

 

그는 누군가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그 누군가는, 주세죽과의 불꽃 같은 러브 스토리와 더불어, 그렇게 죽고 못 살던 아내가 절친한 친구와 바람이 나는 (박헌영이 죽은 걸로 알았다고는 하지만) 상황까지 경험했던 박헌영이, 출옥 후 몸을 추스르며 만났던 여인 (생판 뭘 모르는 사람은 아니고 사회주의 계열의 맹장이던 정태식의 5촌 조카) 사이에서 태어난 이다. 속세의 이름보다는 원경 스님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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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경 스님

(출처 - <한겨레>) 

 
故 원경 스님의 역사

박헌영은 월북 후 또 결혼해서 아들과 딸을 낳았지만 박헌영 숙청 와중에 그 둘은 생사도 모르게 돼 버렸다. 주세죽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박 비비아나는 소련 사람으로 살다 죽었으니 원경 스님은 글자 그대로 박헌영의 마지막 직계 자손이었다. 해방 공간의 쟁쟁한 공산주의자들, 이주하, 김삼룡, 이현상, 등에게 그는 대단한 귀염둥이였다. 원경 스님 역시 그를 생생히 기억한다. 

 

빨치산들과 함께 살기도 했던 그는 남부군 총수 이현상의 명령에 따라 하산하게 된다. 1941년생이니 전쟁통이라면 열 살 남짓의 나이. 그를 두고 이현상이 한 말은 사뭇 울림이 있다.

 

“저 아이는 저 아이만의 세상이 따로 있다. 내려보내라.” 

 

이현상이 보기에도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걸출한 혁명가의 열 살 난 아들이 민가에서 된장 국물을 받아 빨치산들에게 전하며, 언제 죽을지 모를 산속에서 발발 떨면서 오그라드는 모습이 말이다. 문득 궁금해지기도 한다. 박헌영이 처형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기까지 빨치산 틈에 꼬마 원경 스님이 살아 있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하산했지만 남에서는 적대시되고 북에서는 버림받은 사람의 아들이 살아남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불가에 귀의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으리라. 그를 불가에 이끈 사람은 박헌영과 김삼룡, 이주하 등과의 연락을 맡았던 남로당 연락책 한산 스님이었다.

 

그런데 이 한산 스님이라는 사람의 속명은 김제술. 박헌영의 배다른 누이의 아들이었다. 즉 사촌 간이었다. 이 김제술은 1968년께 갑자기 사라지는데 모르긴 해도 그때까지도 모종의 조직에 가담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김제술의 동생이 해방 공간 유명한 ‘기생 간첩’ 김소산이었다). 

 

원경 스님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알려 준 것도 한산 스님이었다. 네 아버지가 미제 간첩 혐의를 뒤집어쓰고 김일성에게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젊은 날의, 원경 스님의 눈 역시 돌아간다. 그는 해병대 특수부대에 자원입대했다. 김일성 목을 따 오고 싶었던 것이다. 그 지옥 훈련 과정을 견뎌내고 이후로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원경 스님은 당대 최고의 무예 고수 중 하나가 됐다. 

 

이후 그 출신 성분(?)이 알려지면서 중앙정보부의 감시를 받기도 했고 스님들 사이에서도 그 출신을 빌미로 협박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지만 역시 불가 스님의 신분은 그를 지켜 주었다. 여러 절의 주지까지 지내면서 그는 아버지 박헌영 전집을 출판하며 조금이나마 아버지의 한을 풀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또 한 번 가슴이 뭉클해진다. 

 

“아버지라는 분이 세상에 와서 남쪽에서도 버림을 받았고, 북쪽에서도 버림을 받았고··· 물론 그 투쟁방법이 잘못됐을지는 모르겠고 깊이 말 못하기도 하겠지만··· 사람들이 환갑도 하고 뭣도 하고 하는데, 그래도 세상에 오신 지가 100년이 되는데. 이런 분이 세상에 왔다 갔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요··· 이 나라를 망쳤다는 사람이라고 비판을 하던 간에. 또 북쪽에서 말하는 미제의 스파이라고 하던 간에. 나는 자식된 도리로서 내가 자료를 모아서 훗날에 학자들이, 이 분야에 공부할 수 있는 분들이, 좀 쉽게 할 수 있으면 좋은 것이지.” 

 

그렇게 그는 박헌영 전집을 발간했다. 그의 말처럼 남북으로부터 욕을 먹지만 어쨌던 시대의 한 획을 그었고, 오류는 많았으되 비겁하지는 않았고, 스스로 꺾이지 않았지만 모두로부터 짓밟혀야 했던 한 혁명가의 일생은 아들에 의해 그 윤곽을 다잡을 수 있었다.

 

더하여 원경 스님은 민주화운동의 숨은 물주였다. 데모 자금을 마련하거나 도피할 돈이 궁했던 운동권들이 즐겨 찾았던 것이 원경 스님이었다. 원경 스님은 통 크게 시주함을 터는데 익숙했다고 한다. 역사문제연구소가 설립됐을 때 그 물질적 배후였고 고 박원순 서울 시장은 그곳의 초대 이사장이었다. 

 

박헌영은 남과 북 모두에 저주받고 버려졌다. 그런데 박헌영을 쫓아낸 남이나 박헌영을 버린 북이나 그렇게 정상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박헌영의 존재는 남과 북이 기억하기 싫지만 기억해야 하고, 감안하기 쉽지 않지만 감안해야 하는 교집합의 영역도 포함하고 있지 않을까. 

 

고 한산스님 사진.jpg

(출처 - <조계종>) 

 

전쟁의 원흉과 미제의 간첩이라는 어마어마한 혐의 속에 그의 일생이 통째로 묻혀 버리는 것이 과연 정당한 일일까. 그 모든 의구심을 뒤로 하고 지난 12월 6일, 원경 스님은 세상을 떠났다. 나와 함께 수십 년 호흡하던, 작지만 큰 역사 하나가 사라진다.

 

고 원경 스님의 명복을 빈다. 

 

추신: 나도 유투브란 것에 도전하고 있다...! 혼자 다 하려니 좀 허접하지만 뭐 이러면서 경험을 쌓아가는 거 아니겠나. 심심한 분들, 놀러오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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