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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세로 1억 원이 꽂혔다. 정확히는 세금 3.3%을 뗀 9670만 원. 일시는 2020년 3월 16일 4시 14분. 이런 숫자는 살면서 본 적이 없었다. 손가락으로 동그라미 개수를 하나씩 세어 보았다. 다섯 개. 그다음 아라비아 숫자를 세어 보았다. 8개. 마지막으로 소리를 내어 읽어 보았다. 구천 육백 칠십 만 원. 그게 내 통장에 꽂혀 있었다. 그리고 4일 후인 20일에 들어올 김전도사의 사례비는 80만 원이었다.

글 써서 밥 벌어먹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있지만, 이 정도의 일시불은 상상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글 팔아 반찬값이라도 벌어 보겠다는 사람 중에 유명 작가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를 읽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테니, 그가 이런 거금의 선인세를 받은 날에 무엇이라 썼는지 아는 분도 많을 것이다.

킹은 1974년 <캐리>로 약 20만 달러의 선인세를 받았다. 오늘날로 환산하면 3억 원 정도 되는 돈이다. 킹은 그 전화를 받고 주저앉아, 초라한 집을 보며 울었다. 그는 세탁소에서 일하며 두 아이를 키우느라 고생하는 아내를 위해 굉장한 선물을 사 주고 싶었다. 몸을 떨며 집을 나섰으나, 토요일에 열려 있던 곳은 오직 라버디어 약국뿐이었다. 킹은 헤어드라이어를 사 들고 아기 짐을 정리하는 아내에게 주었다. 아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걸 왜 주는 거냐고 물었다. 킹이 기쁜 소식을 전하자, 그녀는 초라한 집을 보며 울었다. 방금 킹이 그랬던 것처럼.

자, 나는 어떻게 했을까? 나는 울지 않았다. 심지어 아내도 없었다. 그래서 아내 얼굴 대신에 뉴스를 보았다. 그때는 코로나가 막 번져 가는 시점이었다. 주식은 대폭락하고 있었고 마스크 회사 주식은 미친 듯이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모두가 주식을 팔아 대자, 미국 금융 당국이 주식거래를 중지시켰다. 공포의 아수라장이 있다면 이런 곳 아니겠는가. 만민이 겁에 질려 달러를, 오직 달러를 구하기 위해 모든 재산을 팔며 발버둥치고 있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내 주머니에는 1억 원이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아내가 없었다. 그래, 아내라도 있었다면 헤어드라이어라도 샀을 것을. 나는 아내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주식을 사기로 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크리스천. 8년째 전도사. 일주일에 화, 수, 금, 일을 설교하는 내가 주식을 사도 되는 것일까? 독주에 취한 사람들이 눈이 시뻘겋게 변한 채 '언제나 내가 깰꼬 또 술을 찾아야지' 하는 바로 그 광기의 폭풍에 나 자신을 내던져도 되는 것일까? 교사나 동료 전도사들이 "요새 뭐 하세요?" 하면 "아, 주식해요. 하나 사시죠"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오르락내리락하는 그래프 속에서 더 큰 이익을 쫓기 위해 내 신념을 버려도 되는 것일까?

그러나 나는 돈이 필요했다. 집도 사고 싶었고, 안정적인 가정도 갖고 싶었고, 파이어족도 되고 싶었다. 그리고 사역하면서 외풍에 휩쓸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샀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샀다. 나는 이게 윤리적인지, 올바른 일인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더 나은 이익을, 내 안전을, 내 행복을 생각하기로 했다. 그랬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미국 주식을 사면 시간대가 달라 잠을 편히 잘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숫자가 오르내리는 것이 내 영혼을 밤마다 두들겨 패 깨웠다. 야밤에 홍두깨로 맞는다는 게 이런 것인지 모른다. 잠을 자지 못하자 견딜 수가 없었다. 신경쇠약이 왔다. 머리가 어지러웠고 호흡이 가빴으며 심장이 이유 없이 뛰었고 길을 걷다가도 멍하니 핸드폰을 열어 주식 창을 보게 되었다. 예배 도중에도, 산책 중에도, 밥을 먹는 도중에도, 심지어는 치킨을 시켜 놓고서도 주식 창을 보았다. 나는 독주에 취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쯤 되자 내 안에 있는 존 칼빈 선생의 정신이 미국 주식 그래프의 빛으로 속삭이셨다.

"이 미친놈아."

이 미천한 칼빈주의자가 무엇이라 대답하리요?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 책을 읽자. 내 비록 <기독교 강요>는 요약본으로 보았으나, 아브라함 카이퍼의 전기를 본 사람이다. 그가 '인간 존재의 전 영역 중에 만물의 주권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내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영역은 단 한 치도 없다'고 하지 않았나? 내가 불안하고 힘든 이유는, 이 주식이라는 영역이 내 안에서 그리스도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문주의자 칼빈 선생님은 이 정도면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맙소사. 한 달을 밤잠을 안 자서 자아가 죽으니 성령님이 이처럼 일하시는 것이 보였다. 이래서 금식하고 철야 기도를 하는 것이 분명하다. 독자 여러분도 주식하다 안 되면 철야를 하십시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주식시장이 하나님의 것이 된다는 말인가?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 하셨는데, 주식을 사는 일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 떨어지면 사고, 오르면 팔고, 사고팔며 부자 되는게 하나님의 영역이 될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고 싶었다. 그런데 웬걸, 이런 고민은 나 혼자만 했던 게 아니었다. 나는 주식의 고전을 찾고 읽으면서 모든 사람이 비슷한 얘기를 하는 것을 발견했다. 읽은 책을 다 나열할 수는 없지만, 다음 책들이 중요했다.

워렌 버핏 유파의 <현명한 투자자>·<워렌 버핏 바이블>·<워렌 버핏 라이브>·<워렌 버핏의 위대한 동업자 찰리 멍거>·<현명한 투자자의 인문학>, 템플턴상을 제정한 존 템플턴 경의 <템플턴 플랜>, 블랙 스완으로 유명한 나심 탈레브의 <안티프래질>·<스킨 인 더 게임>, ETF 개발자 존 보글류의 <모든 주식을 소유하라>혹은 <할 수 있다! 퀀트 투자>, 그리고 파이어족의 시초가 된 <돈 사용 설명서>. 그 외도 수십 권이 넘는 책과 강연, 그리고 심지어는 로마가톨릭 주교회의의 <모든 사람을 위한 경제 정의>와 <목회자의 돈 심포지움> 같은 것도 읽었다.

물론 내가 이만큼 책을 읽었다고 과시하면서 독자 여러분을 괴롭힐 생각은 없다. 그리고 이곳이 기독교 신문사라는 것을 잊고 싶지도 않다. 이 책을 읽고 투자를 한 덕분에 수익율이 100%를 넘었다는 말도 하고 싶지 않다. 이미 했네? 하지만 코로나 시절에는 이런 일이 아주 쉬웠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 나는 이 모든 책을 읽으면서 너무나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이 사람들이 하는 얘기, 다 칼빈주의 안에 있는 얘기잖아?'

잠깐만, 무슨 소리냐고? 이 꼴통 보수 칼빈주의자가 '손에 망치가 들려 있으니 모든 것을 못으로 보자'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실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확신을 다해 말할 수 있다. "주식을 사는 것, 그것도 제대로 사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라고. 그리고 왜냐는 질문에는 "하나님은 제도로 세상을 기경하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할 것이다. 그렇다. 윌터스토프 형님이 성경에서 인용해 쓰셨듯이 "바른 제도는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추게" 하는 법이다. 문제는 제도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우리다.

우리 인간은 망가졌다. 그것도 아주 처참하게 망가졌다. 우리는 오직 단 한가지 재능에만 어느 피조물도 따라올 수 없는 전문성을 보유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공유지를 비극으로 만드는 능력'이다. 이럴 수가. 일반 은총, 그러니까 하나님이 악을 막고 최소한의 선이 자라나도록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이미 멸망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일반은총으로 주신 것이 무엇인가? 바로 '제도'다. 국가, 자본주의, 법, 행정 제도 등등. 갑자기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냐고? 주식과 주식시장도 바로 일반 은총으로 주신 '제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창조 세계를 다스리라고 하셨을 때(창 1:28)의 '지배'는 '기경하라'는 명령이었다. 다시 말해, 땅 갈고 씨 뿌리는 농사를 하라는 말씀이셨다. 자, 놀라운 말씀을 드려 보겠다. 팥을 심었는데 팥이 나왔다! 이게 지금이야 당연하지만 처음 그 사실을 발견했을 때는 정말 기적 그 자체였다. 선물 보따리였다. "이제 농사를 지을 수 있다!" 이게 바로 '개현'이다.

개현, 하나님은 창조 세계 안에 이미 있는 것들을 적절한 방법으로 다루면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게 하셨다. 비록 우리가 타락해서 에덴 동편에 살지만, 여전히 하나님이 처음에 우리에게 주시고자 했던 행복의 일부나마 누릴 수 있게 제도로 허락하신 것이다. 그뿐인가? 우리가 이 제도로 정의를 이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면, 그 제도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다. 앞서 말했듯, 우리는 늘 공유지를 비극으로 만드는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다. 종교라는 제도가 생기자 인신 공양이 나타났다. 나라라는 제도가 생기자 황제만이 신의 형상이라 자처하며 인간을 노예로 만들었다. 법이라는 제도는 강자의 횡포를 옹호했다. 논밭의 소유권이라는 제도가 생기자 소수가 그것을 독점했다. 인간이 타락했으니, 기껏 만들어 놓은 제도로 세상을 기경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는커녕 인간을 영화롭게 하는 데 쓰였다.

그런데 '십자가'가 도래했다. 모든 것이 전복되었다.

십자가로 만민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더 이상 황제만이 신의 형상이 아니게 되었다. 집단 학살과 인신 공양의 제도도 끝장났다. 어떤 권력자나 광기에 미친 대중도 이제 그리스도 외에 다른 희생양을 둘 수 없게 되었다. 법은 강자의 횡포가 아니라 만민 제사장에 기초한 민주주의적 합의에 의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경제적 권리에도 모든 사람을 위한 몫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렇다. 하버마스가 말한 것처럼 "양심, 인권, 민주주의는 기독교의 유산"이었다. 십자가는 사람을 성화시키듯 제도도 씻어 주었다. 세상을 통째로 전복시킨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 때문에 우리의 현실 정치에도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지 않았던가? 누가 뭐래도 십자가로 말미암은 민주주의가 우리에게 있다. 성인이라면 모두 한 표씩 비밀리에 직접 투표할 수 있다.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 와도, 다시 말해 현실 정치가 우리에게 어떤 희망을 줄 수 없는 경우에도 우리는 투표할 수 있다. "최악의 민주정이 최선의 귀족정보다 낫다"는 토크빌의 말이 이제 현실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투표할 권리를 행사하여 한 걸음씩 전진해 나가, 마침내 그 말이 옳음을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주식은? 주식은 십자가로 성화될 수 있는가? 이를 위해서는 주식이 뭔지를 알아야 한다. 주식은 그저 '회사의 소유권 중 일부'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회사'라는 것의 '소유권 일부'를 사고파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저렴한 한 주라도, 그 한 주를 소유하는 것은 한 회사의 작은 일부를 갖는 것이다. 그래서 워렌 버핏은 주식 매수를 "농장의 일부를 사는 것"에 비유했다.

만민이 제사장이 된 후에야 민주주의가 일어나고, 모두가 법과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소유한 것처럼, 경제 정의를 구현하는 일에도 우리 모두가 참여할 길이 자본주의 주식시장을 통해 열린 것이다. 우리가 투표로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것처럼, 자본시장에 참여함으로 절망적인 자본주의를 성화시킬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그리스도인조차도 주식시장을 돈벌이 수단으로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여기 두 회사가 있다. 한 회사는 아마존 밀림을 그냥 밀어 버리고 원주민도 쫓아낸다. 다른 한 회사는 시간을 들여서 그들을 설득하고 동의를 받고 원주민을 고용하여 안전한 일자리를 준다.

누가 더 빨리 돈을 벌까? 당연히 전자다. 그런 회사에 투자했을 때 돌아올 이익은 황홀하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더 많은 돈이 몰린다. 그렇다고 우리가 다 이 회사의 주식만 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세상에는 그런 회사들만 남게 될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내가 그 회사의 주주라면 곧 그 회사의 소유자들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하나님이 그 원주민들의 피값을 찾으시는 날에 내 손을 어찌 숨기겠는가? 차라리 자르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러면 주식을 사지 않으면 그만이지 않겠느냐고? 그럴 수도 없다. 세 가지 이유가 있다. (1) 오늘 우리는 근로소득만으로는 노후를 보장할 수 없는 저성장 시대에 살고 있다. (2) 우리가 선한 기업을 사지 않으면 세상에 선한 기업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3) 좋은 기업에 투자하면 세상이 더 좋아진다. 이처럼 내가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선을 선택하는 것이라면, 적은 수익을 내더라도 선한 회사 주식을 사는 것이 낫지 않을까?

이런 선택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된다.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선한 회사의 주식만을 골라 구매할 수 있는 길은 이미 우리에게 환히 열려 있다. 예를 들어 보면 미국은 물론이고 놀랍게도 우리나라 회사도 가톨릭 윤리관에 맞는 회사만을 사들이는 CATH 같은 ETF를 운용하고 있다. ETF가 무엇인가? 이를테면 회사 100개를 담은 장바구니의 일부를 내가 사는 상품이다. 내가 ETF 한 주를 사면 그 회사 100개를 아주 작은 양이지만 갖게 되는 것이다.

다시 돌아가서, 어느새 우리나라 회사도 CATH 같은 상품을 운용하고 있다. 낙태, 도박, 음란물, 무기 제조 같은 일로 돈을 버는 회사에게는 투자하지 않고, 윤리적이고 선한 일을 하는 기업들에게만 투자한다. 당연히 막가파식으로 돈만 쫓는 회사, 배당을 많이 주지만 사람을 망치는 담배 회사나 폭력적으로 밀림을 밀어내는 석유 회사 같은 곳에는 투자하지 않는다. 물론 수익은 적을 수 있지만 평균 수준의 수익은 얻을 수 있다. 무엇보다, 여기에는 십자가와 하나님의 평화가 있다.

우리가 돈 욕심대로 투자하면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다. 망하면 어쩐담? 벌받으면 어쩐담? 오늘 밤에 내 생명을 가져가시면 어떤담? 하지만 예수님의 피로 씻긴, 선한 양심으로 투자하면 무서워할 게 없다. 망하면 망하는 대로 하나님이 다른 곳에서 채워 주시지 않겠는가? 오직 선한 투자로 수익을 얻고, 그 투자를 받은 회사는 다시 선한 제도로 세상을 기경하고, 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은 우리를 즐거워하신다면 이게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 될까? 오늘날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너는 그것을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레 23:22)라는 말씀을 따른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너무 많은 수익을 내기 위해 투자하지 말자. 선을 이루기 위해 제도의 주인이 되자. 우리는 이러한 회사들을 골라내어 그들의 주식을 소유함으로써, 선한 회사의 소유자가 되고, 선한 일을 장려할 수 있으며, 선한 기업의 '분깃'을 나누어 얻을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실 것이다. 그거면 되지 않겠는가? 어차피 우리를 먹이고 구원하실 분은 우리 아버지시니까 말이다.

그러니 주식 사는 것 자체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수익만을 쫓아 단타를 하거나 악한 기업 주식을 사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자. 대신 우리가 하는 선한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길이 열려 있다는 것을 기뻐하고 자랑하자.

그러니까, 여러분 모두 주식을 사도 된다. 자본시장에 참여하셔도 된다. 쌈짓돈을 모아 투자하셔도 된다. 대신 사기 전마다 템플턴상을 제정하고 20세기 최고의 투자자로 불린 존 템플턴 경처럼 지혜를 구하자. 그분은 이렇게 기도하셨다고 하셨다. "저는 일평생 구매할 주식이 오르기를 위해 기도하지 않았고, 오직 바른 지혜를 주시기만을 기도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차례다. 자본시장도 마침내 주님의 것이 될 것이다.

김전도사 / 아직도 졸업 하나 못 해 9년째 전도사. 어쩌다 보니 웹 소설 쓰면서 밥 벌어먹다가도,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 사색하는 게 취미이자 직업인 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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