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는 기억이다. 장소가 사라지면 기억도 사라진다. 개발과 성장 이데올로기는 제주의 모습을 빠르게 지워하고 있다. 제주투데이는 계간 <제주작가> 2021년 가을호가 마련한 '잊혀진 장소의 정치학' 특집 기사를 편집진의 양해를 얻어 전재한다. 이 글들이 제주의 장소를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편집자 주>

제주의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다른 지역과 제주의 물리적 거리는 그대로이지만 왕래가 늘어나면서 심리적 거리는 여러모로 많이 줄어든 것 같다. 사람들은 제주 곳곳에서 자신만의 특별한 추억을 남기고 간다. 많은 사람들이 제주를 찾으면서 제주의 모습도 많이 변하고 있다. 조금 더 빠르게 조금 더 편하게 제주를 보여주기 위해 도로를 넓히고, 그럴듯한 건물을 짓는다. 좋은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사람의 손길이 닿아있다. 그럴수록 제주 사람들이 기억을 쌓아온 장소들은 오히려 빠르게 변하고 있다.

오랫동안 제주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원도심은 역사문화적으로 다양한 기억을 품고 있다. 특히 곳곳에 아직 남아있는 오래된 건물들은 축적된 시간만큼이나 많은 이들의 추억의 장소로 회자된다. 그러나 원도심도 변화의 바람을 피하지 못하고 있다. 장소의 가치를 고려하지 않는 상황들로 인해 기억의 한 페이지들이 삭제되고 있다. 기억을 상실한 장소. 그것은 문화의 단절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원도심에서 잃어버린 기억의 장소들을 되짚어 보려 한다.

누군가에게는 조일구락부로, 누군가에게는 제주극장으로, 또 다른 이에게는 현대극장으로 기억되는 건물이 있었다. 이 건물은 2017년 안전진단에서 최하위 등급인 E등급을 받았다. 붕괴위험 때문에 건물을 철거하거나 보강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건물주는 철거를 선택했다. 2018년의 마지막 날 육중한 중장비가 옛 극장 건물을 철거하기 시작했다. 수십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을 웃고 울렸던 추억의 공간은 그렇게 한낱 폐기물로 사라져갔다. 옛 현대극장 건물의 철거는 원도심의 기억의 장소가 허망하게 사라지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사실 내가 이 건물과 뭔가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것은 아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아마도 20여 년쯤 고등학교 시절이었던 것 같다. 화교 소학교 옆에 살았던 나는 이른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며 등교할 때마다 이 건물 앞을 지나야 했다. 그때는 이미 극장으로서의 운명이 다하고 잡화점이 들어서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건물만큼은 인상 깊었다. 다른 건물들과 달리 외형부터 특이했기 때문이다. 내 눈길을 끌었던 것은 건물 밖에서 2층까지 이어진 계단이었다. 이끼가 잔뜩 끼어있는 그 계단을 보며 2층에 사는 사람들은 저 계단으로 오르락내리락할까 하는 터무니없는 궁금증을 가졌었다.

철거 전 옛 현대극장 건물 모습
철거 전 옛 현대극장 건물 모습

그 후 문화예술계 선배들을 만날 때 간간이 극장에 대한 추억을 들을 수 있었다. 극장에서 첫 번째 본 영화가 무엇이었다는 둥, 만화영화를 봤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는 둥 하는 이야기들을 들으며 내가 영화관에서 처음 본 영화를 떠올리기도 했다.(내가 처음 영화를 본 곳은 피카디리 극장이었다.) 건물이 철거되기 1년 전쯤 원도심에 오랫동안 거주했던 분들을 대상으로 인터뷰 책자를 만들 기회가 있었다. 내가 담당한 분은 원도심에서 태어나 노년까지 거주했던 분이셨다. 그때 원도심의 중요한 곳들을 함께 돌아다니며 여러 이야기를 들었는데 극장에 대한 에피소드도 빠지지 않았다. 어린 시절 제주극장 화장실로 몰래 숨어서 들어가 영화를 봤다는 추억을 이야기하면서 미소 짓던 모습이 천진난만했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분들에게는 허름한 이 건물이 순수했던 과거로 데려다주는 타임머신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건물이 철거된다고 했을 때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했다. 영화를 상영했던 극장이다 보니 제주 출신 영화인들은 자신들이 꿈을 키웠던 정신적 뿌리와 같은 장소가 사라진다는 것에 아쉬움을 표했다. 건축가들은 건축사적인 측면에서 의미 있는 건물이기에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밖에도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철거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건물의 철거를 안타까워한 것은 그 장소에 대한 소소한 기억들이 쌓여 공동체에 특별한 의미를 주는 공간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면 많은 이들이 이렇게까지 철거 반대에 목소리를 높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과연 그곳에서는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다행히 1940년대 발행되었던 「제주신보(濟州新報)」가 전하고 있어 기사 속 극장의 내용을 살펴볼 수 있었다. 1947년 10월에는 국립경찰청창립 2주년을 기념하여 영화 「자유만세」(감독 최인규)를 무료로 상영했다. 「자유만세」는 독립운동가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는 영화인데, 해방 이후 처음으로 제작된 영화로 우리나라 영화사에서 매우 중요한 작품이라고 한다. 1948년 2월에는 독립운동가 윤봉길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의사 윤봉길」(감독 윤봉춘)이 상영되기도 했다. 영화 상영뿐만 아니라 다른 문화예술 행사들도 이곳에서 열렸다. 1947년 11월에는 서울가극단의 공연이 있었으며, 1947년 12월에는 대동청년단에서 주최하는 음악회가 개최되기도 했고, 감찰청 주최로 학생웅변대회도 이곳에서 열렸다. 그리고 스포츠 경기가 열리기도 했는데, 1947년 10월에 제주의 고창기 대 광주 설요한, 광주의 박영삼 대 목포의 김영균의 권투시합이 제주극장에서 열렸다. 이름은 극장이었지만 제주의 문화예술 행사들이 다양하게 열렸던 종합문화공간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치적 성격의 행사들도 이곳에서 열렸다. 1947년 1월 도민청결성식과 1947년 2월 제주읍 조선민주청년동맹대회,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식, 제주읍 대한민주청년동맹 대회, 제주읍 부녀회 정기대회, 1947년 10월 제주도 독립촉성국민대회, 대동청년단 제주도지부단 결성식, 이북인대회 결성식, 1947년 11월 서북청년회 제주도본부 결성식, 1947년 12월 민족청년단학생과 총회, 1957년 12월에 청소년반공단결성식 등 해방 이후 제주도의 좌익과 우익 단체들이 출범 장소였으며, 여러 단체의 기념행사들이 열렸던 장소이기도 했다.

 

  道民靑結成式 十二日朝一俱樂部서(도민청결성식 12일 조일구락부서)

  祖國再建의 重責을 雙肩에 질머진 本道의 愛國靑年들이 民主路線에서 靑年運動으로 建國에 이바지하고저하는 熱烈한 趣旨下에 本道民靑結成大會를 이미 準備中이였든바 드듸여 來十二日午前十時에 邑內朝一俱樂部에서 道民靑結成大會를 開催하기로 되였다한다

 西靑濟州道本部結成 委員長에 張東春氏(서청제주도본부결성 위원장에 장동춘씨)

  지난 二日 濟州劇場에서 西北鮮出身인 靑年들이 모여 相互의 親睦을 圖謀함과 同時에 團結의 힘으로써 自主獨立을 찾자고 西北靑年會濟州道本部結成大會가 盛大히 擧行되였는데 同日當選된 役員은 如左하다

  委員長 張 東 春氏 副委員長 朴炳俊氏 外 役員十名

- 제주신보 1947년 11월 8일 기사

이 단체 중에는 훗날 4‧3과 밀접하게 관련된 곳도 있다. 민주주의민족전선은 4.3의 시발점이 되는 1947년 3‧1절 기념행사를 담당하고 이후의 기도 했으며, 악명을 떨친 서북청년단의 제주도본부가 출범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니 옛 제주극장은 4‧3유적지로서 제주 근대 역사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렇기에 역사학자들도 제주 역사의 격변기의 현장으로서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옛 현대극장 건물은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 이런 기억들은 사진으로 남아있는 극장의 모습을 보면서, 인터넷 포털 지도 사이트의 과거 로드뷰를 통해서나 떠올릴 수 있을 뿐이다.

물론 건물의 존치를 위한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제주시에서는 건물을 매입하기 위해 예산을 확보하고 문화예술 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었고, 민간단체에서도 건물의 매입을 타진했지만, 결론적으로는 여러 조건이 맞지 않아 성사되지 못했다. 사람들이 건물 철거에 안타까워하고 있을 때 그 현장에서 소중한 기억을 건져 올린 이도 있다. 미국 사진가 키프 카니아는 철거현장에서 오래된 필름과 영사기 부품, 입장권, 관람권 등을 찾아서 전시회를 열었다. 그때 발견한 영화필름은 ‘대한뉴스’와 ‘나라 읽은 사람들’이라는 다큐멘터리, 그리고 애국가 영상이었다고 한다. 극장의 역사로서 남은 유물은 그것들뿐이다.

2021년 그곳을 다시 찾아가 봤다. 건물이 있던 자리는 아직 빈 공터로 남아있었고, 정식 주차장은 아니었지만, 주차공간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건물이 있던 모습과 겹치면서 왠지 그 장소가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처럼 느껴졌다. 기억을 찾으면 다시 옛 모습의 건물이 다시 나타날 것처럼 말이다. 이제 그 공터는 무엇으로 채워질까. 공터 뒤로 높게 솟은 오피스텔이 한눈에 들어왔다.

철거 후 옛 현대극장 터
철거 후 옛 현대극장 터

옛 현대극장이 철거되기 6년 전 이와 똑같은 일이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관덕정 서쪽에는 옛 제주시청 건물이 있었다. 1959년에 제주읍이 제주시로 승격되면서 들어선 시청 건물이다. 이 건물도 초창기 제주 근대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건물이라고 한다. 1980년까지 운영되다 제주시청이 현재 위치로 옮겨가면서 민간에 매각되었다. 그리고 2012년 12월 건물의 철거가 시작되었다. 이 당시에도 건물의 역사성을 고려할 때 보존해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근현대의 원도심의 장소성을 잘 보여주는 건물이기 때문이다. ‘2011년 제주목관아 보존·관리 및 활용계획’에서도 공공성을 고려하여 역사기념관으로의 활용을 제안했다고 한다. 제주목관아와 관덕정이 조선시대 제주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라면, 옛 제주시청사는 근대 제주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면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원도심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인프라를 갖출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역시 실현되지 못했다.

당시 이와 관련한 기사 내용을 보면 건물 철거에 따른 비판이 제기되자 제주시에서는 사유지이기 때문에 시에서 매입할 근거가 없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 그런데 불과 7개월 후에 이 땅을 제주시가 매입한다. 어떻게 된 일일까. 건물은 사라졌지만 옛 제주시청사의 가치를 인정하고 복원이라도 하려고 하는 것이었을까. 아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얼마 뒤 그곳은 관광버스 주차장으로 변했다. 사유재산이어서 손 쓸 방법이 없다던 것이 불과 몇 개월 만에 뒤바뀐 것이다. 역사성 있는 건물을 매입할 근거는 없지만, 주차장 조성을 위해 매입할 근거는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이제 제주시 소유가 되었으니 지금이라도 옛 제주시청사를 복원할 수는 없을까. 안타깝게도 그것마저 어려울 것 같다. 2017년 이 땅이 다시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이곳을 제주문학관 부지로 추진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런데 「주차장법」에 의하면 주차장 용지는 다른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주문학관 부지는 다른 곳으로 결정되었다. 그런데 2007년 법제처의 「주차장법」 제20조에 대한 법령해석 사례가 있다. 대전광역시의 노외주차장 설치에 필요한 토지의 처분제한 문의에 대한 답변이다. 이 답변에서는 제20조의 해석을 아래와 같이 하고 있다.

한편, 「국토의 계획 및 이용에 관한 법률」 제2조 및 동법 시행령 제2조에 의하면 노외주차장은 기반시설에 해당하고 동법 제43조에 의하여 노외주차장을 설치하는 때에는 도시계획시설로서 미리 도시관리계획으로 결정하도록 하고 있어 도시계획시설인 노외주차장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고자 하는 경우에도 도시관리계획을 변경하여야 할 것인데, 당초 도시관리계획에 의하여 노외주차장으로 지정된 토지라 하더라도 장차 도시의 발전양태에 따라 다른 목적의 토지로 충분히 그 용도가 변경될 수 있고, 도시관리계획의 변경에 있어서는 도시의 전반적인 교통수요가 고려될 것인 점을 고려할 때, 「주차장법」 제20조제1항은 이미 노외주차장으로 조성된 토지가 도시관리계획의 변경에 따라 다른 목적으로 매각되거나 양도되는 것까지 금지하려는 취지로 보기는 어렵다 할 것입니다. <정부입법지원센터, 법령해석례, 안건번호 06-0060, 회신일자 2007년 1월 22일>

위 해석으로 보면 이미 노외주차장으로 조성되어 있더라도 도시관리계획을 변경하면 다른 용도로 활용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문제는 「제주특별자치도설치및국제자유도시조성을위한특별법」이다. 제433조의2를 보면 다음과 같은 항목이 있다.

제433조의2(단지조성사업 등의 시행에 따라 설치하는 노외주차장의 관리에 관한 특례) ① 「주차장법」 제12조의3에 따라 설치한 노외주차장을 주차장 외의 목적으로 사용해서는 아니 된다.

제주특별법은 아예 주차장 이외의 목적으로 활용하면 안 된다고 못 박고 있다. 이 논리라면 앞으로 이 땅은 주차장 말고는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옛 제주시청사를 복원하는 것은 요원한 일이 아닌가. 이대로 영영 주차장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인지 법을 잘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의문이 든다.

옛 제주시청사 터
옛 제주시청사 터

흥미로운 사실은 비슷한 시기인 1952년에 세워진 현재 제주시청사 본관은 문화재청에서 2005년 4월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155호로 지정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행정에서는 이 건물이 근대문화유산이 되는 것을 환영했을까? 그렇지 않다. 당시 제주시는 정부청사 부지로 제주시청을 옮길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제주시청 부지를 매각할 생각이었다. 이 계획대로 되었다면 땅이 민간에 매각이 되었을 것이고, 오래된 건물은 당연히 철거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제주시청사 본관이 문화재로 지정되면 그 계획의 실행이 어려워진다. 그래서 제주시는 문화재 지정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문화재로의 가치보다는 행정적 편의를 더 우선시 여긴 것이다. 그런데 여러 이유로 청사 이주는 무산되었고, 그 건물은 여전히 제주시청사로 활용되고 있다.

관덕정 앞 돌하르방
관덕정 앞 돌하르방

원도심의 장소성 상실을 보여주는 사례는 관덕정을 지날 때마다 항상 볼 수 있는 돌하르방에서도 찾을 수 있다. 과거 제주의 대표적인 기념품하면 돌하르방을 떠올리던 시절이 있었다. 관광기념품 판매점마다 각종 돌하르방이 가득하던 기억이 난다. 요즘도 건물을 세우거나 하면 입구에 돌하르방을 세우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돌하르방도 원도심의 잃어버린 기억들 중에 하나이다. 우석목, 무석목, 벅수머리, 옹중석 등으로 불리던 돌하르방은 제주목에 24기, 대정현에 12기, 정의현 12기 총 48기가 있었다고 한다. 이 세 곳의 돌하르방의 모습이 조금씩 다른데 제주목의 돌하르방은 다른 곳보다 키가 크다. 평균 180cm가 넘는다고 한다. 머리에 감투를 쓰고, 얼굴이 길쭉하며, 눈이 튀어나온 형태이다. 우리가 돌하르방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제주목의 돌하르방에 해당한다.

제주목관아 내 돌하르방
제주목관아 내 돌하르방

돌하르방은 원래 성문 밖에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김석익의 ‘탐라기년’에는 “영조 30년(1754년) 목사 김몽규가 옹중석(翁仲石)을 성문 밖에 세웠다”는 내용이 전한다. 제주성에는 동문과 서문, 남문이 있고, 각 성문마다 8기씩 24개의 돌하르방이 세워져 있었을 텐데 원도심의 돌하르방 중에 지금 제 위치에 세워져 있는 것은 단 한기도 없다. 제주성의 성문이 사라지면서 그곳을 지키던 돌하르방도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그 많은 돌하르방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나마 원도심에라도 남아있는 돌하르방은 관덕정 정면에 2기 뒤편에 2기, 제주목관아 내부에 2기까지 해서 6기뿐이다. 나머지는 제주대학교에 4기, 삼성혈에 4기,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에 2기, 제주시청에 2기, KBS제주 방송국에 2기, 제주돌문화공원에 1기가 있다. 서울의 국립민속박물관에도 2기가 있다. 그리고 1기는 어디로 갔는지 확인되지 않는다. 몇 해 전 국립민속박물관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입구에 마주 보고 서 있는 돌하르방을 만났다. 서울에서 돌하르방을 본 것에 반가운 마음이 들었는데 왠지 돌하르방의 눈빛이 슬프게 느껴졌다.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수십 년 동안 지내서일까. 돌하르방의 마음속에서는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을 꿈꾸고 있을는지 모른다.

국립민속박물관에 있는 돌하르방
국립민속박물관에 있는 돌하르방

제주성의 돌하르방이 이산가족 신세라면 이와 달리 정의현과 대정현의 돌하르방은 모두 제 위치를 찾았다. 정의현은 오래전에 성읍민속마을로 지정이 되면서 돌하르방이 비교적 원래 위치에 보존되어 있었다. 대정현 돌하르방은 대정현성 인근에 12기가 모두 있었으나 일부 돌하르방은 원래의 위치와 다른 곳으로 이동된 경우도 있었다. 이것을 동문과 서문, 남문이 있던 자리로 옮겼다. 제주성의 돌하르방에 대해서도 2011년부터 2015년까지 추진된 탐라문화권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각 기관에 있는 제주성의 돌하르방을 제주목관아로 이전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제주국제공항에 있던 2기를 옮기는데 그쳤다(이것인 현재 제주목관아 내부에 있는 돌하르방이다). 2015년까지 모두 옮긴다는 계획이었지만 각 기관과의 협조가 쉽지 않아 돌하르방의 제자리 찾기는 현재까지 진전이 없다.

이와 관련해서 원도심의 표지석들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삼도2동 주민센터 앞에는 곳곳에 설치한 표지석의 내용과 위치를 안내하고 있다. 안내판을 보면 상당히 많은 표지석들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 안내판에는 삼도2동 지역에 해당하는 표지석만 안내하고 있으므로 원도심에 세워진 표지석은 그보다 훨씬 더 많다. 이 표지석들은 1990년대부터 제주시와 한라일보사에서 향토사학자들과 함께 제주역사의 의미 있는 장소들을 각종 문헌을 참고하여 표시해 놓은 것으로 알고 있다. 탐라시대에서 근대에 이르는 원도심의 역사를 아우른다. 탐라시대의 흔적인 탐라시대 고성 터와 성주청 터, 고려시대 원제국 총관부 터, 조선시대 관아 건물이었던 영주관 터, 찬주헌 터, 좌위랑‧우위랑 터, 조선시대 유배인 이익‧이승훈 적거 터, 제주 여성 교육에 앞장섰던 최초의 신성여학교 터 등 역사, 문화, 풍속을 아우르는 이야기들을 전달한다. 사실 관심을 가지고 보지 않으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자세히 보아야 원도심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다.

삼도2동 주민센터에 있는 문화유적지 안내판
삼도2동 주민센터에 있는 문화유적지 안내판

개인적으로는 제주 유배문화에 관심이 있어서 유배인들의 표지석을 자주 활용하고 있다. 과거 제주성 안에는 다수의 유배인들이 머물다가 떠났다. 이들을 소개하는 원도심 유배길 투어 프로그램의 해설을 근 10년간 이어왔다. 이익의 적거터에서는 헌마공신(獻馬功臣)으로 잘 알려진 김만일 집안과의 혼인을 통해 뿌리내린 입도조 이야기를, 최익현의 적거터에서는 그가 남긴 「유한라산기(遊漢拏山記)」의 한라산의 모습을, 김진귀의 적거터에서는 인현왕후와 장희빈 시대에 아버지와 아들이 연이어 제주로 유배 오게 된 이야기를, 김정의 적거터에서는 5백 년 전 제주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의 이야기를, 광해군 적거터에서는 제주에 온 유일한 조선시대 임금으로서 파란만장한 그의 삶을, 김윤식 적거터에서는 그의 꼼꼼한 유배 시절 기록에서 신축항쟁과 관련한 이야기를 전달한다. 유배인들은 외부인들이지만 그들의 유배 이야기에는 제주의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그때 이 표지석들이 정말 중요한 이정표 역할을 한다. 적은 노력만으로도 이렇게 원도심의 기억들은 면면히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해설을 할 때마다 아쉬운 것은 과거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아 표지석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는 점이다.

원도심의 기억의 철거와 보존의 갈등은 여러 번 반복되어 왔다. 앞서 언급한 옛 제주시청사나 옛 현대극장뿐만 아니라 옛 제주대학교 건물이 철거될 때도, 공신정 터에 기상청을 다시 지으려고 할 때도, 탐라문화광장 조성 사업으로 고씨가옥이 철거될 위기에 처했을 때도 장소의 가치와 편의성의 충돌이 빈번하게 나타났다. 고씨가옥과 공신정 터처럼 위기를 넘기고 보존된 예도 있고, 그렇지 못하고 사라져버린 곳도 있다. 앞으로도 이런 갈등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과거보다 공간을 바라보는 시각이 변하고 있다. 문화재로 인정받지 못하던 근대문화유산을 보존해야 한다는 인식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정책적으로도 없애고 다시 짓는 재건축보다 유지하며 되살리는 도시재생에 방점을 찍으면서 과거처럼 단순히 편의성 위주로 바라보지 않게 되었다.

희망적인 것은 행정의 태도도 조금씩이나마 변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옛 제주시청사 건물이 철거되어 주차장으로 조성될 때만 해도 문화적 접근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옛 현대극장과 관련해서는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건물 매입 예산을 확보하고 활용계획을 세우는 등 장소의 가치를 고려한 정책을 추진하려 했다. 이제는 문화적 가치를 앞세우고 있다. 지난해 제주시청사 본관 건물 중앙 현관에 설치되었던 LED 안내판을 없애고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을 했다. 건물의 상징성을 이해하고 근대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살리려는 노력이다. 이런 행정의 변화가 원도심의 장소성이 더이상 상실되지 않는 정책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김진철 2006년 『제주작가』 신인상으로 등단. 동화집 『잔소리 주머니』, 『수월봉연대기-낭이와 타니의 시간여행』, 전자우편 : jorsa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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