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5월부터 1년간 장흥 암각문을 조사해 온 장흥문화원과 해동암각문연구회 홍순석 회장은 5월 25일 회은 위원량의 한시작품 1건을 증손댁에서 발굴했다.

▲ 위원량기념비
▲ 위원량기념비

홍교수는 지난 11월에 수리봉 위원량 ‘망곡서’ 암각문을 고증해서 학술적 가치를 제고한 바 있다.

이후 장흥문화원과 함께 위원량의 사적을 추적하면서 많은 자료를 발굴했으며 ‘회은위원량송암정유허’와 ‘위원량 기념비’ 암각문을 조사해 고증하고 있다.

회은 위원량은 전남 장흥군 기동마을의 토반인 장흥위씨 가문에서 천석꾼의 아들로 출생한 인물이다.

행장이나 비문이 없어 자세한 생애를 정리할 수 없다.

족보의 단편적인 기록과 어렸을 적에 회은을 보았던 지금의 원로들 기억이 전부이다.

원로들의 증언에 의하면, “매우 근엄하고 검소했으며 문중이나 마을에 자선을 베풀어 칭송이 자자했다”는 평을 듣는 인물이다.

회은은 청년 29세 때 한일합병의 국치를 당하고 울분을 토로하며 수리봉 정상의 암벽에 ‘망곡서’ 한시 작품을 새겼다.

가산을 희사해 인근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장흥위씨 가문의 대소사에 적극 희사했다.

부산면사무소 옆에 위치한 장흥위씨 3세 효열각을 건립한 사람도 회은 위원량이다.

그 같은 공적을 기리기 위해 장흥위씨 장천문중과 지역 유림에서는 ‘회은 위원량 중건묘각 표창비’와 ‘전참봉 위공원량 선행비’를 세웠다.

부산면 용동마을의 ‘위원량기념비’도 수로 공사비를 희사한 것에 대한 공적비이다.

1백년도 안된 기념비가 방치된 채 훼손되어 판독이 어려울 정도였지만, 전문가들의 자문으로 판독을 마쳤다.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위원량기념비’에 새긴 찬사를 보면 물길을 가로막은 바위는 깎아내고 자갈돌을 잘 쌓아서 수로를 만들었으며 물이 마르는 일이 없도록 해 농사에 큰 도움을 줬다는 내용이다.

‘위원량기념비’ 암각문은 장흥읍 부산면 용동마을 길가 수로의 암벽에 있다.

별도로 조성한 비석 형태의 기념비를 산기슭 암벽을 파고 넣어 시멘트로 고정한 것으로 해서체로 쓴 ‘魏元良紀念碑’ 6자를 중앙에 종서로 새기고 좌우에 작은 글씨로 4언 고시를 새겼다.

비석 형태의 기반암 총규모는 가로 45cm×세로 95cm이며 글씨 하나의 크기는 10cm× 10cm이다.

부산면 기동마을에 거주하는 후손들에 의하면 회은 위원량이 사재를 희사해 수로를 개설해서 농사에 도움을 준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라 한다.

조성 연대는 1930년대 후반으로 추정된다.

회은 위원량은 송암정에서 시문을 만년의 낙으로 여기고 일제강점기를 겪어낸 향사이다.

그럼에도 현재까지 홍교수에 의해 칠언절구 ‘망곡서’ 1편과 칠언율시 ‘송암정 松岩亭’ 1편만 확인된 상태이다.

이 같은 정황에서 회은의 증손댁에 소장된 조객록 갈피에서 회은의 한시 초고가 발견된 것이다.

내용을 검토한 홍교수는 “이 자료는 용동마을의 수로 정비사업 때 지은 것으로 기념비의 내용과 부합한다.

회은의 시문을 탐문해 수습하고 있는데 우연히 이 자료를 발견하게 됐다”고 밝혔다.

7언으로 지은 이 작품을 번역해 보인다.

홍교수는 이 자료를 본보에 제보하면서 “향후 회은의 시문집이 발견된다면 일제강점기 우국지사로서의 면모를 살필 수 있는 시문이 많을 것이다”며 함께 언론사와의 협동으로 찾아보면 어떨지 제안했다.

이에 장흥문화원은 장흥군과 함께 의향 장흥의 숨겨진 문화유산을 찾아보고 알리는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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