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경의 건강&생활] 고요와 여백의 미

[신윤경의 건강&생활] 고요와 여백의 미
  • 입력 : 2021. 05.26(수) 00:00
  • 이정오 기자 qwer6281@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이탈리아의 철학자 베라르디는 한국 사회의 특징 중 하나로 생활리듬의 초가속화를 꼽았다. 실제 엘리베이터에서 닫힘 버튼을 반복적으로 누르는 모습은 우리 일상의 흔한 풍경이다.

일상이 가속화돼 있기에 우리의 진료시스템 역시 세계 최고의 효율성을 자랑한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환자의 진료가 이뤄지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그 예를 찾기 어렵다. 이는 정신건강의학과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십여분의 시간동안 우울, 불안, 공황, 강박, 분노, 산만, 폭식, 중독, 망상, 환각, 치매 등의 문제를 다뤄야 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는 그 짧은 시간동안 한 존재의 상태, 추정되는 원인과 배경, 적절한 대처법을 찾아내 환자나 가족에게 설명해야 한다. 몇 마디 이야기와 관상, 태도에 근거해 점을 치는 것에 가깝다.

당신이 왜 우울한지, 숨 막히는지, 화가 조절되지 않는 지에는 수많은 요인들이 영향을 미친다. 즉, 타고난 기질과 체질, 영유아기 애착, 출생 이후 지금까지의 경험들, 주변 인물들의 특성과 이들과의 관계, 신체활동의 상태, 가정·학교·직장·국가·세계의 상황, 일조량·습도·계절변화, 먹거리와 식습관, 주거환경, 자연환경 등이 우리의 심신 상태와 연관이 있다. 뿐만 아니라 '존재하지만 알 수 없는 무언가'도 영향을 미쳐 당신의 현재 상태가 이뤄진다. 그런데 이렇게나 복잡한 존재의 상태를 십분 내외로 파악해 문제를 해결하라니 놀라움을 넘어 웃픈 현실이다. 우리는 몇 가지 부품이 조합돼 작동하는 기계가 아닌데 말이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우리는 오감에 지나치게 의존해 이의 만족만을 추구해왔다. 눈, 귀, 코, 혀, 피부의 감각에 근거한 우리의 욕구, 감정, 생각에만 관심을 기울여 우리의 존재감각을 잃어버린 것이다.

오감에 기대어 살지만 그것을 넘어선 힘이 인간 삶에 작동한다. 우리가 자는 동안 꾸는 꿈이나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말과 행동은 오감과 이성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무엇보다 죽음을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 이의 한계를 분명히 드러낸다.

우리 대부분은 오감의 세계에 갇혀 살며 우울하고 불안하고 공허하고 울컥하고 화나고 괴롭다. 이 괴로움을 SNS, 게임, 쇼핑, TV, 술로 달래며 착각 혹은 마취 속에 살아간다. 잠시 해소되지만 더욱 깊게 공허해진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답은 오감 만족의 세계에서 얻을 수 없기에.

우리는 오감 그 너머를 회복해야 한다. 미신을 믿으라거나 신비주의자가 되자는 말이 아니다. 오감을 통해 살지만 동시에 그것 이상이 존재함에 열려있어야 한다. 예수님과 부처님뿐 아니라 자기다운 삶을 살다간 모든 존재들은 이것을 알고 그렇게 살았다.

어떻게 오감 너머의 존재 감각을 일깨울 것인가.

우선 여백이 필요하다. 초고속의 세상에서 잠시 멈추는 시간, 자연의 일부로 고요히 존재하는 시간이.

얼마 전 제주돌문화공원에 이동의 편리함을 위한 열차 설치가 논의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볼거리와 먹거리로 장사하지 않는, 우주 자연에 대한 인간의 경외와 감사가 깃든 그 곳이 부디 고요와 여백을 간직할 수 있기를. <신윤경 봄정신건강의학과의원>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1406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